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기너스

비기너스 시즌 3 열한 번 째 시간(3.30)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0-03-27 00:08
조회
85
지난 시간에는 채운샘의 강의가 있었습니다. 모두가 참석하지는 못하셨지만 그래도 많은 분들이 나오셔서 오랜만에 북적거림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강의는 돌아가면서 모두가 질문을 하고 채운샘이 질문들을 아우르는 강의를 해주시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저희가 텍스트를 따라가기에 급급해서 조금은 푸코와 일리치의 문제의식을 좀 놓치고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희가 앞으로 에세이를 쓰고 이번 시즌 세미나를 마무리 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내용들이 강의에 있었는데요, 저는 그 부분들을 조금 환기하고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푸코는 75년의 『감시와 처벌』과 76년에 쓴 『성의 역사』 1권을 통해서 권력에 대한 자신의 개념을 확립하였는데요, 여기에서 푸코가 넘어가고자 했던 것은 권력을 소유의 대상으로 보는 관점입니다. 이에 대항하여 푸코는 권력이란 소유되고 소유를 통해 행사되는 것이 아니라 ‘작동’하는 것임을 강조하였습니다. 권력을 소유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왜 문제일까요? 그것은 이러한 관념이 권력을 ‘억압’이나 ‘금지’와의 관계 속에서만 바라보도록 한다는 점 때문입니다. 권력을 쥐고 있는 국가와 자본가들이 시민들과 노동계급을 탄압한다는 생각. 혹은 사회적이고 시대적인 규범으로서의 ‘성역할’이 개인들에게 강요된다는 생각.

엄밀히 말해서 이러한 진술들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다만, 문제는 이때 우리가 권력이 억압할 때조차 ‘생산’한다는 것, 우리는 어떠한 강제나 탄압에 직면하기 이전에 이미 미시적인 권력관계 속에서 특정한 주체로 주체화되고 있다는 점을 놓치게 된다는 점입니다. 일리치의 『젠더』에 비추어보자면, 이렇게 권력을 실체화할 때 우리는 모든 이들을 평균화하고 그들로 하여금 동일한 필요와 욕망을 갖도록 하는 우리의 시대적이고 사회적인 조건, 즉 ‘젠더의 상실’을 사유하지 못하고 단지 모든 규범과 억압이 사라지고 모두가 공평하게 경제적 중성자가 되는 상태를 우리의 ‘해방’이나 ‘자유’와 동일시하게 됩니다. 이를 꿈꾸는 것도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분명 이는 주체 이전의 차원에서 작동하면서 우리 개개인들의 삶의 방식을 특정한 방식으로 인도하는 권력의 배치에 균열을 만들어내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에 전적으로 규정될 따름일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통치가능화’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마지막 세미나에서 우리는 ‘통치가능화’의 문제를 두고 길게 이야기를 나눴었죠. 그때 우리는 ‘통치가능화 된다는 건 우리의 품행이 예측가능해지고 통제가능해진다는 것을 뜻하는가?’라는 질문에서 막혔습니다. 왠지 이렇게만 말하면 ‘통치’의 문제에 너무나 상식적인 관점으로 접근하게 되는 것 같다는 막연한 답답함은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지 몰랐던 거지요. 그런데 권력에 대한 푸코의 문제의식을 다시 환기하는 가운데 이 문제를 생각해보면, 역시 통치가능화된다는 것을 통제가능해진다는 것과 동일시할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통치가능화’의 문제를 무의식적 차원에서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령 우리가 ‘노동’을 가치화하고 노동이 아닌 활동들을 그것과의 관계 속에서 인식하는 것, 심지어는 노동하지 않는 상태(생산적이지 않은 상태)에 죄책감을 느끼기까지 하는 것은 무의식 차원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노동에 부여된 가치를 인식해서 그에 따라 우리의 삶을 조직하는 것이 아니죠. 또 우리가 이해관계, 시장성, 상품관계, 교환관계 등등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여기는 것도 지극히 무의식적인 차원의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민호가 예로 들었던, 코로나 국면을 맞이하여 우리가 재난방지문자에 일일이 귀를 기울이고 마스크를 사재기하고 누군가를 혐오하는 방식으로, 예측가능하고 통제가능한 ‘인구’로서 움직이게 된다는 문제 또한 무의식적 차원에서 사유되어야 할 것입니다. 즉 우리가 무의식적 차원에서 무엇과 어떠한 방식으로 관계하는 가운데 우리의 욕망은 홈 파인 곳으로 흐르게 되느냐 하는 문제를 고민해봐야 하는 것이죠.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가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여기며 재생산해내는 관념들과 가치들은 또 무엇인지를 질문해봐야 하겠죠.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통치가능화된다는 것은 우리의 욕망과 품행을 특정한 방식으로 인도하는 미시적인 권력의 배치에 대한 전적인 무지 속에서 그것에 일방적으로 규정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품행이 예측가능해지고 통제가능해진다는 것은 ‘통치가능화’라는 문제가 그 결과의 차원에서 인지된 현상이라는 생각입니다. 우리의 욕망이 너무나 진부하게 작동하고 우리의 삶의 방식이 너무나 평균화되고 있다고 느낀다면, 우리는 어떤 권력의 배치(다르게 말하자면 통치의 테크놀로지)에 규정되고 있으며 그 안에서 우리가 어떤 관념이나 가치를 절대화하고 있는지 어떠한 개념들의 언저리를 머물며 어떠한 질문의 방식들을 되풀이하고 있는지를 되물어보아야 합니다.

