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글쓰기

<불교와 글쓰기> 2학기 4회 수업 후기

작성자
윤지
작성일
2021-06-05 11:40
조회
2615
우주는 공명한다, 그럼 우리는?!

지난 수업 쉬는 시간에 선생님께서 강의 중 말씀하신 메트로놈의 유투브 영상을 보며 “와, 신기하다~”고 몇 몇 학인들이 감탄을 했습니다. 여러 대의 메트로놈을 일렬로 세워놓고 서로 다른 박자로 움직이게 했더니 얼마 간의 시간이 지나자 모든 메트로놈이 일제히 동일한 움직임을 만들어낸 겁니다. 메트로놈은 설정된 박자와 빠르기로 지속적인 움직임을 하도록 고안된 물체인데 어떻게 서로 다른 움직임을 동일하게 맞출 수 있었을까? 정말 신기합니다. 이건 생명체 같은 의식이 없는 물질이라도 같은 공간에 있을 때 서로 공명하며 리듬을 맞출 수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궁금해서 더 정보를 찾아 보니 메트로놈 뿐 아니라 다리 위에서 사람들이 보폭을 맞추어 걸을 때 다리가 공명하여 흔들리는 것도 같은 원리라고 합니다. 이런 현상들은 우주에 있는 모든 물질들, 존재들의 에너지가 서로 영향을 미치고 파동을 일으켜 하나의 물결을 형성하게 하는 힘이 있다는 것을 추측하게 합니다.

조금만 생각을 해보면 어떤 특정 공간에 함께 거주하는 사람들이나 물질들의 공통된 기운이라는 게 있습니다. 가령 절에서 수행하는 승가 공동체나 수도원에서 수행하는 수도사들에게서 느껴지는 기운 같은 것들, 이런 것도 보이지 않게 서로 에너지를 주고 받고 공명하며 형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존재하는 것들이 서로 서로 에너지를 주고 받고 파동을 맞추고 리듬을 맞추는 것, 이것은 우주의 법칙과도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왜 우리의 마음은 타인과 그리고 세계와 쉽사리 공명하지 못하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서로 공명하는 메트로놈의 파동처럼, 내 마음의 파동이 타인의 파동과 조화롭게 어우러질 수 있다면 미움도 분노도 싸움도 없을텐데 말입니다. 불교는 그것이 인간이 지닌 분별심, 자아 의식 때문이라고 합니다. 내가 ‘나’라고 붙들고 쥐고 있는 것이 너무 강해서 흘러가야 할 파동이 뭉텅이로 쌓여있는 모습이라고나 할까요. 나의 감정, 나의 느낌, 나의 기억, 나의 믿음, 나의 옳고 그름... 나의 이 모든 것들이 너무도 소중해 다들 자신의 것들을 꽉 붙들고 있다보니 우리는 메트로놈처럼 그토록 쉽고도 심플하게 공명할 틈이 없나 봅니다. 그렇게 본다면 공명한다는 것은 나와 나의 것들로 꽉차 있는 마음을 비우는 것이고 내 마음에 붙들고 쥐고 있는 것을 놓아서 흐르게 하는 것이겠죠? 이것을 부처님은 아만, 아애, 아취, 아견을 내려놓고 제발 분별 짓지 말라는 가르침으로 말씀하셨던 것이고요.

자아의식을 걷어냄으로써 분별로 응집된 것이 존재의 몸과 마음의 파동이 우주의 파동과 일치하게 되는 상태 - 이게 바로 붓다의 상태겠죠. 부처님을 빛으로 찬탄한, 도저히 이해 불가였던 화엄경의 묘사가 그러고보니 오직 온 세계를 빛의 파동으로 비추는 부처님을 보여주었던 겁니다. 그리고 이런 차원이 인간으로서 결코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걸 불교는 얘기하죠.

그.러.나! 인간은 내가 붙들어 집착하는 에너지를 한 생이 아니라 수억겁의 생을 통해서도 놓지 못하나 봅니다. 법구경에 나오는 수많은 전생담들은 한 존재가 품었던 마음이 결코 사라지지 않고 여러 생을 반복해 동일하게 윤회함을 보여줍니다. 샘께서 저희에게 법구경을 읽으며 자신의 전생담을 찾아보라고 하셨던 것도 우리 스스로 쥐고 있는 어떤 마음, 어떤 습관, 어떤 행위의 경향성이 자신에게 반복되고 있는지 찾아보라는 말씀이셨겠죠. 전생담을 보고 ‘아, 이 사람도 나와 똑같구나!’라는 데서 멈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반복을 거듭하게 하는 내 마음의 분별과 뭉텅이가 무엇인지를 바라 보는 것이어야 하나 봅니다.

인간을 구속하는 지층들

들뢰즈 가타리는 인간을 구속하는 지층에 3가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지층이란 흘러다니는 입자, 질료들이 결합을 하면서 단단하게 뭉치기도 융기하기도 하면서 켜켜히 형성된 층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파동으로 흐르는 것들을 붙잡아 규정하고 고정화 해서 지층으로 만드는 작용이 인간 자신을 구속하게 만든다는 것이죠. 그 세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전체-부분의 관계를 종속적으로만 보는 ‘유기체’가 첫째고, 말이란 것에는 주체의 의도가 담겨있기 때문에 이것을 해석해 내야한다고 보는 ‘의미 생성과 해석’이 두 번째이며, 사회가 부여한 규정된 주체성 속에서 살아가는 ‘예속적 주체화’가 세 번째입니다. 표현은 어렵지만, 결국 이 세가지의 공통점은 흐름들을 포획해 규정성 안에 가두어 놓는 것입니다. 신체에 딸린 손은 손이 하는 역할로만 귀속되고 발은 정해진 발의 역할만 해야 한다고 하면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이 너무나 선명해집니다. 조금이라도 부분 자체의 역할에 어긋나면 거기에는 즉각 어떤 식의 분별과 구속이 일어날 겁니다. 형성된 것에 불과한 주체를 자신의 동일성으로 삼을 때에도 그 주체에 포함되지 않는 타자를 배척함으로써 자신과 타자를 대립시키는 구속을 낳습니다.

