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문 회의록

3.27 / 4.6 / 4.10 매니져 회의록

작성자
민호
작성일
2020-04-10 20:32
조회
49
매니저 회의의 주제가 띄엄띄엄 진행되어 모아서 올립니다.

 

@ 모임 이름 정하기

2020년 3월 27일
-쌍화탕 모임 : 쌍화탕을 많이 먹음. 싸고 좋다. 면역력에 도움되지만 거기에 의존하지는 않는다. 엄청 어렵지는 않다.
쌍 - 복수적 정체성
화 - 변화의 역량
탕 - 고른판, 수프

2020년 4월 3일

-부글부글 모임 : 뭔가 화학작용이 일어나는 것.  그것도 '글'에 의해서. 'book을 富글?' 같은 말장난

-글적 글적 모임 : 쌓을 적. 글을 적고 글을 쌓는다.

2020년 4월 10일

-낙서 모임 :  즐길 락, 글 서, ‘락서’. 책을 읽고 재밌게 떠들자는 생각으로 추천해본다.

건화 : 우리가 이걸 하려는 건, 뭔가 실천적으로 공부하자는 거였지. 우리는 뭘 하려는 거지? 니체, 스피노자, 푸코, 일리치, 장자, 맹자 이렇게 읽은 걸 써먹어 보자는 거다

혜림 : 써먹다? 써서 먹는다?

건화 : 각자 공부하는 개념에 입각해서 우리가 하려는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용어를 말해보자.

혜원 : 양행. 어느 한쪽을 선택하지 않고 함께 간다. 모든 것의 동시성.

규창 : 수작. 주고 받는 것. 참여하면서. 수리부작. 옛 사람의 것을 읽어서 얘기한다. 창작하지 않고.

건화 : 대항품행. 버내큘러. 표준화될 수 없는 자립적인 삶의 방식들을 총칭하는 말.

민호 : 오피올라이트. 이것은 해양지각 및 상부 맨틀이 압등되어 위로 올라온 암석.

*결론 : 아직 정해지지 않음

 

@ 세미나 이름 정하기

2020년 4월 3일

규창 : <고기를 태어나서>를 읽고 싶었던 것은, 고기는 맛있고 육식은 불편하고. 읽다보니 먹는 것만의 문제가 아니구나!

건화 : ‘고기는 달고 육식은 쓰다!’ 육식의 문제를 다룬다는 것이 끌리긴 할 것 같다.  한승태씨가 이야기한 ‘클로즈업’을 가져와서 말해보자. 우리는 통계 자료가 질문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걸 봤다, 통계의 대척점에 있는 클로즈업의 효과를 우리가 공부하는 주제들과 연관시켜보자.

혜원 : 이 세미나 자체가 이어질 것이라는 얘길 해야 함. 이번 주제와 관련해서.

 

2020년 4월 10일

혜원 : 규창이가 저번에 말한, ‘고기는 달고 육식은 쓰다!’를 캐치프라이즈로 한다고 해도, 우리가 지속하는 세미나의 이름을 정해야 한다.

민호 : 저희의 다음 활동과 함께 생각해보아요. 가령 이번이 ‘먹는 것’에 관련된 것이라면, 다음은 유튜브를 다루면서 ‘보는 것과 생각하는 것’, 그리고 그 다음에는 성을 다루는 거니까... 결국 품행?

혜원 : 팩토리 같은 걸로 해볼까?

건화 : 우리가 함께 읽은 책에서 찾아보자.

혜원 : <고기로 태어나서>의 클로즈업?

건화 : 어? 괜찮은데? '클로즈업'.  세미나 이름을 클로즈업으로 하자.

*결론 : 모임 이름 -미정, 세미나 이름 -클로즈업

 

@ <고기로 태어나서> 글쓰기 코멘트

 

혜원 : 다들 어디에서 막혀 있고 어떤 상황인지 대책을 마련해보자.

#규창 글 : '고기'에서 '사람'으로

건화 : 우리 발제가 내용이나 방식은 달라도 뭔가 질문을 던져서 같이 토론해볼 만한 글이어야 하지 않을까? 규창이 글은 ‘어쩔 수 없는 일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주는 것 같다. 그것이 ‘신중함’인 것 같은데.

혜원 : 자기 가치를 의심해야 한다는 걸까? 자기 가치에 대한 확고한 소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일까?

혜림 : 바꿀 수 없는 일을 어떻게 긍정할 수 있을까 하는 방향으로 더 가면 어떨까?

규창 : 제 고민에 대한 답을 쓴다는 식으로 썼는데, 그럴 필요가 없겠다.

