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역 세미나

성역 두 번째 시간(2월 26일)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1-02-21 22:38
조회
110
“정치에 종사하기 위해서는 ― 단순한 정당정치는 별도로 하고요 ― 가능한 한 가장 정직하게 과연 혁명이란 바람직한 것인가를 알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함몰할지도 모를 위험을 무릅쓰고 이 끔찍한 흙두둑을 탐색해야 하는 게 정치의 역할인 셈이죠.”

프리섹스가 성의 해방인가? 푸코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푸코가 《성의 역사》 1권을 출간한 1970년대는 히피의 시대였습니다. 평화와 자유. 이들은 사회의 억압적 허위의식에 맞서 욕망의 해방을 외쳤습니다. 그들은 마약을 하고 난교를 벌이며 자유를 만끽했습니다. 성에 있어서 기존의 사회에서 이상성욕으로 여겨져서 터부시되던 것들을 자유와 해방의 이름으로 복권시키고자 했습니다. 사실 이런 태도는 현재에도 유효한 것 같습니다. 성에 대해서 소위 ‘정상’이라고 불리는 것들로부터 얼마간 거리를 두는 것이 더 ‘진보적인’ 태도인 것처럼 여겨지고, 반대로 성적 욕망을 감추려 하는 것은 보수적이고 구태의연한 태도로 간주되곤 합니다. 여전히 성에 대해, 특히 정상의 규범으로부터 벗어난 성에 대해 공공연하게 말하는 자들은 약간은 당당한 태도, 즉 기존의 질서에 도전한다는 의식, 스스로 전복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을 표시하는 어조 같은 것들을 내보입니다.

물론, 푸코가 소수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것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건 아닙니다. 그가 문제 삼은 것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동일시하는 태도입니다. “혁명과 행복, 혁명과 더 새롭고 더 아름다운 다른 육체, 또는 혁명과 쾌락”을 은연중에 겹쳐놓는 것. 이러한 구도는 문제를 납작하게 만들어버립니다. 현재의 모든 문제들을 너무나 손쉽게 ‘억압’이라는 궁극적인 원인의 책임으로 돌리고, 억압의 해방으로서의 ‘더 나은 미래’를 무력하게 상상하는 방식이죠. 이번에 함께 읽은 인터뷰에서 푸코가 말하듯, 이것은 정말로 위험한 함정이 될 수 있습니다.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꿈꾸는 자들은 좀처럼 혁명이 더 커다란 고통이나 파괴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것을, 혁명 이후에 우리에게 불행이 찾아오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려 하지 않습니다.

푸코가 ‘억압 가설’을 비판하면서 고민하고자 했던 것은 윤리의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억압/해방의 구도 속에서는 윤리를 발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성의 억압을 말하는 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성을 가지고 있다. 이 성은 좌절되었을 뿐 아니라 침묵을 강요당하고 있다. 위선적인 금지가 성을 억압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에게 와서, 우리에게 말하고, 우리에게 그 모든 것을 보여달라, 우리에게 당신의 비밀을 털어놓아라 …” 우리는 성을 지니고 있고 억압을 벗어나기만 하면 환락의 동산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푸코가 보기에 성은 개인이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시대와 사회의 복잡한 장치들 속에서 ‘생산’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을 생산의 관점에서 볼 때 윤리의 문제가 도출됩니다. 자신의 쾌락이 규정되고 통제되는 조건을 이해하고, 그러한 이해 속에서 자기 쾌락에 양식을 부여하는 문제가 중요해지기 때문이죠. 그러고 보면 푸코는 굉장히 신중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푸코는 우리로 하여금 혁명과 미래와 자유에 대한 망상으로 들뜨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우리 자신의 삶을 어떠한 방식으로 겪어낼 것인지, 어떻게 자기 자신이 될 것인지를 고민하도록 하는 것 같습니다.

다음시간에는 <성의 역사1> 2장의 1번까지 읽어오시면 됩니다. 텍스트 내용을 충실히 소화할 수 있도록 논점이 분명한 노트를 만들어와주세요! 간식은 경혜샘이 맡아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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