그래서 이 구속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나느냐가 관건이 되겠죠. 들뢰즈와 가타리는 여기서 ‘고른판’이라는 개념을 얘기하죠. ‘고른판(consistance)’이란 끊임없이 다른 것들과 공존하면서 자신의 개체성을 변화 속에서 유지해 가는 흐름의 평면, 즉 규정된 것들이 없는 평면을 의미합니다. 하나의 개체는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양태들의 인과 연쇄를 함축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속성을 지닌 생명 그 자체이자 우주라고 할 수 있는 내재성의 평면이 ‘고른판’이라고 합니다. 말이 좀 어렵지만, 무엇인가를 규정화하려는 평면이 지층이라면 그 자체로 어떤 규정성도 가지지 않으면서 생성하는 평면이 고른판인 것이죠.

그럼 지층을 완전히 버리고 고른판으로만 가야 하느냐, 그건 아닙니다. 우리는 한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면서 그 사회의 코드나 특성을 완전히 무시하고 살 수는 없죠. 이것도 삶의 조건입니다. 규정화하고 실체화시켜 붙들려는 힘과 무규정성으로 운동하는 힘 사이에 놓여있는 배치, 이 배치가 어떠하느냐에 따라 그 사회, 그 삶의 특징이 지워집니다.

4가지 기호체계

특정 배치 속에 있는 하나의 집단은 그 집단 내에서 작동하는 기호체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기호체계는 4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먼저 기표작용적 기호체계란 하나의 중심에서 기호를 발산하고 이 기호를 해석하고 그 해석의 의미를 따라 움직이는 체계를 말합니다. 왕이 지배하는 전제군주제 사회나 사장님의 명령 한마디에 모두가 따르는 회사 조직 같은 곳이 이런 기호체제가 작동하는 곳이겠죠. 두 번째 전기표작용적 기호체계는 일종의 원시부족 사회에서의 체계로 중심적 권력을 만들지 않으려는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경우입니다. 세 번째, 반기표작용적 기호체계는 기표작용적 기호체계의 외부에서 작용하며 기표작용적 기호체계를 흩뜨리거나 벗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견고한 기표작용적 기호체계가 작동하는 정착민 세계의 외부에서 정착민의 코드를 와해시켜버리는 유목민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마지막으로 후기표작용적 기호체계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명령과 해석이 주어지던 기표작용적 기호체계와 달리, 개인이 자기 스스로 의미의 원안을 만들어 냅니다. 즉 무엇을 중심으로 세계를 의미화 할 것인지를 결정하고 그 중심과의 관계에서 자기의 세계를 형성하는 것이죠. 이렇게 구성되는 세계란 이미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므로 주어진 명령을 그대로 받아들이던 전제군주 시대, 신을 중심으로 모든 의미가 형성되었던 시대로부터 탈주선을 그린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스스로 해방이 되었느냐하면 그렇지가 않죠. 그 이유는 이전의 예속으로부터 해방된 인간들이 또 다시 다른 우상을 만들어 그 원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구속하는 하나의 지층, 하나의 견고한 체계로부터 도주선을 그어 탈영토화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죠. 기껏 중심으로부터 달아났는데 또 다시 중심에 갇히는 것, 그것을 들뢰즈와 가타리는 재영토화라고 했습니다. 재영토화를 통해 오히려 더 촘촘하고 단단하게 중심에 고착될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인간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이상 우리가 속해있는 배치와 기호체계를 무조건 무시하고 떠나버릴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속해있는 배치를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는 것이죠. 내가, 우리가 어떤 주체화의 점을 삼고 세상을 의미화하고 있는지, 내가 어떤 의미의 원안에 사로잡혀 있는지, 거기에서 어떤 번뇌와 수난(passion, 정념)을 겪고 있는지 살펴보고 탐색해 봐야 합니다. 아주 면밀하고 신중하게!

의미를 내보내거나 해석하지 말고 실험을 해! 너의 장소, 너의 영토성, 너의 탈영토화, 너의 체제, 너의 도주선을 찾으란 말이야! 이미 만들어진 너의 유년기와 서구의 기호론에서 찾지 말고 너 자신을 기호화하라고!”    (들뢰즈 , 가타리 <천 개의 고원> 26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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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6-06 11:16
    전생담을 보고 ‘아, 이 사람도 나와 똑같구나!’라는 데서 멈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반복을 거듭하게 하는 내 마음의 분별과 뭉텅이가 무엇인지를 바라 보는 것이어야 하나 봅니다. 그렇군요. 근데 내 마음의 분별을 보는 것이 쉽지 않네요. 후기 읽고 힘내서 다시 보겠습니다.

  • 2021-06-06 21:18
    이 바쁜 와중에 귀한 후기를 올려주시고...
    숙제하느라 바빠서 나중에 보려고 했는데 후기가 매우 재밌고 유익합니다. 윤지보살님...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