혜원 : 조금 더 도발하듯이 쓰는 것도 좋겠다.

건화 :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뭔가를 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데 그게 정당한가? 우리가 돈벌기 위해 한다는 일을 단지 생계로 정당화 할 수 있나? 조금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가보자. 우리 최대한 이런 일은 피하자 등.

혜원 : 화살 만드는 사람은 전쟁에 대해서 의심하고 생각해야 하는 사람이어야 하지 않나? 전쟁에 대해 가장 열심히 사유해야 하는 사람이어야 하지 않나? 자기 자신에 대한 조건을 이해하기. 예를 들면 반전주의자가  화살 장인일 수 없고, 채식주의자 농장주일 수 없듯이. 이게 안 되는 거니까 맹자가 일이 중요하다고 말한 것 같다.

규창 :  그럼 하는 일이 윤리와 무관할 수 없다는 맹자의 말에 따라서 직업 선택의 중요성 쪽으로 가봐야겠다.

건화 : 이것을 좀 더 질문으로 만들어서,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올 수 있는가를 이야기해보자. 예를 들어 우리가 농장에서 일하지 않지만 거기에 얽혀 있고, 우리 일과 존재가 분리되어 있다. 이것도 어찌 보면 맹자의 직업윤리에 반하는 것 아닌가? 이런 식으로 질문을 확장하는 것으로 가면 어떨까?

혜원 : 자기를 경멸할 수밖에 없는 일은 안 하는 게 나은 건가. 어쩔 수 없이 하는 일들, 위험하고 경멸스러운 일을 하게끔 내모는 구조가 있지 않나?

규창 : 실제로 우리 삶을 이롭게 하는 일들을 따져보는 식으로 가보는 건 어떨까? 어쩔 수 없는 일... 누군가를 상쳐주는 일...? 모르것다? 일리치나 아나키스트들의 말에 따르면 대부분의 노동은 우리의 착취구조를 지탱하게 한다.

건화 : 그건 맞는 말. 편의점 알바를 아무리 열과 성을 다해도 우리 역량이 증가되지 않진 않은가.

혜원 : 그런 얘기 어떤가. 우리가 지금 일이라고 하는 건 자기 자신을 경멸할 수밖에 없지 않나? 농장이나 화이트칼라나.

건화 : 시작으로 우리 자신의 일을 경멸하게 되는 것에 대해 써보면 어떤가? 이 책에서는 자신의 일을 경멸하는 사람들이 나오는데, 이것은 또한 우리 자신의 모습이지 않을까? 이런 식으로 시작해보는 것.

건화 : 깜짝 세미나의 형식을 고려해서 규문톡톡 보다는 더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가보자.

혜원 : 우리는 일을 평가하고 귀천을 두는 것에 과민반응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함. 그러나 그렇게 자기 일을 경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일과 자신을 동일시해서 평가받으면 화를 낸다.

건화 : 개장수 아저씨는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내가 한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반응적인 긍정이다. 어쩔 수 없이 했다, 나 아니면 이 음식쓰레기들 어떻게 할거냐 하는 식으로 반응적으로 자신을 긍정한다. 그러나 맹자는 완전히 반대다. 어떤 것 때문이 아니라 그저 온전히 자신을 긍정할 수 있는가의 문제. 새로운 말을 가져오는 것보다 맹자 말을 질문으로 던져 보는 것도 좋겠다.

민호 : 직업의 문제에 있어서 고기로서의 삶을 좀 개념으로 강조해주면 어떨까요? '사연 있는 일'이란 표현이 잘 와 닿지 않는다.

건화 : 어쩔 수 없어서 하는 일, 자발적으로 하는 일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니까 그것을 주도 한다는 것을 관점으로 가져가지 않으면 오해가 있을 것 같다.

 

#민호 글 : '고기'의 진화론

건화 : 1번의 첫 번째 문단은 거시적인 통계의 관점이고 뒷 문단은 클로즈업인 것 같다. 그런데 뒤에는 클로즈업의 차원을 두지 않고 탁상공론인 것 같다. 진화를 인정하기 싫었지만 인정하게 됐다는 것처럼 읽힌다. 진화가 진보가 아니고 변화라면, 그게 어떤 변화인지 그것을 클로즈업으로 가져와야 한다. 진화/진보, 자연 /비자연을 따지자는 것이 아니라 클로즈업으로. 그것을 지나온 과정이 다른 질문의 여지가 생겨야 하는데, 다시 다 자연이구나 하고 돌아옴.

