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역 세미나

성역 세번째 시간(3.5)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1-02-28 20:04
조회
88
이번 주에는 2장의 1번 ‘담론의 선동’을 읽고 세미나를 했습니다. ‘담론의 선동’에서 푸코는 1장에서 제시한 ‘역사적 문제’를 해결합니다. 성의 억압은 정말로 역사적인 사실일까? 푸코의 대답은 성의 억압이 아니라 오히려 성에 대한 담론의 선동이 있었다는 것이었죠. 분명 담론의 통제와 언술의 경찰이 있었습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관계와 상황 속에서 성이 말해져야 하는지가 세밀하게 경계 지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신중함’이 요청되는 까닭은, 성이 더 이상 아무렇게나 말해져서는 안 되는 중요하고 특별한 무엇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가령 가톨릭 고해성사에서는 성에 관한 법의 위반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기미가 있는 모든 것을 상세하게 드러내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성이 죄의 뿌리인 욕망이 작동하는 사적이고 비밀스러운 영역이 됩니다. 그러나 이는 성이 금기시되고 억압되고 은폐되었음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이 비밀스러운 것으로 간주됨으로써 성은 말해져야 한다라는 선동이 정당성을 얻게 됩니다. 성에 대한 검열과 통제라는 부분적 현상은 성에 관한 다형적 선동이라는 전체적 맥락의 한 단면을 이룹니다. 금기와 억압은 “말해진 것들 옆에서 말해진 것들과 함께 말해진 것들과 관련하여 전체적 전략에 따라 작용하는 요소”(35쪽)입니다.

이렇게 억압에서 생산으로, 그리고 침묵의 강요로부터 담론의 선동으로 관점을 옮길 때 우리는 무엇을 달리 보게 되는 걸까요? 우선, 권력의 작동원리를 새로이 보게 되는 것 같습니다. 푸코에 따르면 18세기부터 성은 인구의 통치라는 문제와 더불어 새롭게 담론화되기 시작합니다. 판단하거나 단죄하는 것이 아니라 성을 관리할 필요성이 생겼던 것이죠. 이때에 이르러 처음으로 한 사회의 미래와 운명이 각자가 자신의 성을 이용하는 방식과 관련되어 있다고 단언되기 시작합니다. 관리되어야 할 자원이자 인구의 ‘자연성’의 일부를 이루는 요소로서의 성. 푸코는 권력을 억압하고 강제하는 힘, 개인이나 집단에 의해 소유 가능한 실체로서가 아니라 우리의 인식과 품행을 특정한 방식으로 인도하는 관계들의 망으로 이해합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억압과 해방, 적과 아군, 선과 악을 대립적으로 파악하는 피상적인 이분법을 넘어서, 우리를 지금 이러한 방식으로 살아가도록 하는 조건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앎이 구성되는 것과 더불어 무지도 함께 구성된다는 난희샘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구성하는 조건을 이해하려 할 때, 우리는 노예적이지 않은 방식의 투쟁(혹은 혁명)을 상상할 수 있게 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성’을 지니고 있고, ‘권력’이 모종의 의도를 품고 그것을 억압하려 한다고 믿을 때 우리의 싸움은 너무나 반응적이게 됩니다. 억압과 질서와 도덕은 모두 악한 폭력이고, 그러한 것들의 전복에서 자유의 이상을 찾으려하게 되죠. 구성하고 창조하고 조형하는 것으로서의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자유가 아니라 억압으로부터 풀려나고 욕망을 해방하는 것으로서의 반응적 자유. 이러한 투쟁과 혁명은 더욱 강력한 영토로 재영토화되거나 죽음과 붕괴를 향해 나가가게 될 수 있을 따름입니다. 우리의 삶을 규정하고 있는 전반적인 조건을 살필 때에만, 우리의 앎과 더불어 구성되고 있는 우리의 고유한 무지에 대해 질문할 때에만, 우리는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저항과 혁명을 모색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시간에 읽어올 분량은 3장의 두번째 칼표시(‡)까지입니다. 제 책으로는 76페이지까지네요. 간식은 미현샘께서 맡아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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