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티(불교&티베트)

<불교 of 티벳> 시즌2 열 번째 시간 후기

작성자
민호
작성일
2020-09-27 19:09
조회
101
 

 

드디어 불교 of 티베트 시즌2가 마무리되었습니다! 이번 시즌에는 전 세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티베트의 두 보서 <티벳 해탈의 서>와 <티벳 사자의 서>를 읽었고, 또 제 1대 빤첸 라마의 시에 대한 달라이라마의 해설서 <달라이라마, 죽음을 말하다>를 읽었습니다. 새삼, 제가 어쩌다가 이런 표지부터 포스가 넘치는 책들에 손대어 여차저차 끝까지 읽게 되었는지를 생각해보면 기묘하기도 합니다. 그래봐야 이 귀한 가르침의 아주 일부만 이해했을 것이고 어쩌면 오해했을지도 모르지만, 생전 처음으로 죽음이라는 문제를 생각해보고, 여러 샘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티벳 불교 전통에서 바르도와 윤회와 깨달음이라는 것이 어떻게 설명되는지 얻어 듣는 경험은 사뭇 값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이라는 문제가 저희의 일상에서는 감추고 외면해야 할 것처럼 블랭크처리되고 있어서 그것에 대해 생각할 기회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저와 같은, 자칭 타칭 ‘젊은이’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죽음은 우리에게 최대한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으로 여겨집니다. 살면서 죽음을 마주할 기회는 매우 드뭅니다. 대부분의 임종은 요양원과 병원에서 이루어지고, 시체는 안치소에 있다가 화장됩니다. 사실 이것은 근대도시의 발달과도 맥을 같이 합니다. 이반 일리치에 따르면, 18세기 즈음부터 위생 담론과 자원 순환의 필요성에 의해 도시에서는 오물과 악취에 이어 죽음도 추방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노인들과 병자들과 범죄자들과 광인들 모두 ‘시설’로 추방되었죠. 시골에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봤다고 할 수 있는 죽음의 이미지는 장례식장의 영정과 납골당의 단지가 전부입니다. 죽음은 언제나 우리의 일상적 삶 바깥에 있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죽음을 이해할 의지도, 그래야 할 필요성도 없는 것 같습니다. 아득하고 막연한 사건으로서의 죽음. 그럴수록 우리는 그것에 두려움과 거부감을 갖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어쩌다가 죽음이라는 문제를 떠올릴 때 기껏해야 두려워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죠. 외면하기와 두려워하기. 이것이 내가 죽음에 대해 취하는 태도의 전부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삶만을, 죽음이라는 문제가 소거된 삶만을 바라보고 사는 것이 역설적으로 왜 더 무력한지 이번 세미나를 조금 힌트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달라이라마는 죽음에 대해 사색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고 하시면서, “우리는 현재의 삶을 영원히 지속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달라이라마, 죽음을 말하다>, 53쪽)고 말했습니다. 삶에서 추방되어온 죽음이라는 사건을 직면하는 문제, 이는 결코 죽음의 도래를 두려워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영원히 지속되지 않을’ 이 삶을 어떻게 어떤 자세로 살아갈 것인가를 다시 정초하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달라이라마는 죽음을 분석하는 것이 “중요한 수행들을 많이 쌓을 수 있는 현재의 소중한 삶에 감사하고자 하는 것”(같은 책)이라고 하셨습니다. 수행자에게나 보통의 사람들에게나 죽음을 생각하는 일은, 이 삶의 과정과정에 진지해질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 같습니다.

<티벳 사자의 서>에서 자세하게 묘사해주는 바르도의 국면들을 보면서 두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는 거기서 겪게 되는 경험들이 구체적인 부분이 다를 뿐 본질적으로 살아서의 과정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이었습니다. 반장님은 델카코마니처럼 똑같다고 표현하셨는데요. 특히 ‘죽음의 순간’인 치카이 바르도 이후 ‘존재의 근원을 체험하는 사후세계’인 초에니 바르도의 경험이 그렇습니다. 죽음 이후 첫째날부터 일곱째날까지 각각 푸른 빛, 흰 빛, 노란 빛, 붉은 빛 등 너무나 밝은 빛을 내는 평화의 신들이 권속을 거느리고 나타납니다. 그 빛은 “사후세계의 위험한 길에서 그대를 맞이하기 위해 나타난 바이로차나(와 여러 부처들)의 가슴에서 나오는 빛”(<티벳 사자의 서>, 272쪽)입니다. 그것을 이해하고 믿으면 그 가슴 속으로 곧바로 녹아 들어가 “우주의 씨앗이 빽빽이 채워진 중앙 세계에서 붓다의 경지를 얻”(273쪽)게 됩니다. 우리를 구하러 온 자비로운 부처들이 깨달음의 찬스! 그 찬스가 매일매일 주어집니다.

