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역사팀 7주차 후기

작성자
영식
작성일
2019-12-24 23:34
조회
83
크로포트킨과 관련해서 생각해볼 문제와 역사에 대해 채운 선생님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크로포트킨의 글은 대부분 책으로 출간되기보다 팜플릿으로 씌어졌습니다.

근대는 낮은 출신에서 높은 출신으로 올라가는 것을 더 좋아하고 성공 신화로 봅니다. 그러나 높은 출신에서 낮은 출신으로 내려가는 것은 쥐고 있던 것을 내려놔야하기 때문에 더 어렵습니다. 대표적 인물은 붓다이고 크로포트킨이나 톨스토이도 귀족 출신입니다. 낮은 자에 대한 동정이나 연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숭고함에 이끌리면 자기가 가진 것을 천박하게 여기는 순간이 옵니다. 귀족 출신이 자기 것을 버리고 낮은 곳으로 간다는 문제의식으로 크로포트킨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크로포트킨은 러시아에 머물지 않고 스위스나 영국 등에서 거주했습니다. 그렇다보니 볼셰비키 혁명에 대해 동조할 수 없다고 느꼈고 볼셰비키들에게도 배척당했습니다. 혁명 이후에 러시아로 돌아갔을 때 현장에 없었기 때문에 개입하기 어려웠고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크로포트킨은 젊었을 때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벗어나 과학을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과학을 공부하려 한 이유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과학적 사회주의를 표방했습니다. 그 이전의 사회주의를 공상적 사회주의라고 말합니다. 마르크스의 사회주의는 논리를 통해 사회에 대해 학문적으로 분석합니다. 마르크스는 이론가이고 레닌은 혁명가입니다. 마르크스는 사회에 대한 이해의 틀을 마련했습니다. 엥겔스는 마르크스가 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마르크스는 유토피아에 대한 환상이나 가난과 착취당하는 자들에 대한 연민으로 세계를 변혁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메커니즘을 논리적으로 분석했습니다. 정점은 자본입니다. ‘자본주의’가 나쁘다는 주장이 아니라 상품에 대한 분석에서 시작해서 이윤과 착취와 자본주의 메커니즘을 과학적으로 아카데믹하게 분석했습니다. 마르크스의 사상을 현실적인 것으로 만들어준 것은 레닌입니다. 옛날 소련에서는 ‘맑스레닌주의 미학’, ‘맑스레닌주의 철학’, ‘맑스레닌주의 정치경제학’이라 불렀습니다. 맑스주의와 레닌주의가 따로 있지 않았습니다.

 

과학은 19세기 지식인을 지배한 태도인데 이들은 분석되고 논리화 되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푸코가 말한 대로 인문과학(휴먼 사이언스)이 19세기에 출현했습니다. 인간 자체가 앎의 대상으로 출현했고 그 중 하나가 정치경제학입니다. 노동이란 무엇인가, 임금은 무엇을 기준으로 책정되는가, 인간답게 살기 위해 갖춰야 하는 조건은 무엇인가 문제 삼고 들어가는 것이 정치경제학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생물학입니다. 진화에 대한 생각이 다윈 이전에도 있었는데 그 이전은 자연사라 합니다. 자연사는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변화했는지 다루고 진화론은 커다란 변수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다룹니다. 이전에는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치워버렸었는데 진화론에서는 격변을 중요하게 다룹니다. 시간의 불연속성과 연관되고 불연속을 내포하는 역동적인 형태가 됩니다.

