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티(불교&티베트)

<불교 of 티베트> 8회 세미나 후기

작성자
현정
작성일
2020-09-14 16:30
조회
156
어제처럼 구름 한 점 없는 파~아란 하늘은 언제나 제 마음을 청명하게 해주고 기쁘게 만듭니다. 마~음, 한 순간도 자신과 떨어져 있지 않으면서도 매번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있을까요. 자신의 마음 한 자락을 잡는 것이, 그 산란한 마음을 고요하게 만드는 것이 이 세상 어떤 일보다 힘겨울 때가 있습니다. 명상은 그 마음을 들여다보고 평온하게 만들며 친해지는 참 소중한 시간입니다. 여러 가지 명상 기법들이 있다는 것이 다양한 길처럼 느껴집니다. 자신에게 이르는 다양한 루트, 이런 시도들을 통해 우리는 자신을 알아가고 세상과의 연결성을 체험해나가는 것 같습니다. 명상이야말로 ‘자기배려’를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일상의 장 같은 느낌이 있습니다. 모든 순간이 명상이며 수행이셨든 부처님과 일거수일투족이 다 공부고 수신이셨든 공자님이 떠오르면서 아직도 명상과 밀당중인 제 자신의 방일함을 부끄러운 마음으로 돌아보게 됩니다.

이번 주는 맛 명상을 더불어 했습니다. 먹는 행위처럼 아무 생각없이 습관적으로 어찌보면 함부로(저 같은 경우에는) 하는 활동이 있을까요. 알아차림을 하면서 무언가를 먹는다는 것, 재료 하나하나의 모든 맛이 제대로 느껴졌다는 분도 계셨고 저 같이 오히려 맛이 없게 느껴지는 사람도 있었지만, 일상의 모든 행위에서 알아차림을 일으킨다는 것은 새로운 감각, 미세한 의식과의 뜻밖의 조우로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다양한 명상 기법들 중에서 자신에게 특히나 와닿는 명상을 일상에서 꾸준히 실천해가는 것,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거의 씹는 게 아니라 목구멍으로 그냥 삼키는 밀어넣는 수준의 저로서는 여러모로 시도해봐야 할 맛 명상입니다.^^

