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기너스

비기너스 시즌 3 열두번째 시간(4.14)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0-04-12 10:03
조회
103
책 읽고 세미나 하는 것은 이번 주가 마지막이었습니다.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를 끝까지 읽고 세미나를 했는데요, 그 내용 파악에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좀 계셨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확인한 것처럼 저자 서동진은 푸코의 문제의식을 충실히 따르는 방식으로 한국 사회의 신자유주의 통치성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서동진의 텍스트가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푸코적인 질문의 방식이 낯설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푸코적으로 문제를 바라본다는 것, 푸코적인 방식으로 질문을 구성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무언가 느낌은 오지만 여전히 좀 모호합니다. 에세이를 앞두고 다른 선생님들께서도 저처럼 막막함을 느끼시리라 생각합니다.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생명관리정치의 탄생』과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를 참고하여 푸코적으로 질문한다는 것에 대한 제 생각을 간단히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결국 국가의 메커니즘을 이용한 이런 비판, 국가의 역학에 대한 이런 비판이 인플레적 경향을 갖는다고 제가 생각하는 이유는, 이런 비판에 자기 자신에 대한 비판과 분석이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즉 거기서는 우리 사유의 이처럼 다양한 형태로 현재 유통되고 있는 그런 종류의 반국가적인 의혹, 그런 국가혐오가 실제적으로 어디로부터 기인하는 것인지를 검토하려고 시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푸코,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난장, 267쪽)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4강에서 푸코는 국가혐오에 의한 ‘비판의 인플레적 경향’를 문제 삼았습니다. 여기서 푸코가 문제 삼는 것은 ‘국가 일반’에 대한 비판입니다. ‘국가’라는 대상을 실체화하여 시민사회에 대한 통제를 무한히 강화하려는 내적 경향을 지닌 괴물의 모습으로 형상화하거나, 상이한 형태의 국가들의 차이들과 구체성들을 퉁치고 모든 국가들의 귀결점에 전체주의 국가가 있다고 고발하는 식의 비판들. 푸코에 따르면 비판의 대상을 실체화하는 이러한 게으른 접근의 방식이 문제적인 이유는, 그것이 ‘자기 자신에 대한 비판과 분석’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비판이 자리하고 있는 구체적 조건에 대한 질문을 결여한 채 상식적인 전제들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죠.

여기에는 두 가지의 문제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선 하나는 권력을 외부적 강제나 억압과 동일시한다는 점입니다. 권력을 중앙의 권력(즉 국가)에 동일시하고 그 반대편에 자유를 위치시킨다는 점입니다. 권력이 중단될 때 자유가 시작된다는 생각.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국가의 강제력과 개인 혹은 개인들의 자생적인 연합으로서의 시민사회가 그 안에 품고 있는 것으로서의 자유의 충돌, 이라는 생각. 문제는 이때 우리가 도처에서 작동하는 권력 관계들 속에 놓여 있으며 특정한 시대적이고 사회적인 권력의 배치 속에서 ‘주체’로 만들어진다는 점을 간과하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매일매일의 (담론적이고 비담론적인) 실천들 속에서 특정한 권력의 배치를 재생산하는 방식에 대해 무지하게 됩니다. 뒤집어 말하자면 우리의 품행이 인도되는 방식들에 대해 무지한 채(권력의 ‘생산’에 대해 사유하지 못한 채) 단지 ‘악한’ 권력의 억압과 폭력만을 문제 삼게 되는 것이죠. 이때 우리 사유의 실천성은 소거됩니다. 우리의 행실이 인도되는 구체적인 방식들을 문제 삼고 그것과 다르게 관계 맺기를 시도할 여지는 없습니다. 비판은 그저 더 합리적인 시스템, 더 투명한 국가를 요청하고 권력을 소유한 집단이나 조직을 감시하는 일밖에 수행할 수 없게 됩니다.

다음으로는 특정한 가치들을 자명한 것으로, 또 특정한 대상들을 실체적인 것으로 간주한다는 점입니다. 가령 ‘자유’란 무엇일까요? 초월적이고 선험적인 대상으로서의 자유를 전제할 때에도 역시 ‘질문’의 가능성은 제거됩니다. 우리가 가치화하고 있는 ‘자유’란 어떠한 담론적 질서를 전제하고 있으며 그러한 관념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품행을 어떠한 방식으로 구성하고 있는지를 고민할 수 없게 됩니다. 한 마디로 ‘어떤 자유인가?’라고 물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이죠. 서동진이 보여주듯 우리는 아무런 의심 없이 억압이나 강제의 반대편에 있는 것으로서의 ‘자유’를 실체화해왔습니다. 주입식 교육과 자기주도적 학습을 대립시키고 강제된 노동과 창조적이고 자율적인 활동을 대립시키면서요. 이렇게 자유를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일 때, 가령 우리는 그 자유가 사실은 자기 자신에 대한 스스로에 의한 항구적인 감시와 관리에 다름 아님을 볼 수 없게 됩니다. 서동진이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에서 끊임없이 강조하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죠. 그렇다면 푸코가 이야기하는 ‘비판의 도덕성’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어떻게 자기 자신에 대한 비판과 분석을 수행할 수 있을까요?