이런 과학이 생겨난 것은 생명체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다루게 됩니다. 인간은 자기의 생명을 대상으로 하는 주체가 됩니다. 19세기 과학발전과 인간의 학문 발전은 인간이 인간 자신에 대해, 세계에 대해 근본적인 근거를 마련하는 접근 방식으로 달라졌습니다. 19세기 학문의 특징은 토대 마련입니다. 토대 중 하나가 자연과학이었고 아나키스트였습니다. 특히 크로포트킨은 비전의 근본 토대를 과학으로부터 출발했고 시베리아에서 탐험을 하며 동물, 식물들의 세계에 대해 연구했습니다. 시베리아에서 지리학자, 탐험가로서의 이력 없었다면 상호부조론은 안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다윈은 투쟁을 중요하게 봤고 크로포트킨은 투쟁보다 공생과 협조를 더 부각시켰습니다. 그 차이를 만드는 것은 이 사회의 문제를 무엇으로 보느냐, 비전을 어떻게 가져갈 것이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맞느냐 틀리냐, 보편적이냐 아니냐 질문하면 안 되고 니체의 말처럼 ‘세계 해석 속에 들어있는 힘의지’가 어떤 것인지 물어야 합니다.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에 들어있는 ‘힘의지’는 인간이 어떻게 서로 투쟁하거나 착취하는 관계에서 벗어나서 본성에 따라 함께 공존을 도모하며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크로포트킨은 자본주의에 대해 문제시 한 것이 첫째, 임금노동입니다. 임금은 상식적으로 노동의 대가입니다. 왜 우리는 노동을 무엇으로 교환해야 할까요? 임금과 교환되지 않은 노동은 무쓸모가 되어 우리 자신으로부터 떼어냅니다. 임금을 주는 자에게 나 자신을 종속시키는 결과가 됩니다. 임금노동은 주인과 노예를 전제하고 재생산합니다. 이것에 대해 크로포트킨은 비판합니다. 크로포트킨은 우리는 왜 불안하기 때문에 노동을 하게 되었는지 자주 말합니다. 노동을 추동하는 활동이 결여와 불안입니다. 노동이 내가 어떤 일을 해서 저 사람과 행복할 수 있는지 추동될 수도 있는데 이상합니다. 하지만 임금노동의 시스템 속에서 노동을 추동하는 것은 임금이고, 임금을 받지 못할지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인간이 자유로울 수 없고, 자기의 본성에 따라 살 수 없습니다. 모든 생명체는 싸울 때 싸우더라도 자기 종을 보존하려고 하고 함께 서로 돕는 본성을 가지고 있는데 임금노동은 이것을 거스른다는 것이 크로포트킨의 믿음입니다. 자기의 활동이 누군가를 살리고, 함께하는 게 본성인데 임금노동은 그 본성을 펼치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그래서 임금노동을 어떻게 철폐할 것인가, 임금에 매몰되지 않는 활동으로서의 노동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무엇에 대한 대가로 돈을 주고받으면 종속관계로 만듭니다. 마르크스는 임금이 선불로 지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후불로 지급하면 그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을 때 대가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은 자본주의 논리입니다. 무엇에 대한 대가로 무엇을 받는다는 교환주의 사고방식을 깨야 합니다. 그냥 주고받는 관계가 아나키스트 특히 크로포트킨이 꿈꿨던 상호부조의 세계입니다. 주고받는 것이 기뻐서 해야지 대가가 되면 생물 본성에 반하기에 임금노동을 어떻게 철폐할 것인가가 중요했습니다.

둘째, 분배의 문제입니다. 이 지점에서 맑시즘과 다릅니다. 사회주의는 분배를 공평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독재를 해서 분배를 고르게 한다는 볼셰비키당을 크로포트킨은 반대했습니다. 모든 인간이 다 다르고 필요한 것도 다르고 변수가 많습니다. 일괄적으로 노동을 계산할 수 없듯이 분배도 마찬가지입니다. 노동을 추상화하는 것을 마르크스는 반대합니다. A와 B의 노동에서 똑같은 한 시간이라도 손기술에 따라 물건이 달라집니다. 이걸 추상적으로 바꾸는 게 자본주의입니다. 노동을 추상화하니까 임금이 추상화되고 분배도 추상적 임금으로 환원됩니다. 사는 환경 등이 모두 다르므로 크로포트킨은 구체적 네트워킹 속에서 분배문제를 서로 결정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이는 국가가 합의하기 어렵고 적용이 불가능합니다. 아나키스트는 국가에 반하는 공동체를 깔고 갈 수밖에 없습니다. 임금노동은 자본주의에 반하고 분배는 사회주의적 평등에 반합니다. 아나키즘은 둘 어디로도 환원될 수 없는 측면이 있습니다.

 

크로포트킨은 사람들이 소외되지 않는 노동과 인간의 활동이 다른 사람의 활동과 더불어 갈 수 있는 차원, 만물에게 도움을 주는 활동을 할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이 부분이 불교와 통하는 지점입니다. 소련에서 무정부주의자가 불교도가 됩니다. 우리나라의 박노자도 대표적 케이스입니다. 무정부주의자가 불교와 결합되는 건 우리는 어떻게 나 자신을 위해서 다른 모든 사람 혹은 만물에게 도움을 베푸는 사람이 될 수 있는 존재가 될 것인가 입니다. 말 그대로 만물은 서로 돕습니다. 그러지 않고는 자기 존재가 있을 수 없고 그 원리는 자연과학으로부터 가져옵니다. 진화론, 생물학, 지리학에서 만물이 존재하기 위한 조건이 상호부조입니다. 거기에 바탕을 깔고 아나키스트 사상이 무르익습니다. 크로포트킨의 주요 저작을 「상호부조론」으로 보는 것은 아나키즘이 깔고 있는 전체 세계에 대한 이해 때문입니다. 만물이 서로 돕는다는 자연의 전체 테제에 반하는 것이 자본주의 질서입니다. 함께 자주적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공동체성을 모색하자는 게 크로포트킨의 생각이었습니다. 삶에서 무엇을 공부하고 어떤 문제의식을 기르면서 갔는가 이 맥락에서 상호부조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19세기 유럽 안의 사회주의적 사상, 공상적 유토피아주의, 아나키즘이 종합적으로 나온 방식이 크로포트킨입니다. 크로포트킨의 아나키즘을 보통 아나키 코뮌이라고 합니다. 크로포트킨에게 영향을 많이 준 게 1871년 파리코뮌입니다. 부르주아 혁명이 일어나고 나서 귀족사회에서 왕립과학 단체가 있었지만 부르주아는 과학 연구를 방해했다고 합니다. 19세기를 과학의 시대라고 말하는데 부르주아가 처음에 정권을 잡고 나서는 이 세계의 질서에 대해 설명하려는 것을 탄압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48년 이후 과학연구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습니다. 부르주아들은 자기네들의 질서를 통해 이 세계의 질서를 들여다보고 싶었기 때문에 그런 세계를 과학적인 세계가 설명하지 못할까봐 두려워했습니다. 1848년 2월 혁명 이후 부르주아에 대한 투쟁이 계속 전개됩니다. 그것의 마침표가 된 게 1871년 파리코뮌입니다.