그러나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그 밝음을 마주 볼 수 있는 근기가 우리에게 없다는 것이죠. “이때 나쁜 카르마의 힘 때문에 그대는 진리의 세계로부터 나오는 대지혜의 눈부신 푸른색 빛에 대해 무서움과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그대는 그 빛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은 생각이 들 것이다.”(271쪽) 깨달은 자 혹은 깨달은 세계가 주는 강렬한 빛은 우리에게 오히려 두려움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리고 저쪽에서 안락해 보이는 흐린 빛이 훨씬 더 편안하고 매력적으로 느껴져 그곳으로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집니다. 그것은 천상계, 인간계, 축생계 등 욕계의 육도에서 비춰오는 빛들입니다. 눈부시게 밝은 빛 옆에 영롱한 어둔 빛. 이 둘이 언제나 세트로 찾아옵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꾸만 편안하고 익숙한 쪽으로 향해갑니다. 깨달을 수 있는 기회, 자비심을 일으킬 수 있는 기회는 계속해서 주어집니다. 죽음 직후의 밝은 상태인 치카이 바르도부터, 14일 간 사후세계의 중간 상태를 여행하는 초에니 바르도, 그리고 환생의 길을 찾는 시드파 바르도를 포함한 49일 내내, 그리고 환생 직전 자궁문 앞에서도 기회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습관과 카르마가 강력해 그 기회들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게 하고 결국 우리는 편안함으로 쫓겨 윤회의 길로 나아갑니다. 이 과정은 정말로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겪는 일들과 닮아있습니다. 끊임없는 찬스, 끊임없는 무지, 끊임없는 자비, 끊임없는 무명.

“그대가 지금까지 여러 차례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했다 해도, 그대는 지금 이 순간에 깨달음을 얻어 영원한 자유에 이를 수 있다.”(390쪽)

죽음에 관한 가르침을 들으며 또 한 가지 배운 점은 그 어떤 외적인 행실보다도 매 순간 순간 일으키고 있는 마음의 질 혹은 파장이 어떠한가의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책에서는 죽음의 바르도에서 보게 되는 장면들을 인물들의 인상착의부터 풍경들까지 무척 디테일하게 묘사하지만, 그 모든 것이 우리 마음의 환영임을 거듭거듭 강조합니다. 각 신들이 소지한 무기나 의상, 장신구들, 화려한 색상들, 공포스런 위협과 고문 등 모든 것이 환영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할 것은 이와 동일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편집자 에반스 웬츠는 이 책에 묘사된 인물과 형상들이 티벳 및 히말라야 지역의 문화 속에서 형성된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서양 문화의 전통 속에서 그려지는 사후세계는 또 다른 풍경이겠지요. “사자에게 나타나는 환영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환영들이 아니라 사자의 마음 속에 다긴 생각들이 투영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바꿔말하면 그것들은 사후세계의 꿈속에서 사자가 가진 심리적인 충동들이 인격화되어 나타나는 형상들인 것이다.”(88쪽) 그러니까 죽음 이후에 우리가 만나게 될 풍경은 기본적으로 우리에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것은 우리가 가장 강하게 집착했던 모양으로 인격화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문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과연 죽음 이후에 어떤 형상과 색깔과 감각들이 펼쳐질 것인가? 필히 그것은 우리가 살면서 가장 많이 일으켰던 마음의 반영일 것입니다. 가령 매일 아파트 값 혹은 주식의 변동을 떠올렸던 사람에게, 친구나 애인이나 가정에 애착을 품었던 사람에게 펼쳐질 세계는 어떠할까요? 아마 그러한 욕망이 가장 파괴적인 모습으로 인격화되어 두려움과 탐욕을 일으키며 등장할 것입니다.

바르도에는 필터가 없습니다. 거기에는 물질적인 몸이 없기에 행위가 아니라 마음의 질 혹은 파장이 다이렉트로 표현됩니다. 가령 사자는 유가족의 마음 속에 떠오른 재산 상속에 대한 탐욕을 그대로 듣습니다. 반장님이 저번 시간에 들여준 일화처럼, 사자는 사자를 위해 만트라를 외우고 있는 동료들의 마음 속에서 자신의 발우와 의복을 탐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껍질은 벗겨져 버리는 세계이지요. 또 시드파 바르도에서 겪게 되는 사후의 심판에서는, 모든 선업과 악업이 ‘카르마의 거울’에 선명하게 비춰져 있습니다. 우리가 사회에서 선행이라고 하는 일을 행하는 와중에도 그 밑마음에는 아만과 질투와 집착과 탐욕이 자리 잡고 있을 수 있습니다. 외관으로 드러나는 행위가 아니라 그 순간 일으키는 마음의 상태가 중요합니다. <보만론>의 한 구절이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작은 그릇에 300명의 음식을 매일 세 번 보시한 것이 자애심을 한 순간 일으킨 복덕의 일부분에도 미치지 못하네.” 이 말은 공부를 하는 저 자신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 나는 어떤 마음으로 공부하는가? 혹시 나의 앎, 나라는 세계를 더 견고히 하려는 아만심인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나는 어떤 마음을 일으키고 있고 그것은 드러난 현상 이후의 바르도에서 어떤 환영으로 이어질 것인가? 이처럼 죽음에 대한 가르침은 바로 그 매 순간의 날것의 마음의 상태를 디테일하게 되묻지 않을 수 없게, 마음의 자장을 바꾸는 수련을 당장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