규창 : 2번부터는 아예 닭이나 고기가 우리에게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말하는 거 어떤가? 우리 인간도 번식의 성공이고, 먹을 것도 많아졌다. 그렇다면 우리도 클로즈업해서 봤을 때, 역량이 커지는 방식으로 변이가 되고 있는 건지를 보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종으로서 성공한 인간. 그러나 클로즈업해서 봤을 때 어떤 모습인가?

건화 : 윌리스의 관점을 소개하는 건 괜찮은 것 같다. 사람들이 들법한 질문을 설명해주어야 한다. 클로즈업으로. 동물을 보호하자는 것도 클로즈업의 차원에서 이뤄지면, 자연으로 돌아가자거나 폭력을 덜 쓰는 방식의 사육을 하자는 주장들 또한 수치 상에서 말해지는 벙벙한 논의로 보이게 된다. 그런 주장들 역시 인간적인 관점일 뿐인 것이니까. 그러나 클로즈업이라면 동물권이나 복지의 내용도 다르게 얘기 될 것이다.

혜림 : 3번에서 그 얘기를 해보자. 동물을 보호하자는 말을 어떻게 다르게 할 수 있는지. 진화론에서 본 동물권. 진화는 진보가 아니라는 것은 알겠다.  그렇다고 아무런 가치가 없는 거야? 생물들의 생존이 있고 그들은 인간과 함께 변이의 장 위에 있다. 거기서 인간의 조건을 만드는 것들은 뭘까?

건화 : 자연과 인간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경향이 옳고 그르다는 측면이 아니라, 그렇게 나눌 때 할 수 있는 질문들이 뭐가 있고 윤리적인 한계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렇지 않을 때 질문들과 윤리가 어떻게 생겨날 수 있을지를 중심으로 전개되어야 할 것 같다.

 

#혜림 글 : 너나 나나 '고기'로 태어난 건 마찬가지

혜원 : 어떤 텍스트를 중심으로 가져오고 싶은가?

건화 : 뭐시 궁금한가? 스피노자로 쓰면 어때? 지난 채운샘 강의에서 어떤 존재가 자기의 힘을 펼쳐낼 때 다른 존재의 실존을 부정하게 되는 것에 대해 들었다. 우리가 고기와 맺는 관계가 그것이 아닌가.

건화 : 편리함? 상품이 주는 쾌적함?

규창 : <죽음의 밥상>과 같은 책들은 같은 논리 선상에서 육식에 비판을 하기 때문에 조금 부족한 것 같다. 경제적 논리라면, 경제적 논리로 비판.

혜원 : 그러한 정보전달 책에 대한 서평 혹은 비판을 쓰는 건 어떤가?

건화 : 상품으로서의 고기를 주제로 삼았는데, 어떻게 보면 그건 우리가 모두 전제로 깔고 있는 사실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야 함. 예를 들면 배양육, 폭력, 진화론, 직업 등등.

민호 : 혜림샘은 이전부터 유독 잔인, 끔찍함, 연민, 동정 등에 주목했다. 그러나 쾌적한 상품을 좋아하지 않으시나.

혜원 : 끔찍한 장면, 비위생적 장면을 통해서 동물권을 말하는 매체는 우리 자신의 문제를 넘어가게 하는 게 아니라, 끔찍해하는 자신의 정서를 반복하게 하고 인간을 자학하게 하는 등. 정작 문제로 제기된 것을 생각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을 지적해보자.

규창 : 이미지에 동화가 잘 되는 사람들이 있다. 삼겹살이 구워지는 장면에 좋아하고, 돼지 살처분 장면에 괴로워하고. 이 사이에서 전환과 반응이 심하다. 책 볼 때는 잔인하다, 마트 가면 맛있겠다는 양극성이 있다. 이걸 이해하지 못하면 분열되서 난 쓰레기야 하는 식의 자학이 된다.

건화 : 이런 식의 정서적 반응이 무력하다는 것을 말했으면, 그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질문으로 나아가야 한다.

 

#건화 글 : '고기'와 폭력의 문제

어떤 종류의 폭력인가? 하는 이야기가 더 나와줘야 한다.

#혜원 글 : 증여성과 먹음의 윤리

민호 : 인간 전체의 윤리라기보다는 누나 자신의 윤리 및 방법을 생각해보면 어떨까?

건화 : 증여의 문제는 채운샘이 얘기해주신 승가 공동체의 탁발과 유사하다. 무엇이 들어와도 남김없이 먹는 것. 분별없이 먹는 것. 이걸 소개하는 것 어떤가?

