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노자읽기

8.4 스피노자 후기 (3부) - 2

작성자
gini
작성일
2016-08-10 04:16
조회
622
 

지난 시간, 저의 의문은 두 가지였습니다.

 

욕망, 기쁨, 슬픔을 기본정서라고 하는 것은 어떤 기준에 의해서인가?

이 질문을 한 이유는 욕망을 기쁨, 슬픔과 같은 범주에 두는 게 이상해서였습니다. 현옥샘 강의안에 의하면 욕망을 더 기본적인 것으로 그 다음에 기쁨과 슬픔이 따라 나오는 것으로 배열되었지요. 차라리 이 배열이라면 이해가 더 잘돼는데 스피노자는 아무래도 세 정서를 등위의 범주(기본정서)에 두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일단 욕망의 스피노자적 개념을 명확히 몰랐다는 것을 자백하고...(^^) 욕망은 정의에 의하면 ‘의식되는 욕구(충동)’지요. 욕구는 바로 코나투스라고 하였습니다. ‘의식된다’는 것은 앞에 어딘가에서 나왔습니다. 우리가 의식할 수 있는 것은 바로 현실적인 신체뿐이라고. 그런데 신체는 그냥 의식되지 않습니다. 반드시 외부 사물과의 마주침이 있어야만 의식되지요. 그래서 의식한다는 것은 이미 외부사물과의 마주침이 있었다는 말이고 그 의식은 그러니까 신체변용의 관념, 즉 정서인 것이지요. 의식되는 욕구인 욕망은 따라서 정서입니다. 그런데 욕망은 정서이면서도 욕구, 코나투스이지요. 모두 정서라는 면에서 욕망, 기쁨, 슬픔은 한 범주에 놓일 만 합니다.

 

그런데 욕구가 의식될 때, 즉 욕망이 생길 때 동시적으로 기쁨인지, 슬픔인지도 결정됩니다. 신체와 정신의 활동능력이 증가, 촉진되는 것으로 의식되는 것을 기쁨, 반대를 슬픔이라고 합니다. 욕망 따로 기쁨(슬픔) 따로가 아니라 기쁜-욕망, 슬픈-욕망이 있는 것이죠. 활동능력이 증가되는 욕망(기쁨)과 저하되는 욕망(슬픔) 그렇게요. 세 정서를 각기 다른 것으로 착각하도록 스피노자가 썼다고 생각하는 것은 제 착각인가요? (이 문제는 아직 스스로 해결을 못보았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의문 코나투스, 부적합한 관념 즉 신체변용의 관념에 나타나는 코나투스는 부적합한 코나투스다?

 

각각의 사물이 자신의 존재를 끈질기게 지속하려는 노력[코나투스]은 그 사물의 현실적 본질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정리7)

 

정의를 꼼꼼히 뜯어보겠슴다. 코나투스가 지키고자하는 이 ‘자신’은 누구인가요? 이 존재, 이 사물은? 스피노자에게 모든 사물은 ‘복합적,집합적’입니다. 가장 단순한 사물부터, 복합적 사물, 최고로 복잡한 사물인 바로 ‘신’까지.

 

그런데 왜 집합적.복합적이라고 하는 걸까요? 우리 자신이 단독적인지 집합적인지 우리는 실상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의식한다는 것은 외부사물과 마주치는 순간뿐이므로 우리가 우리임을 의식하는 그 순간 우리는 집합적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집합적일 때만 우리자신을 의식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또 의식하려면 마주침이 계속해서 일어나야 하는 것이니까 우리는 의식하는 한 단 한순간도 ‘상태’로 머물지 못하고 활동하고 있다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이상을 쌈박한 문장으로 구사하고 있는 마트롱은 [개인과 공동체]에서 연장은 불활성의 용기(容器)가 아니라, 공간화하는 순수활동으로서, 자기가 취하는 구조들을 산출하면서 자기 자신을 산출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연장은 사물이라고 보면 되겠지요.

 

이제 각각의 사물이 자신의 존재를 끈질기게 지속하려는 노력, 코나투스는 활동하고 있는 집합적 사물의 노력이고 그것은 말하자면 지금의 ‘관계’를 지속하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물 자체가 이미 ‘관계’를 내포하고 있는 말이니까요.

 

그런데 지금의 ‘이 관계’를 지속하려는 노력이라는 것은 지금의 ‘욕망’을 지속하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의식돼는 욕구만을 지속하겠다는 것. 여기에 의식돼지 않는 것들에 대한 배제가 존재합니다. 의식은 마주침을 전제로 합니다. 마주친 것을 욕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우리 유한한 존재들의 한계지요. 만약 다른 마주침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다른 것을 욕망할 수 있습니다. 다른 코나투스를 발휘할 수 있게 되는 것.

 

현옥샘은 강의안에서 ‘코나투스는 이런 바보짓에 대한 열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이게 코나투스가 아닌 게 아니라 슬픈-코나투스 아닐까요? 노예로서 살기를 원한다는 듯이 달려가는 그 힘 역시 그 관계망 속의 자신을 지키려는 노력 아닐까요? 그러나 신체와 정신 모두가 활력을 잃어가는 방향으로 가는 이 힘은 결국 자신을 파괴할 것이므로, 이 사실을 인식하는 것, 2종지를 발휘하는 것을 스피노자가 강조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인식한다고해서 슬픈-코나투스가 기쁜-코나투스로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코나투스 자체는 우리가 바꾸고 말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우리는 뭔가와 마주칠 때 코나투스를 의식할 뿐입니다. 단지 우리가 해볼 수 있는 것은 다른 마주침을 만들어보는 것. 우리가 배제하고 있었던 것들 중 어떤 것들을 만나보는 것. 관계의 지평을 좀 더 넓히고, 다양화하는 것. 그때서야 코나투스가, 욕망이 바뀔 가능성이 있는 것이겠지요.

 

아~~ 힘들어서 그만해야겠습니다. 더 읽다보면 다른 생각이 떠오를 수도 있겠지요?
전체 2

  • 2016-08-10 11:20
    만약 슬픈 코나투스와 기쁜 코나투스가 따로 있다면 홉스의 코나투스와 다를 바가 없겠지요. 관계망 속에서 자기를 지키려는 노력이라고 홉스가 따로 얘기는 안했지만, 어차피 인간이 관계 속에서 고투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를 지켜야한다고 본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으니까요. 스피노자의 코나투스가 현행적 본질이라는 점을 좀더 생각해보시면 좋을 듯해요.

  • 2016-08-10 07:50
    후기 기다리느라 목 빠진 것 아니신가? 이 새벽에 샘이 주는 혼란이 반갑고 감솨함다~^^ 저도 좀 더 많이 생각해 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