“푸코는 진리에 대한 논리학 혹은 철학이론이 아니라, 진실을 말하기, 즉 진실 발화의 ‘규칙들’, 진실-말하기의 규칙들에 대한 거의 사회학적이고 경험적인 비판을 실행했다. 그는 언젠가 내게 말하길, 니체는 진실의 철학자가 아닌, 진실을 말하기의 철학자라는 것이다.”(폴 벤느, 『푸코, 사유와 인간』, 150쪽)

“저는 경제학자가 아닙니다. 그보다는 역사학자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저는 미래에 대한 강박적 억측을 바로잡으려는 목적으로 역사를 공부합니다. 역사학자에게 현재는 미래의 과거로 나타납니다. 역사를 공부하면 공공의 선을 논하려 할 때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용어 속에 숨은 시간 벡터를 예민하게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역사학을 연구하면 제가 연구하는 사료의 저자 대부분의 저의 행동과 생각, 심지어는 지각의 바탕이 되는 명백한 확실성을 상상조차 못했다는 점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저는 현 시대의 전제를 예민하게 파악하려고 역사학을 공부합니다. 이러한 전제는 검토되지 않고 그냥 지나쳐 버려 우리 시대 특유의 선험적 지각형태가 되어버렸습니다.”(이반 일리치,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27쪽)

비판자로서 푸코가 택하는 방법론은 바로 ‘역사적 관점’입니다. 그리고 이는 일리치의 경우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 우주 안에 초월적이고 선험적인 것, 그 자체로 주어진 것, 물 자체 같은 것은 없습니다. 대상은 그것을 지각하고 해석하고 가치평가하는 인식활동과 무관하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또 특정한 가치는 언제나 그것을 가치화하는 실천들, 가치를 가치로 만드는 존재 방식과 삶의 양식과 더불어서만 가치로서 존재하고 작용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본다는 것은 이처럼 사유로부터 보편소들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역사적 비판이 수행해야 할 작업은, 특정한 인식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역사적 조건을 탐사하는 일입니다. 일리치 식으로 말하자면 ‘지각의 바탕이 되는 명백한 확실성’에 해부하는 것이고, 푸코 식으로 말하자면 특정한 시대와 사회 속에서 진실-말하기를 가능하게 하는 규칙들과 절차들이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일입니다. 역사적 시선을 통해 우리에게는 너무나 당연해서 의식에 들어오지도 않지만 과거나 미래의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낯선 것일 인식의 전제들과 사유의 토대들을 파악해내는 것.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품행을 조건 짓는 시대적 배치에 일방적으로 규정당하지 않고 그 안에서 주어지지 않은 길을 만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접근방식을 고려할 때,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푸코가(그리고 일리치와 서동진이) 참/거짓이나 선/악의 차원에서 문제를 논평하고 있지 않다는 점인 것 같습니다. 가령 푸코가 신자유주의자들을 비판할 때, 그것은 그들이 틀렸다는 것도 악한 의도를 지녔다는 것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신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유는 사실 자유가 아니다’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것은 어떤 자유인가?’라고 질문하는 것이죠. 서동진의 설명을 빌리자면 이는 신자유주의 담론이 주어진 대상을 어떻게 재현하는가, 그것에 대한 태도는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앎의 대상으로 구성할 때 그와 동시에 형성되는 차원들을 함께 이해”(서동진, 292쪽)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유라는 언표가 어떠한 진실 말하기의 체제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지, 어떠한 존재 방식 속에서 그것이 가치화되고 있는지를 질문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니 푸코, 서동진, 일리치 등 역사적 관점으로 문제를 바라보는 저자들을 읽을 때 우리는 그들이 특정한 담론에 대해 동의하는가 반대하는가, 좋다고 말하는가 나쁘다고 말하는가를 물어서는 안 됩니다. 가치의 가치를 묻고, 진실-말하기의 조건을 분석할 때, 그들이 의도하는 것은 특정한 대상을 가치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유를 조건 짓는 인식의 틀 자체에 균열을 가하고 그로부터 다른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독자로서 우리가 시도해보아야 할 것은 그들로부터 ‘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시도한 계보학적 탐사로부터 힌트를 얻어 우리의 현재적 조건, 우리가 의심한적 없던 사유의 전제들에 질문을 던져보는 것이겠죠.

다음주에는 에세이 초고 발표가 있습니다. 이번 학기에 읽었던 책 중 한 권(여러 권도 상관 없습니다)을 골라 우리의 인식의 전제들과 질문의 방식들을 낯설게 보기를 시도하는 글을 쓰면 되겠습니다. 완성본은 5페이지이고, 다음주에는 최소한 문제의식과 글의 전개방향이 명료하게 드러나는 3페이지 이상의 초고를 가져오시면 됩니다~ 화요일에 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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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4-13 15:09
    오호, 바로 그것이었군요. 푸코가 18세기 통치성을 분석하며 스미스나 마키아벨리의 저술을 가져와서 이야기하거나, 20세기 신자유주의를 분석하며 하이에크나 뢰프케를 마구 언급할 때, 그것은 그들에게 동의하거나 그들을 고발하려거나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하려는 의도가 아니었군요. 푸코가 자신의 방법론이라고 소개했던, 보편적인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하고서 그것들을 둘러싸고 질서지워진 것처럼 보이는 상이한 사건들과 실천들에 어떤 역사를 이야기할 수 있는가를 질문하는 방법에서처럼 푸코의 관심사는 역시 '진실 체제'에 대한 분석에 있군요. 푸코를 읽으며 읽지 말아야 할 것은 역시 통치 바깥의 자유, 권력 바깥의 주체, 역사 바깥의 인식을 전제하지 않는 것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