<티벳 사자의 서>, 이 책만큼 서재에 고이 모셔져 있는 책도 없겠지요. 이 책이 베스트셀러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일단 죽음이라는 주제가 인간 누구에게나 언제나 핫한 아이템이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죽음과 삶 중에 사람들은 어떤 것에 더 관심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드네요. 이것의 동시성을 인식하기 힘든 사람들로서는 죽음은 알 수 없어서 두렵고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해결할 수도 없는 난제처럼 불편한 어떤 것으로만 받아들이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개념처럼 무지·두려움·고의 사이클을 잘 보여주는 사례도 없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책을 사면 거의 읽는 편이면서도 이 책은 쉽사리 읽어지지 않았습니다. 토론을 하면서 책과의 시절 인연이라는 말이 나왔는데요, 전에 다 읽었든 읽지 못하고 꽂아두었던 이번에 읽으면서 문장 하나하나가 쏘옥~쏙 들어오는 신기한 체험을 모두들 하신 것 같습니다. 읽기의 집합성, 함께 읽는다는 것, 더불어 토론한다는 것은 정말 엄청난 에너지가 흐르는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저는 이번에 이 책을 읽으면서는 전에 민호샘이 쓴 훌륭한 글처럼 ‘한 권의 책을 만난다는 것’ 특히나 이런 보물 같은 책을 우리가 읽는다는 것에 대한 신성함이 확 와닿았습니다. 티벳어에는 존칭들이 단지 인칭에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도 많이 쓰이는데요, 책에 대해서도 존칭을 쓴다고 합니다. ‘뻬차’라는 티벳어 경전의 존칭은 ‘착뻬’라고 하는데요, 문득 책에 존칭을 쓴다는 것이 너무 이해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무수한 연기조건에 의해 쓰여지고 발견되고 번역되어 누군가로부터 누군가에게로 시공간을 넘어 전달되어지고 읽혀지는 이러한 보물 같은 책들에게는 존칭이 쓰여지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세 명의 서양학자들의 서문은 이 책을 읽는 과정에 대한 이해에 도움을 줄 뿐 아니라, 죽음 윤회 열반이라는 심오한 주제에 좀 더 유연하게 다가가는데 촉매제 역할을 해주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에 실려 있는 칼 융의 서문이 <티벳 해탈의 서>보다 명확하게 다가오면서 그의 서양정신분석학자로서의 고민과 진실성이 느껴져서 좋았습니다. 프로이트의 심리학과 이 책을 비교하면서 분석하는 파트에서는 무의식이라는 어마무시한 지대를 발견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로이트가 멈춘 지점 그리고 거의 서양인과 다름없는 의식구조로 살아가는 우리가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지점들 곧 초월성이나 목적론의 지형들이 엄밀하게 분석되고 있어서 무척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칼 융은 정신의 유전을 직계 가족이나 종족의 차원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차원, 나 이전의 차원과 연결되는 마음의 보편적인 성향으로 설명하면서 그것을 원형이나 집단무의식으로 개념화해냅니다. 인간은 죽어서도 지상의 삶을 계속하고 있고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 인류의 원초적이고 공통된 지점이라는 것도 흥미롭습니다. 인류 전체에 하나의 공통된 정신적 틀이 존재하고 그 틀이 유전된다는 것, 그 틀이 인간의 모든 경험에 일정한 형태와 방향을 부여할 수밖에 없다고 융은 논리적으로 설명합니다. 그 스스로도 이 책으로부터 자신의 무의식의 원형들, 집단무의식에 대한 사유에 풍부한 영감을 제공받은 듯 보입니다. 과학의 발견으로 인해 일반인들도 우리에게 물질적인 것 또는 정신적인 것들이 유전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뭔가 공통적인 것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에 대한 깊은 이해에는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토론을 하면서는 우리가 뭔가 나 아닌 다른 것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보편성을 느낀다는 얘기들을 나누었습니다. 나만을 위한 마음과 행위로는 일시적으로는 행복한 것 같지만 왜 장기적으로 보면 그것이 행복이 되지 않는 결과들로 이어지는지 의문들을 다들 가지고 계셨습니다. 저는 노자의 無私도 떠올랐는데요, 어떻게 無私하면서 스스로 부유해질 수 있는가에 대해 모두들 막연하지만 느끼고 있었고, 그런 각자의 질문들이 우리 모두가 연계되어 있다는 보편적 연결성에 대한 자각으로 모아지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이번 시즌에 읽은 세 권의 책을 통과하면서 죽음에 대한 기존의 사유에 많은 변환이 이루어지는 것을 느끼면서 기뻤습니다. (도반들도 익히 알고 있듯이^^) 윤회의 윤자도 몰랐던 어린 시절부터 윤회를 거부(?)했던 저로서는 이 책들을 읽으면서 순연히 윤회를 받아들이게 되는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일회적 생이 아니라 무수한 생을 산다는 것이 이젠 싫지 않습니다.^^ 맹자를 읽으며 성선에 대한 의심을 계속 제기하던 저로서는 오히려 불교와 죽음의 철학을 접하며 인간의 본성에 대해 그 잠재적 역량에 대해 수긍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정말 내 안에 있는 것이구나 하는 느낌이 어느 순간 밀려왔습니다. 완전한 열반의 경지에서도 중생을 위해 기꺼이 다시 윤회를 선택하는 깨달은 자들의 자비행도 감히 이해가 되었습니다. 사후세계에서 가장 높은 차원의 체험은 바르도의 맨 마지막 순간에 오는 것이 아니라, 최초의 순간 곧 죽음의 순간에 찾아온다는 것이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윤회와 죽음을 새롭게 사유하면서, 뭐래 어차피 또 태어날텐데가 아니라, 지금 이 현존을 내가 얼마나 정갈하고 성실하게 맞이하고 힘써서 살아야 하는지를, 얼마나 다르게 감당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그것이 부담이나 슬픔이 아니라 기쁘게 느껴지는 순간적 체험을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전대미문의 사건(이제는 이 폭력적이고 우발적인 사건도 일상처럼 익숙해져가고 아니 일상이 되어버렸지만), 이 환경의 문제도 윤회의 관점에서 생각해보니 더 실정적으로 저에게 다가오는 느낌이 듭니다. 죽음과 윤회에 대한 사유가 지금 우리의 일상에 더 능동적인 개입을 요청하는 것 같습니다. 인식의 문제는 이렇게 윤리의 문제와 직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거듭거듭 살게 될 생, 무수히 반복될 이 삶이, 니체와 스피노자와 들뢰즈 등등 무수히 듣고 또 들었던 그러나 내 사유로 가져오면 여전히 서걱되는 잔재가 남아 있던, 생에 대한 완전한 긍정이, 다른 깊이로 다가옵니다. 앎은 새로운 것을 계속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알고 있던 것들, 이미 배웠던 것들 그래서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들을 매번 다르게 알게 되는 것이라는, 매순간 새롭게 알게 되는 그 과정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 또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라마 아나가리카 고빈다의 해설처럼 이 책은 죽은 자만을 위한 책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삶 자체와 관련이 있으며, 죽음에 대해 올바른 자세를 갖도록 뒤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돕는 데 유용한 역할을 해줍니다. 죽음에 대한 우리의 공포는 사후세계에서 보여지는 것들이 우리가 생에서 이미 겪었던 것들의 환영에 불구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런 일시적이고 무상한 형상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나’라고 하는 분리된 개체가 존재한다는 그릇된 관념을 만들어내고, 그 나를 잃을까봐 두려워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그는 설명합니다. 사후세계의 세 단계로서 이번에 읽은 죽음을 경험하는 순간의 의식 상태인 ‘치카이 바르도’ 그리고 앞으로 읽게 될 존재의 본래 모습을 체험하는 의식 상태인 ‘초에니 바르도’ 그리고 환생을 찾는 의식 상태인 ‘시드파 바르도’가 자세한 주석과 함께 우리의 이해를 도우며 펼쳐집니다. 토론을 끝내며 우스개 소리처럼 우리는 죽음의 결정적 순간이 닥쳐왔을 때 나는 괜찮으니까 슬퍼하지 말고 이런 기도문들을 읽어달라고 부탁을 서로 했답니다.^^ 죽음에 대한 인식의 전환, 죽음 즉 삶에 대한 시선의 전환으로서 첫발자국을 떼는 이러한 작업이, 책을 읽고 이야기 나누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나의 죽음 그리고 일상에서 마주하게 될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의 죽음에 대면하여 지혜로 그리고 행위로 펼쳐낼 수 있을지 그것이 우리가 계속 공부하고 수행해야 할 이유가 될 것입니다.

