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문화팀 7주차 후기

작성자
혜림
작성일
2019-12-23 00:42
조회
75
3주간에 걸쳐서 <전쟁과 평화>를 모두 읽었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작품 전체에 걸쳐서 가장 큰 삶의 변화를 보여준 인물은 피에르였습니다. 4권에는 피에르가 포로 생활을 하면서 내적인 자유를 깨닫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번 주 토론시간에는 그 장면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피에르는 극도의 궁핍과 외적인 자유가 제약된 곳에서 역으로 내적인 자유를 느끼게 됩니다. 그가 포로 생활에서 느낀 행복감은 ‘괴로움이 없고 모든 욕구가 충족되고 선택할 자유가 생기는 것’과는 무관했습니다. 오히려 모든 제약에서 벗어난 완전한 자유 상태란 없음을 깨달았을 때, 그는 ‘생명력이 그의 영혼 속에서 더욱 굳건하게 자라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세상에는 무서울 것이 하나도 없다는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그는 깨달았다. 인간이 완전히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는 상황이 존재하지 않듯, 자신이 자유롭지 못하고 행복하지 않을 수 있는 상황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고통에 한계가 있고 자유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 그 경계가 매우 가깝다는 것을 깨달았다. (...) 볼이 좁은 무도화를 신었을 때나 지금처럼 종기로 뒤덮인 맨발로 다니는 때나 자신이 똑같이 괴로워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기 의지로 아내와 결혼했을 때가 밤중에 마구간에 갇혀 있는 지금 보다 더 자유롭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 이제야 피에르는 인간의 생명력이 지닌 모든 힘을 깨달았다.”(4권, 306쪽)

포로 생활을 하면서 극적으로(?) 이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던 데에는 카라타예프라는 사람과의 마주침이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카라타예프는 “자신에게로 이끌어 준 모든 것들, 특히 어떤 특정한 인간들이 아니라 자기 눈앞에 있는 인간들”과 애정 어린 관계를 맺으며, 무수한 인연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것들을 해석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피에르가 깨닫게 된 것이 이 사람 때문만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요. 모든 사람이 살아가면서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을 만나고 그 속에서 스승을 만나지만 깨달음을 경험하게 되는 경우는 드뭅니다. 깨달을 조건이 다 완비되었을지라도, 개인적 차원에서의 실천들이 요청되는 것 같습니다. 피에르가 내적인 자유를 느낄 수 있었던 그의 특별함은 무엇이었을까를 조에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피에르는 뜻하지 않게 많은 재산을 상속받고, 주변에서 칭찬하는 아름다운 아내와 결혼했고, 자신의 사상을 사람들과 나누며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지만, 그런 삶에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항상 다른 삶을 찾아 나섭니다. 그래서 익숙한 곳을 훌쩍 떠난 여행길에서 프리메이슨 활동을 하기도 하고, 군인도 아니면서 자발적으로 전쟁터 한복판에 나가서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상황에 처하기도 하고, 프랑스 군대에 의해 점령된 모스크바를 떠나지 않고 그곳에 남아 무모하게 나폴레옹을 암살하겠다고 시도하다가 포로로 잡히기도 합니다. 피에르는 예측할 수 없는 위험한 상황들과 마주했고 그 속에서 여러 삶의 스승들을 만났고 의문들을 하나씩 해결해 나갔습니다. 문제를 해결했다기보다 의문들을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닫는 과정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피에르는 삶의 매 국면마다 ‘왜’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전쟁, 죽음, 사랑, 불륜..)은 왜 일어나는가?' 이 질문은 이 세상을 의심하고 비판하는 과정 속에서 나온 질문입니다. 그러나 포로 생활을 하며 그가 깨달은 것은 ‘왜’에 대한 답, 제1의 원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건이 왜 일어나는지를 인간은 알 수 없으며, 모든 것은 일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일어난다는 필연성을 이해하게 됩니다. 톨스토이는 에필로그에서 “그 자체로는 불가해한 자유의 힘은 우리가 그것을 지배하는 필연 법칙을 아는 한에서만 이해 가능하다”라고 말합니다. 피에르는 이 필연 법칙 속에서 운동하는 자유의 힘, 생명력을 느꼈던 것입니다. 예전에 그는 이 필연 법칙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냥 어딘가에 틀림없이 있을 것이라고 느껴 그것을 찾았을 뿐입니다. 그래서 가까이 있는 모든 것에서 그는 ‘유한하고 저급하고 현세적이고 무의미한 것’만 보았습니다. 그러나 필연 법칙을 체득한 후 피에르는 달라집니다. 그의 입가에 언제나 삶의 기쁨이 어린 미소가 감돌고 눈에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 즉 ‘저들도 나처럼 만족하고 있는가?’ 하는 물음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필연 법칙은 추상적 개념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 눈 앞에 펼쳐지는 모든 것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깨달음의 순간을 경험한 후 피에르는 외적인 면에서 거의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달라진다는 것이 있다면 삶의 사소한 변화에 주목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피에르는 모든 사람들의 호의를 끌어내는 새로운 특징을 보였다. 그것은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방식대로 사물을 생각하고 느끼고 바라볼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말로는 사람의 생각을 바꿀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예전에는 피에르를 불안하고 짜증스럽게 했던 저마다의 이런 당연한 독자성이 이제 그가 사람들에 대해 품는 공감과 흥미의 토대가 되었다. 자신의 삶과 타인들의 시각 사이에, 혹은 그 시각들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나 때로 완벽하기까지 한 모순은 피에르에게 기쁨을 주고 조소 어린 온화한 미소까지 불러일으켰다.”(4권, 417쪽)

피에르에게 인간의 독자성으로 인해 생겨나는 모순과 갈등들은 왜라는 질문을 통해 해결되야 하는 무엇이 아니라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무엇이 됩니다. 피에르는 차이가 생기는 원인이 아니라 현재 자신과 마주치는 무수한 차이들 자체가 궁금합니다. 그는 지금 이 순간 일어나고 있는 것의 원인이 저기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하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서, 역사적 흐름 속에서 하나의 원인으로 참여함으로써 평온함과 기쁨을 느끼면서 살아갑니다. 그렇게 되어갈 수밖에 없음(필연성)을 이해하는 것이 인간을 무력하게 만드는 것이 아님을 피에르의 삶을 보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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