세미나를 하면서 이 <티벳 사자의 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이것을 단지 ‘천 년 전 티벳의 죽음 문화’ 혹은 ‘신비’, ‘비현실’, ‘상징’ 등으로 이해하는 것은 어딘지 편협한 태도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현실성, 정상성, 의식을 고집하고 선을 긋는 것보다 죽음에 대한 이 접해보지 못한 가르침들을 생각해봄으로써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효과들에 주목하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아직 죽음의 단계에 들어가지 않는 우리에게는 어떻게 사는가 더 중요하지만, 죽음의 문제를 충분히 고민하고 폭넓게 이해하는 만큼 삶의 방식도 풍부해질 수 있다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그래서 파드마삼바바는 결론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살아 있을 때조차 이 가르침을 배우는 것이 더없이 중요하다. 이것을 지니고 다니면서 암기하라. 그리고 마음에 적절히 담아두고, 정기적으로 세 번씩 읽으라. 말과 의미를 분명히 이해하라. (...) 이것을 한 번 듣고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사후세계 상태에서는 한 자도 빠짐없이 기억하게 될 것이다.”(357쪽)

아직까진 잘 모르겠지만, 어떤 식으로든 이 책을 만난 것은 좋은 일인 것 같습니다. 물론 예전처럼 극소수에게만 접근이 허락된 봉인된 보서가 아니라 클릭 몇 번만으로 당일배송이 가능한 출판물이지만요. 그래도 함께 읽고 함께 세미나를 하는 경험은 드뭅니다. 얼마나 이해했는지의 여부는 장담할 수 없지만서도요ㅎㅎ.

“이 가르침을 만난 자들은 행운이다. 많은 공덕을 쌓아 무지의 어둠을 없앤 자들을 제외하고는 이것을 만나기 어렵다. 만난다 해도 이 가르침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 가르침을 듣고 거부하지만 않으면 영원한 자유가 얻어진다. 그러므로 이 가르침을 소중하게 다루라. 이것은 모든 가르침의 핵심이다.”(3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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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9-27 21:42
    우리의 시야와 사유에서 사라져버린 죽음을 삶으로 소환하는 것도 드문 일인데, 이번 시즌의 보서들은 민호샘이 언급하신 것처럼 죽음에 대한 사유를 통해 지금 내가 당장 삶의 매 순간을 어떤 마음으로 펼쳐내고 있는지 직시하게 만듭니다. 자신에 대한 기만과 허영을 다 거두어낸 날 것으로서의 마음의 상태. 이 마음의 상태가 어떻게 업력의 거울에 맑게 비추어 지고 있는가.

    불티의 반짝이는 샛별, 불목하니 민호샘의 훌륭한 후기 감사합니다. 저희 모두 이 귀한 가르침을 잊지 않고 죽음의 순간까지 정진할 수 있기를. 그리하여 바르도에서 깨달음의 세계가 주는 강렬한 밝은 빛을 마주할 수 있는 근기를 지닐 수 있기를! 불티 시즌 2 함께 하신 샘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

  • 2020-10-03 12:57
    민호샘의 사유가 녹아들어간 후기 읽고 보니, 보서들이 다시 상기되면서 불티를 빛내주는 샛별이란 표현이 잘 어울립니다. 사후세계에서 사자에게 나타나는 형상들이 지금 내가 의지 처로 삼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합니다. 이것이 꿈속에서나 사후의 세계에서나 여전히 작동하는 것이 아닐까요.
    “많은 공덕을 쌓아 무지의 어둠을 없앤 자들을 제외하고는 이것을 만나기 어렵다. 만난다 해도 이 가르침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무지를 없애고 공덕을 쌓아가는 것이 어쩌면 함께 모여 다는 이해할 수 없다하더라고 조금씩 읽어가는 과정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반장님과, 민호샘 시즌1.2를 원활하게 공부할 수 있도록 신경 써 주시어 감사합니다. 수고 많이 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