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티(불교&티베트)

9월 20일 불티 세미나 후기

작성자
김훈
작성일
2020-09-20 17:14
조회
102
첫날부터 열넷 째 날까지 치카이 바르도와 초에니 바르도의 과정을 거치면서 대지혜, 대자유의 빛으로 이끌어주는 밝은 빛을 수없이 보여주지만 우리는 질투와 집착, 나쁜 카르마, 인간 존재들의 오랜 습관이라는 장애로 인해 그 자비의 밝은 빛을 붙잡지 못하고 매번 어두운 빛을 쫓습니다. 그리고 그 어두운 빛으로 간다면 아수라 세계에 떨어져 전쟁과 다툼의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겪습니다.

역설적 관점에서 보면 죽음의 관점에서는 현세 또한 바르도의 과정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죽음의 바르도 과정과 마찬가지로 현세 또한 지혜보다는 그의 욕망이라는 어두운 빛을 쫓기에 번뇌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 불티 세미나에서는 사자의 서를 읽으며 생각난 여러 소견들이 있었습니다.

보이는 모든 환영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빛이며 자신의 마음의 반영이라고 말합니다. <영혼들의 여정>이라는 책에서 서양의 사후 체험한 사람들은 공통의 빛을 보며 티벳과는 다른 천국의 경험을 합니다. 다른 신앙, 문화를 가진 사람들은 그들의 보는 사후 세계의 환영들은 다르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티벳의 그림들이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는 것은 그 문화에 있지 않기 때문이고, 무의식에 축적된 수많은 기억들이 투영돼 나타납니다.

그러니 사자의 서를 그대로 이해하기 보다는 그 이면에 숨겨진 참다운 지혜를 볼 수 있는 통찰이 필요합니다. 밝은 빛의 대지혜, 대자유의 상태에서는 태어남도 죽음도 없습니다. 즉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고 사자의 서가 죽음의 기술인 동시에 생의 기술인 거죠.

오늘은 생각 명상을 했습니다. 마음의 무의식이 만들어내는 오만 가지의 생각의 환영에 빠지지 않고 그것을 알아차림으로써 밝은 빛의 지혜를 깨닫습니다.

기독교 믿음의 문제처럼 사자의 서도 누군가 소설처럼 고대의 허구로 써졌을 수도 있지 않느냐. 믿음에 문제에 따라 사자의 서를 읽는 것이 덧없는 것이 될 수 있음을 말했습니다. 결국 의심한다는 것은 붓다의 말씀처럼 좋은 일이지만 그것이 밝은 빛의 지혜를 받아들일 수 없는 나쁜 카르마의 장애가 아닌지는 숙고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기독교에서 항시 믿음을 문제시 삼는 것과 달리 불교는 믿음 아닌 자기 성찰의 관점에서 봐야 하지 않을까요.

저도 모든 것에 의심하고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반면 모든 것으로부터 배울 점이 있습니다. 붓타 고타마가 하잖은 미물에게조차 배울 것이 있다고 한 것처럼 악인에게나 원수에게도 말입니다.
전체 2

  • 2020-09-20 23:14
    와, 훈샘 초스피드로 후기를 올려주셨네요! ^^

    우리가 쌓아온 습관의 업력이 삶과 죽음을 통과하면서도 우리를 같은 파동으로 이끌게 한다는 게 너무나 실감이 나는 것 같습니다. 죽음의 과정에서 보이는 환영들이 마음의 반영이라면, 지금 삶에서 저희가 보는 것들도 모두 마음의 반영인 환영이라는 게.... 음, 두 눈을 비비고 다시 봐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밝은 빛의 지혜'로 뚫고 가야 하는 거겠죠?! 당장 지금 '삶의 바르도'에서부터 말입니다~ ㅎㅎ

    • 2020-09-23 21:54
      삶과 죽음을 개별적인 다른 세계로 줄곧 인식했던 제가, 사자의 서를 통해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저에게는 큰 깨달음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