 

@<대칭성 인류학> 세미나 / 2020년 4월 10일

민호 : 37페이지. 야생 염소 신화에서 나오는 구절이 인상 깊었다. "그들을 죽이더라도 미안한 마음을 가질 필요는 없어요. 정말로 죽는 것이 아니라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니까요." 신이치의 말대로 대칭성의 세계에서는 "선물을 남기듯이 이 세상에 올 때 착용했던 털가죽과 고기를 남기고 갈 뿐"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선물적인 관계를 이해할 수 없는 조건 속에 있다. 그래서 가축들에게 미안해 하고 죄책감을 느낀다. 아니면 아예 외면할 수 있고 그래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거나.

건화 : 36페이지. 대칭성 세계와 비대칭성 세계의 타협안이라는 것이 인상깊었다. 우리는 쉽게 기능적인 이유로 그들이 계속 존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여기서는 대칭적 차원과 함께 살아가는 윤리를 말하는 것 같다. 즉 3차원을 벗어난 그 고차원을 열어 놓은 채로 현실을 살아간다는 것에서 나오는 독특한 윤리인 것. 어미들을 살려놔야 애를 낳을 거야, 라는 이익적 차원이 아니라 공존의 차원이다. 대칭적 차원으로 봐도 그들과 우리는 구분이 안 되므로 절멸시키거나 그저 보호한다는 생각이 안 들 거다.

우리는 지금 동물과의 관계에서 윤리의 지점이 한계에 처했다. 보기만 해도 무력해지고. 이것이 우리가 타락했기라기보다는 우리가 더 폭넓은 신화적 사고를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비대칭적 관계의 압도성, 세계관의 편협함의 결과로 나오는 윤리의 부재가 나온다는 설명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럼 어떻게 지금 가축과의 관계 혹은 고기와의 관계에서 이러한 대칭성을 생각할 수 있을까가 문제로 남는다.

혜원 : 우리는 동물들의 선물이나 증여를 부담이나 죄책감으로 환원해버릴 수밖에 없게 된 것 같다. 신이치는 인간이 ‘순수증여’라는 것을 감당하기 두려워한다고 말한다. 대칭적 사고는 균형과 순환이다. 우리는 그 대칭성을 복원해야 하는데, 지금은 오히려 비대칭성의 끝으로 간다. 원자력, 배양육 등.

건화 : 곤도 고타로씨는 농사를 지으며, 여기에는 GDP로 환원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고 했다. 농부의 생활이나 마음가짐이라는 것도 대칭적으로 열려 있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농사라는 것은 누군가에게 계속 의존하고, 뭔가를 도움 받고 도움을 주고. 태풍에 자신의 취약성을 느끼고, 농사는 1인분을 지을 수가 없다.

혜원 : 자연에 대한 의존성을 줄이고 없애려 하는 것이 부자연스러운 것일 수 있다. 아녜스 바르다의 <이삭 줍는 사람들>에서, 불량 감자를 널어 놓으면 누군가 주워간다. 그러니까 누군가의 땅, 누군가의 작물이 농사의 세계에서는 울타리로 경계 지어지지 않는다. 지금은 모든 것이 상품으로 출하가 되지만, 상품을 벗어나는 영역이 있다. <고기로 태어나서>의 고기들은 공장에서처럼 길러진다.

건화 : 신이치는 자본주의가 증여가 주는 쾌락을 재현하려 한다고 말한다. 육식이 주는 쾌락도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규창 : 육식문화는 이미지를 생산하는 것 같다. 마블링, 육즙 등.

건화 : 교환은 단순한 사용가치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 거기에서는 덧씌워진 이미지가 흥분을 일으키는 것 같다. 신이치 말대로라면, 우리는 이전에 동물과 인간 간의 증여 관계가 사라진 상태로 육식과 관계 맺는다. 살덩이를 사서 영양섭취를 함. 증여를 받는 게 아니라. 완벽한 등가교환. 그런데도 불구하고 거기에 이상한 애착관계가 생겨난다. 그것은 규창이가 말한 이미지와 관련되어 있고, 그것이 마치 증여가 주는 정동을 재현하는 것처럼 보인다.

혜원 : 육식의 식생활이 뭔가 풍요로운 이미지를 준다. 그게 증여의 쾌락을 대처하려 한다.

민호 : 그런 점에서 육식과 소비의 메커니즘이 겹치는 것 같다.

건화 : 우리의 식생활은 무언가에 의존하지 않는다. 집의 냉장고에 다 재워져 있고, 시장에서 사면 되는 것. 그러나 신화 속 사람들은 끊임없이 다른 동물에게 증여를 받는다.

혜원 : 크리스트교가 특이함. 대칭적 사고를 억제하면서도 그것의 내부구조를 가져온다. 자체증식이라는 논리를. 이슬람은 그렇지 않다.