다음 주 공지입니다. 서동진의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를 3챕터의 2번(~168쪽)까지 읽고 공통과제를 써오시면 됩니다. 신자유주의 통치성이 한국 사회에서 작동한 방식들을 분석한 책이니 자기계발, 지식기반 경제, 평생학습, 자기경영 담론 등등이 각자의 삶에서 작동한 방식에 대해서 혹은 이 책이 나온 지 10년 이상이 지난 지금 신자유주의 통치성은 또 어떤 방식으로 우리 삶에서 작동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책 내용과 관련하여 공통과제를 써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럼 화요일에 뵙겠습니다.
전체 2

  • 2020-03-27 08:53
    건화샘 정리 고맙습니다. 지난 화요일 강의 듣고 저도 그렇지만 코로나로 인한 자기검열과 그에 따른 타인들에 대한 비난과 행동양식의 통일화를 강요하는 자발적 시민들의 모습에서 일종의 전체주의를 보게 되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 되네요.
    또 신자유주의가 자본의 흐름을 원활하게 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개입을 하는 것과 개인 사이의 경쟁을 통해 호모 에코노미쿠스(기업화된 인간)을 생산해내는 것을 통치성으로 삼는다면 지금 한국이 바로 가장 적절한 예시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적절한 개입을 통해 인적자본은 최대한 유지하지만 개인의 일상은 여전히 자본주의 경쟁을 유지하며 누군가는 도태되고 누군가는 살아남게 방임해 두고 있지는 않은가 말입니다.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생각이지만 계속해서 의문이 생긴다는 점에서 공부는 어렵지만 재미있는 거네요.

  • 2020-03-27 09:10
    통치가능화의 문제는 단순히 예측가능하거나 통제된다는 의미로 보면 역시 부족하군요. 그렇게 보면 또 다시 권력의 주체와 피통치자의 위치를 실체화하게 되는 것 같아요.
    욕망이 어떤 홈을 타고 흐르게 되는가, 즉 무의식적 차원에서 우리는 무엇을 공기처럼 당연하게 느끼게 되는가 등 우리가 그렇게 인도된다는 것도 모르는 채 어떠한 품행을 생산하게 되는 것이 바로 통치가능화되는 것이겠군요. 예측가능한 행동과 통제는 그러한 미시적인 차원에서의 상호작용이 결과적으로 드러난 거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