“한 사람도, 사실은 살아 있는 어떤 존재도, 죽음의 세계로부터 돌아오지 않은 자는 없다. 사실 우리들 모두는 이번 생에 태어나기 전에 무수히 많은 죽음들을 겪었다. 그리고 우리가 태어남이라고 부르는 것은 단지 죽음의 반대편에 불과하다. 그것은 동전의 양면 가운데 한 면과 같고, 방안에서는 출구라 부르고 바깥에선 입구라고 부르는 방문과 같다.” 티벳 사람들의 이 이야기는 그들이 얼마나 적확하게 죽음과 삶을 사유하고 있는지를 명료하게 보여준다고 생각됩니다. 힌두교에서는 인간이 되려면 840만 번의 윤회를 거쳐야 한다고 말합니다. 산스크리트어로 인간은 ‘둘라밤’이라는 ‘얻기 어려운’이라는 뜻을 지칭한다고 하며, 카르마는 육체를 갖고 있을 때만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얻기 어려운 희유한 몸을 가진 인간으로 태어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죽음은 이렇게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모두 함께 더 많이 사유해보면 좋겠습니다.^^
전체 2

  • 2020-09-16 01:49
    죽음의 순간을 능동적으로 맞는 것에 관한 이야기를 읽는 와중에 나라는 개체가 있다는 마음이 여전히 강함을 느낍니다. 그만큼 그 앎이 해체되는 바르도의 단계에서 두려움이 크겠고 컸을테지요? 그 두려움 속에서 이렇게 태어났을 테고요.
    그럼에도 이 삶을 비관 할 수 없는 게, 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들과 세계가 840만 번의 윤회를 거쳐 힘들게 만난거라 생각하니 잠시지만 하나하나 소중하지 않은 인연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삶을 긍정하지 않을 수 없네요. 후기 잘 읽었슴다!

  • 2020-09-16 10:56
    이번 시간 토론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새벽에 <티벳 사자의 서>를 읽다가 문득 윤회를 순연히 받아들이는 체험을 하게 되셨다는 현정샘의 말씀이었던 것 같습니다. ^^
    맹자의 성선에 계속 의문을 가지고 계셨는데 불교와 죽음에 대한 ‘착뻬’를 읽으시며 인간 본성의 잠재적 역량에 수긍하게 되셨다니 그 깨달음이 얼마나 귀한가요! 물 흐르듯 훌륭하게 정리해주신 후기 감사합니다. 담 주엔 어떤 새벽녁의 깨우침을 가지고 오실지 기대되옵니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