파리코뮌은 사회주의, 공동체적 삶에 각인되어 있는 지울 수 없는 흔적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모든 억압적인 것, 착취적인 것으로부터 우리는 떨쳐 일어나고 끝까지 맞서 투쟁하겠다면서 자기네의 자율적 자치 조직을 구성해 나가려 한 게 파리 코뮌인데 무참히 죽임을 당합니다. 코뮌이라는 말이 그때부터 많이 쓰입니다. 코뮈니즘, 공산주의자, 코뮈니스트의 말이 일반화되는 계기가 그때입니다. 파리코뮌 사건에 크로포트킨이 깊이 영향을 받았습니다.

아나키라는 말은 사회주의 혁명과 다릅니다. 사회주의 혁명도 코뮌을 지향했지만 당에 의한 코뮌, 국가를 대신하는 당이었습니다. 아나키에게는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모든 중앙 정부는 우리에게 악일 수밖에 없다는 전제가 있습니다. 권력은 무조건 나쁘다고 봅니다. 이에 대해 현실의 복잡한 욕망과 구조 속에서 어떻게 권력을 악이라고 치부할 수 있는가 비판받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읽어볼만한 게 <질서에 관하여>입니다. an-archy, archy가 붙으면 권력 중심적인 것과 연결되는데 그걸 부정하니까 어원대로 보면 “무강권”입니다. 무정부와 다릅니다. 일체의 권위, 권력에 대한 부정이 아나키입니다. 당시 이들이 부르짖는 생각이 위협적인 거라고 느껴졌고 우리는 우리한테 위협적인 걸 무질서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질서가 무엇인지 따져 보면 질서는 아무 말도 안하고 가만히 있는 것입니다. 사회가 혼돈스러워진다는 것은 무엇이고 혼돈스럽지 않다는 것은 무엇이냐, 사람들이 아무런 반대도 안하고 가만히 있으면 평화로운 것이고 반대 의견을 말하면 혼돈스러운 것이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언어적 분할이라는 게 한번만 따지고 물으면 말도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니까 무질서라고 해서 부르주아의 공포를 표현한 말입니다. 그래서 크로포트킨은 질서가 무엇인지, 무질서가 무엇인지 따져봅니다. 질서와 무질서의 이미지 자체가 전도됩니다.

 

<청년에게 호소함>을 읽고 채운 선생님이 소감을 물었는데 연령대에 따라 반응이 달랐습니다.

옛날에는 착취와 예속을 벗어나서 해방이 키워드였는데 지금은 어떤지, 가치가 좋고 나쁜 게 아니라 뭐가 달라졌는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우리나라도 불과 40년 전 착취와 얼룩진 세상을 어떻게 혁명할 것인가 외치던 청년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공정하지 않은 세상이 키워드인데, 공정하지 않은 세상에서 무엇이 변한 것일까요? 우리는 다음 학기에 러시아 혁명사를 보면서 그들은 무엇을 위해 그렇게 살았는가 정서적으로 다가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혁명이 아니면 무엇을 생각할까요? 자기 해방이라던가, 사회와 관계 맺는 방식이 어떠한지 생각하며 러시아 혁명사 읽기로 합니다. 1917년과 지금 시대는 무엇이 다르고, 달라졌을까 생각하며 다음 학기로 넘어가면 됩니다. 다음에 레닌 강의할 때 맑스주의에서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얘기하면서 역사 연구의 흐름을 같이 다뤄주기로 하셨습니다.

 

p/s 다음주 역사 퀴즈 팀이 결정되었습니다(존칭 생략하고 이름 올립니다^^)

혜림팀 – 건화, 영식, 민호, 윤숙, 혜연

지영팀 – 혜원, 규창, 호정, 정옥, 현숙
전체 1

  • 2019-12-25 11:32
    강의를 다시 듣는 듯한 꼼꼼한 후기네요. 감사합니다~~ 자서전을 통해 보면 크로포트킨은 자신의 문제를 인식해 나가는 과정과 그것을 행동으로 실천해 내는 사이에 간극이 없는 사람이지요. 이번 강의에서 본 <질서에 대하여>는 사람들의 몰이해를 통해 생겨난 아나키=무질서라는 공식을 상대의 언어인 '질서'를 정의 함으로써 자신들이 무엇을 할 것인지 명확히 밝혔다는 것이죠. 크로포트킨 의 태도에 다시 한 번 감동. 처음 쓰신 후기에도 감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