 

건화 : 127페이지. 신화적 사고 속에는 ‘힘의 원천’이 외부에 존재한다. 누군가 그것을 점유할 수 없고 그것이 점유되는 순간 국가가 출현한다. 이 힘의 원천이라는 것이 지금은 압도적으로 인간에게 있다. 자본한테 있나? 압도적 비대칭성.

 

민호 : 아까 건화형의 질문, 그럼 어떻게 지금 가축과의 관계 혹은 고기와의 관계에서 이러한 대칭성을 생각할 수 있을까가 아직 미제로 남아 있다.

건화 : 일단, 위에서 말한 이미지의 증식과 자본이 만드는 거짓쾌락, 이것을 문제 삼는 것이 첫 단추이지 않을까. 가령 크리스마스. 여기서의 선물은 자신의 일부를 주는 것이 아니라, 선물을 사서 주기 때문에 또다시 거대한 교환관계에 들어옴. 이벤트성.

고기를 먹는 것도 유사하다. 고기를 먹는 것이 주는 쾌감이 단순히 살을 섭취하는 아니라, 다른 존재를 먹는다는 점에서 생기는 것 같다.

건화 : 고기의 독특함. 그것은 다른 존재가 다른 존재에게 주는 것. 증여적인 뉘앙스가 있다. 그것도 인간과 가까운 존재로서 다른 존재의 살을 받는다는 점에서 정서적인 반응이 일어나지 않을까.

혜원 : 배양육을 생각해보면, 증여라고 하는 작용을 말살시켜버리는 것. 그것은 단순한 도덕적 욕심이라는 것 이상으로 대칭성의 고리를 끊어버린다는 것. 배양육은 고기와 똑같은 성분이어도 맛이 없지 않을까?

혜원 : 배양육이라는 것 자체가 우리가 육식을 이미지로 소비하고 있었다는 것의 증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규창 : 증여라는 작용이 사실은 같은 선상에 놓을 수 없는 것들을 압축시켜버리는 것이 아닌가. 교환은 그것을 풀어 등가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것 같다. 그렇다면 증여를 얘기하는 순간 맛이라는 쾌락이 들어올 수 없지 않을까? 교환이 주는 것이 미각적 쾌락이라면, 증여가 주는 것은 정서적 교감이나 정동 같다.

건화 : 112페이지. 신이치는 행복 자체가 마음의 기층의 자유롭고 편안한 상태라고 말한다. 우리는 그러한 차원이 억압되어 있어서 계속 맛을 추구한다. 배양육이 맛은 있을지는 몰라도, 거기에 교감은 없을 것이다. 배양육에 대항하는 논리는 마음이라는 것이 아닐까? 거기서 평안하고 행복하고 자유로울 수 있나?

혜림 : 대학시절, 설계 마감하고 나면 하는 말이 ‘남의 살 먹으러 가자’고 했다.

규창 : 신화적 사고에서는 동물의 증여가 ‘맛’이나 ‘자극’으로만 환원되지 않을 수 있는 관계가 있었다.

 

규창 : 78페이지. 호모 사피엔스는 미숙기간이 길었다. 무의식과 대칭성 사고의 발달, 인류가 진화할 수 있었던 무기는 다른 존재와 소통할 수 있는 기제가 아니었을까. 진화의 방향이 더 이성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와의 접속. 우리는 진화를 개체 하나가 환경에 적응하는 문제로 생각하는데, 네안데르탈레인과 사피엔스를 보면 적응 능력이 떨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들은 무의식을 발명했다. 더 많은 것들과 접속이 가능한 방식으로 생존의 기술을 갈고닦은 것.

건화 : 니체도 힘을 영향 받을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하지 않나.유발  하라리도 유사한 말을 했다. 사피엔스는 직립보행을 해서 출산이 빠르고, 미숙기가 길어서 의존하는 기간이 길어졌다.

건화 : 무의식이 주어진 게 아니라 발명된 것. 오히려 능동적인 것. 우리는 동물들이 의식이 없다고 하지만, 오히려 무의식이 없을 수도 있다. 주어진 일들을 처리하는 방식으로만 지성을 사용하니까.

건화 : 증여적인 사회에서는 전혀 다른 신체의 변용이 있지 않을까? 그냥 대상 하나와만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 의존적이기 때문에 그 조건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될 수 있어야 한다. 쾌락에 꽂히는 것은 신체 변용의 편협함을 말해주기도 한다.

@다음 모임 일정 : 4월17일 금요일까지 <대칭성 인류학> 다 읽고 세미나, 4월13일 월요일까지 글 써오기. 이름 생각해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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