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역 세미나

성역 네번째 세미나 후기

작성자
소소 (최난희)
작성일
2021-03-17 10:28
조회
123
<성의 역사> 전권을 읽는 1년간의 항해를 시작한 지 4주차에 접어듭니다. 개강하고도 한 달이 넘어가는 이 시점에도 저는 다소 마음이 떠 있는 상태인 것 같습니다. 어느 공부에도 집중하지 못한 채 겨우겨우 과제를 정리해 세미나 당일 새벽에 숙제방에 올리기 일쑤니까요. 정말 세밀하게 조금씩 읽고 논지를 정리해가는 세미나였기 천만다행이라는 생각까지 듭니다. 함께 공부하는 우리 선생님들은 형편이 어떠신지요? 그런 와중에도 세미나가 진행되면 간질간질하게 이해될 듯 말 듯 푸코의 언어를 머리를 맞대고 풀어보는 재미로 시간이 훌쩍 흘러가죠. 이번 세미나에서도 아하, 푸코가 하고 싶었던 말이 이거였구나, 짚이는 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 짚였던 부분을 글로 풀어내려니 다시 아득함! 왜 내가 후기를 쓴다고 자청했나, 후회가 막급입니다만 이미 엎질러진 물, 되는데까지 쓸어담아보겠습니다.

이번 세미나에서 나눈 이야기는 “스키엔티아 섹수알리스”의 후반부와 4장의 쟁점 부분이었습니다. 지난 시간 “스키엔티아 섹수알리스”의 전반부에서 다루었던 내용을 잠시 정리하자면, 푸코는 성의 진실을 생산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고 하면서 “아르스 애로티카”를 갖춘 사회(중국, 일본, 인도, 로마, 회교권 아랍사회 등)에서는 ‘성애의 기술에서 진실은 실천으로 간주되고 경험으로 얻어지는 쾌락 자체로부터 도출’된다고 했습니다. 말이 참 어려운데요. 이 말을 제가 이해한만큼 풀어보면, 기독교 문명과는 거리가 먼 다른 문명권에서는 관능 즉 통제되지 않는 육체적 욕망은 신중하게 다루어져야하는 에너지 같은 것이었지, 기독교 문명에서처럼 ‘악마’적 표상으로 금기시하거나 억압하지는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성적 진실’이라는 것이 어디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성적 행위 그 자체로 이미 진실을 실현하는 것이고 쾌락도 경험적 쾌락으로 그치는 것이지 ‘쾌락’이라는 관념에 따라 구성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니었다는 이야기지요.

기독교 문명은 참 이해하기 어려운, 그 자체로 연구대상이 되어야 할 문명인 것 같아요. 그런데 이렇게 말하고 나니 우리는 마치 기독교 문명과는 전혀 다른 ‘동양’사람인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미 속속들이 기독교적 문명권의 장치 아래 만들어진 ‘주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 세미나에서 또 한 번 놀란 지점은 지금까지 푸코가 마치 서양사회에 대해 ‘아르스 이로티카’의 전통과 완벽히 단절하고 ‘스키엔티아 섹수알리스’의 체제로 돌입해온 역사기 때문에 ‘사망선고’를 내렸구나, 라고 정리하고 있던 차였는데, 다시 한번 뒤집기를 하는 부분이었습니다.

아마 스키엔티아 섹수알리스아르스 에로티카와 대립적일 것이다. 그러나 아르스 에로티카는 그래도 서양문명에서 사라지지 않았다는 점, 또한 아르스 에로티카는 성적인 것의 과학을 싹트게 하려는 동향에서 언제나 부재한 것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94)

아무튼 푸코를 공부하면서 빠져드는 것은 바로 이런 부분인 듯해 보여요. 뭔가 이게 이런 말이구나, 라고 단정 짓는 순간, 그게 아니고, 그렇게 단정 짓는 사고방식이 어떤 담론의 배치 속에서 생산된 것인지를 살펴보라는 주문을 듣는 것 같거든요. 자, 그렇다면 위의 문장 ‘스키엔티아 섹수알리스’와 ‘아르스 에로티카’를 대립적으로 파악해 우리는 ‘아르스..’ 서양인들은 ‘스키엔티아..’ 이렇게 이분법으로 바라보는 것은 너무도 순진한 발상이고 지금까지 푸코를 읽은 우리는 푸코가 이렇게 단순한 이분법으로 뭔가를 선명하게 설명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푸코는 뭘 말하고 싶은 것일까요.

건화샘의 발제문에 따르면 “푸코는 ‘성’에 대해 질문하려는 것이 아니라 성에 대해 특정한 방식으로 말하도록 하는 담론의 질서, 권력의 배치, 그리고 담론과 권력을 작동시키고 또 그것들에 의해 생산되는 주체성에 대해 질문을 던지려 하는 것” 이라 합니다. 그러면서 건화샘이 던지는 질문이 ‘아르스..’와 ‘스키엔티아..’를 대립적으로 보면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한다고 생각합니다. 건화샘의 질문을 들여다 보죠.

