비기너스

비기너스 시즌3 열 번째 시간(3.24)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0-03-22 14:09
조회
50
이번 주에는 『생명관리정치의 탄생』을 끝까지 읽고 세미나를 진행했습니다. 이번에 읽은 11, 12강에서는 이해관계, 보이지 않는 손(경제절차의 인식불가능성), 시민사회 등 흥미로운 개념들이 많이 등장했습니다.

우선 ‘이해관계의 주체로서의 호모 에코노미쿠스’ 개념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는데요, 난희샘께서는 모든 것들은 이해관계에 대한 합리적 판단 속에서 자신의 행위를 구성한다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설명방식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다가와서 쉽게 반박하거나 그 논리를 돌파하기 어렵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신자유주의는 우리에게 무엇도 금지하거나 강제하지 않습니다. 군주의 명령에 복종하라거나 국가를 위해 희생하라거나 인간이라면 자고로 노동을 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개인들은 충실히 자기 자신의 이해관계를 따르면 되고 통치는 이해관계의 충돌을 중재하거나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수 없는 상태에 몰린 사람을 구제하는 방식으로만 개입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푸코에 따르면 이렇게 이해관계라는 “환원할 수 없는 동시에 양도할 수 없는 개인적 선택의 주체로 나타나는 주체”(374쪽)는 동시에 “탁월하게 통치가능한 자”(372쪽)입니다.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어떻게 통치가능화 되는 걸까요? 누구도 우리를 억압하는 것 같지 않은데, 우리는 어떤 절차 속에서 통치가능하게 되고 있는 걸까요? 이에 대해 우리가 모두 자신의 이해관계를 따라 희소한 대상들을 추구하다보니 자연히 우리 모두의 행위가 예측가능하게 된다고 설명해주신 분들도 계셨습니다. 이는 호모 에코노미쿠스가 통치가능화되는 방식에 대한 하나의 설명방식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 더 이상 우리는 특정한 코드에 복종하거나 영토를 재생산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다른 무엇으로 환원될 수 없는 자기 자신의 이해관계를 따른 결과로 우리는 학교에 가고, 직장을 다니고, 저축을 하고, 법규를 준수합니다. 이제 이해관계의 주체로서의 개인들이 원활하게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도록 경제 게임을 부단히 작동시키는 것이 통치의 테크놀로지가 된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에게 결여된 것은 상황에 대한 공유된 지각이다. 이 결합제가 없으면 행동은 흔적도 없이 지워져 없어지고, 삶은 몽상의 얼개를 갖게 되고, 궐기는 교과서에서 끝나 버린다./ 불안감을 조성하거나 단지 스캔들에 불과한 정보의 일상적 범람은 세계에 대한 총체적 이해가 불가능한 것은 아닐까 하는 우리의 두려움을 빚어낸다. 세계의 카오스적 외양은 세계를 공격 불가능하게 만드는 전운이다. 세계는 통치불가능해 보임으로써 실제로 통치될 수 있는 것이다. 계략은 바로 그것이다. 위기 관리를 통치 기법으로 채택함으로써, 자본은 단지 진보에 대한 숭배를 파국 협박으로 대체한 것이 아니라, 현재에 대한 전략적 이해, 진행 중인 활동들에 대한 전체적 조망을 확보해두려고 한 것이다. 그것을 두고 자본과 다투는 것이 중요하다. 전략 면에서 우리가 글로벌 협치보다 두발 앞서가야 한다. 벗어나야 할 ‘위기’는 없다. 우리가 승리해야 할 전쟁이 있을 뿐이다.”(보이지 않는 위원회, 『코뮨이 돌아온다』, 그린비, 23쪽)

다만 제가 좀 더 생각해보고 싶은 것은, 도대체 이해관계의 주체로서 통치가능하게 된다는 게 무슨 뜻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해관계의 환원불가능성과 양도불가능성을 전제할 때 경제절차는 통제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인지 불가능한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해관계의 추구는 어떠한 양도나 제한 없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다른 이들의 이익과 연결되며 따라서 누구도 경제 절차에 대한 총체적인 앎을 지닐 수 없으며 전체적인 관점에서의 개입이 이뤄져서도 안 됩니다. 이에 따라 세계는 ‘카오스적인 외양’을 띠게 됩니다. 한 국가의 경제는 다른 모든 나라들의 경제와 연결되어 있고, 개인들은 인지 불가능한 것으로서의 세계 앞에 고립된 원자로서 내던져집니다. 보이지 않는 위원회는, 재밌게도 바로 이러한 카오스적 외양이 통치를 가능하게 하는 원리가 된다고 말합니다. 즉 이제 개인들은 더 이상 ‘상황에 대한 공통된 지각’을 형성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우리의 삶이 놓인 조건에 대하여,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할 적에 대하여, 우리가 꿈꾸는 세계에 대하여 어떤 공통된 지각을 가지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든 상황에 대한 공통된 지각을 형성하지 못할 때 우리는 탁월하게 통치 가능하게 됩니다. 코로나 사태를 맞아 사람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마스크, 휴지, 식료품 등을 사재기하는 정도가 전부였죠. 바이러스에 대해, 또 안전의 문제에 대해, 우리의 신체와 건강에 대해 공통된 앎을 형성하지 못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가장 즉각적인, 조건화된 반응양식에 기대는 것입니다. 이는 비단 코로나라는 예외상태에만 적용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신자유주의자들이 말하듯 우리는 이해관계에 따라 행동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관계의 추구가 보여주는 것은 자신을 둘러싼 조건에 대한 이해와 통찰이 극단적으로 결여된 상태입니다. 아마도 신자유주의 통치성과 싸운다는 것은 우리 존재의 원자화와 싸우며 우리 자신과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버내큘러적인 이해를 형성하고 또 그것을 사람들과 공유하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공지입니다. 다음시간에는 채운샘 강의가 있습니다. 『젠더』를 끝까지 읽으시고, 그동안 푸코와 일리치를 읽고 세미나를 하면서 생긴 질문들을 정리해오시면 됩니다.
전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