성으로부터 진실을 뽑아내고자 하는 욕망에 대해 질문해보고 싶다. 서양은 성에 대해서 쾌락만이 아니라 쾌락에 관한 지식, 쾌락을 아는 즐거움, 지식-즐거움”(92)을 이끌어내고자 했다. 3장 전반부에서 나오는 것처럼, ‘아르스 에로티카에 있어서 진실은 실천으로 간주되고 경험으로 얻어지는 쾌락 자체로부터 도출된다. 여기에는 성에 관해 말하는 것의 쾌락이나 성에 관해 알려는 욕망 같은 것은 없다. 성을 수단으로 삼아 인식에 이를 수는 있을지라도. 그런데 (니체가 말하듯) 기독교 문명은 처음부터 성과 관능에 관해 매우 적대적인 입장을 취했으면서도 성에 관해 집요한 지식의 의지를 작동시켰다. 성을 내밀한 비밀로 만드는 것에 감도는 쾌락은 어떤 쾌락인가? 성의 비밀을 캐내려는 자의 욕망은 어떤 욕망인가? (건화샘 발제문)

4장 쟁점 부분에서 푸코는 시종일관 권력에 대해 우리가 이미지화하는 ‘법-주권제’의 잔영을 없애고 싶어합니다. 우리가 권력에 대해 가지고 있는 표상을 다섯 가지 정도로 친절하게 짚어주고 있죠. 쉽게 이해하자면 우리가 ‘권력’하면 떠올리는 가장 상식적인 표상은 사극에 나오는 왕의 권력이라는 말입니다. 가령 권력은 주체의 외부에 있고 누군가의 소유가 될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의 힘은 ‘하지 마라’는 명령입니다. 푸코가 말하는 권력을 이해하려면 이런 상식적인 표상을 가뿐히 넘어서야 합니다. 그래서 쟁점의 마지막 말이 “법 없는 성과 동시에 왕 없는 권력을 생각해보자”고 하는 것이겠죠. 우리가 끝까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푸코에게 ‘권력은 항상 관계 속에서 작동하는 것이고 억압할 때조차도 생산한다’는 테제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이 인상 깊었는데요.

권력이 욕망에 대해 외부적 영향력만을 지닐 뿐이라면 해방이 약속되거나, 권력이 욕망 자체를 구성한다면 당신들은 여전히 덫에 걸려 있다고 단언되거나 한다.” (109)

푸코는 이 표상이 성과 권력의 관계를 문제화하는 사람들만의 특유함만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 표상은 훨씬 일반적이고 정치학적 권력의 분석에서 빈번히 눈에 띄며, 서양 역사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푸코는 이러한 담론을 ‘법-담론’이라고 합니다. 서양 역사에만 그럴까요. 이미 우리가 권력과 욕망의 관계를 생각할 때도 이런 표상을 가동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욕망한다.(마치 욕망이 자신의 소유물인 양) 하지만 결여투성이의 이 현실은 나의 욕망을 충족시켜주지 않는다. 그러니 괴롭다. 이 현실을 타파하고 자유로운 저 이상세계를 향해 투쟁하자.’ 혹은 한 걸음 더 나아간 듯이 보이는 담론의 형태는 ‘권력이 욕망 자체를 구성한다’입니다. 이것은 욕망과 금기는 항상 상호연동된다 가설인데요. 억압의 실체가 저 밖에 있다는 말보다는 진일보한 것 같은 담론이지만 실상 이 담론도 억압을 존재를 실체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항 대립의 구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흔히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진다’는 말을 쓸 때 이 가설의 논리를 그대로 차용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푸코는 “이어질 탐구의 관건이 권력의 ‘이론’ 쪽보다는 오히려 권력의 ‘분석론’ 쪽으로, 즉 권력관계가 형성하는 특수한 영역의 규정과 그 영역을 분석하게 해주는 도구의 결정 쪽으로 나아가는 것”(109쪽)이라고 합니다. 그럴 때 권력에 대한 불필요한 표상을 말끔히 지우는 것이 필요한데, 억압 가설은 그런 견지에서 보면, ‘충동의 성격과 역학을 이해하는 방식이지 권력을 이해하는 방식은 아니기’ 때문에 지워야 할 표상이 아닌가 합니다.

이상으로 후기를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전체 3

  • 2021-03-18 11:09
    잘 읽었습니다. 좀더 이해가 옵니다.

  • 2021-03-18 13:37
    충실한 후기 정말 감사드립니다! 푸코의 책을 읽다보면 그 문제제기가 워낙 세밀하다보니, 어떻게 그것을 소화해야 할지 좀 조심스러워지는 것 같아요. 좀 무모해질 필요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의 쾌락에 대해, 우리를 관통하는 권력에 대해 함께 적극적으로 질문해보아요!!

  • 2021-03-18 14:55
    저번 시간은 우리의 권력표상을 저 멀리 벗어 던져버리게 하려고 푸코가 무지 애썼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죠 ㅎㅎ 난희샘 후기를 읽으면서 또 다시 그 순간을 느끼네요. 감사히 자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