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내어 읽는 니체

4월 16일 《차라투스트라》 세번째 시간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8-04-12 19:40
조회
81
지난주에 이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부를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명령과 복종’, ‘우정’, ‘연민’, ‘위버멘쉬’, ‘가치평가’ 등의 주제에 대해서 토론했죠.

저는 〈천개의 그리고 하나의 목표에 대하여〉를 가장 재밌게 읽었습니다. 제게는 〈천개의 그리고 하나의 목표에 대하여〉가 니체의 이전 저작들을 많이 떠올리게 하는 장이었습니다. 우선 니체는 여기에서 인간(민족)들의 생존에 있어서 다른 무엇보다도 ‘평가’가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평가라는 것을 하지 않고서는 어떤 민족도 살아남을 수 없다고. 당연한 말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즐거운 학문》의 구절들과 연관해서 생각해보면 이는 ‘인식’에 대한 니체의 독특한 관점이 드러나는 구절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가령 《즐거운 학문》 111절에서 니체는 인간의 인식이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보도록 발전해오지 않았음을 말합니다. 생존을 위해서는 사물들의 미세한 차이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유사한 것들 사이의 차이를 소거하고 대상들 자체에 내재해 있지 않은 윤곽을 부여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죠. “정확하게 관찰하지 않았던 자가 모든 것을 ‘흐름 속에’ 있는 것으로 보았던 자보다 더 앞으로 도약”했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인식이란 사실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세계를 ‘해석’하는 일이라는 것.

이렇게 보기 때문에 니체는 민족들이 자신들의 가치를 기록해둔 각각의 서판을 하나의 ‘해석’으로 간주하게 됩니다. 이때 우리가 물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 더 지고한 가치인가?’ 혹은 ‘무엇이 더 합리적인가?’라는 질문이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계에는 ‘선 자체’나 ‘악 자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민족들이 자신들이 처한 조건(곤경, 땅과 하늘, 이웃한 민족)과의 관계 속에서 창조해낸, 매우 독창적인 가치의 서판들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죠. “그것들은 저들이 받아들인 것도, 찾아낸 것도 아니며 천상의 음성으로서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닙니다. 때문에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보편적 가치’가 아니라 민족들의 고유한 가치의 서판들로부터 들려오는 ‘힘에의 의지의 음성’입니다. “진실을 말하고 활과 화살을 다루는 일에서 능할 것”이라는 가르침을 내걸고 있는 민족은 세계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으며, 무엇을 극복하고자 하고 스스로를 어떤 방식으로 주체화하고 있는지를 물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는 《비극의 탄생》이 떠올랐습니다. 《비극의 탄생》에서 니체는 그리스 비극을 분석함으로써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인들의 세계-해석을 포착하고자 합니다. 이때 니체의 관심은 그리스 비극이 어떠하다는 것을 설명하는 데에 있지 않았습니다. 비극을 ‘필요로’ 했던 그리스인들의 힘에의 의지야말로 그의 탐구의 대상이었죠.

또 흥미로웠던 것은 니체가 ‘민족’, ‘국가’, ‘개인’을 규정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니체에 따르면 아주 오랫동안 가치평가의 주체는 민족이었습니다. 전통과 관습을 공유하고 있으며 동일한 삶의 조건에 처해 있는 집단 정도가 니체가 말하는 민족이 아닐까 싶네요. 이때 이들이 창조한 가치는 이들의 신체에, 생활양식에, 이들을 둘러싼 환경에 각인되어 있을 것입니다. 민족은 자기 자신의 창조자입니다. 니체는 국가를 민족과 구분하는데, 국가의 등장은 곧 민족의 죽음입니다. 니체는 “국가는 선과 악이라는 말을 다 동원해가며 거짓말을” 해댄다고 말합니다. 또 “국가가 무슨 말을 하든 그것은 거짓말”이며, “무엇을 소유하든 그것은 그가 훔친 것”이라고도 말하죠. 아마도 니체가 보기에 국가란 가치를 창조하는 주체가 아니라 온갖 이데올로기들을 내걸고서 민족들을 절멸하고, 개인들을 포획하는 거대한 덫이었던 것이겠죠. 여기서는 《반시대적 고찰 Ⅰ》에서 니체가 보여줬던 ‘속물 교양주의’에 대한 혐오가 떠올랐습니다. 반시대적 고찰에서 니체는 교양을 ‘지속적으로 정당화된 야만’이며, 양식(樣式)의 결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교양을 야만으로 규정하는 것이 이해가 될 듯 말 듯 했는데, 아마 이때도 니체는 19세기 독일의 교양인들이 창조의 주체가 아니며 문화를 소유하고 소비할 뿐임을 지적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반시대적 고찰》 1, 2권에서 니체가 행했던 교양주의와 역사주의에 대한 비판은 동일하게 근대국가를 향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개인’에 대해서 말하는 부분에서는 또다시 《즐거운 학문》이 떠올랐습니다. 《즐거운 학문》에서 니체의 주된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 중 하나는 ‘의식’입니다. 이때 니체가 강조하는 것은 의식이 결코 개인으로서의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보증해주는 ‘본질’이나 ‘핵’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의식은 인간에게서 가장 늦게 발달한 것이며, 그것은 우리의 무리본능에 복종한다는 것. 니체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우리의 의식에 들어오는 것은 오로지 비개인적인 것, ‘평균적인 것’”(354절)뿐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개인’이 되는 것은 ‘집단’과 따로 떨어질 때가 아니며, 개인으로서의 ‘권리’를 외부로부터 부여받을 때도 아닙니다. 니체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선과 악을 창조함으로써만 비로소 개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때 창조란 ‘우리의 것이 아닌’ 가치들을 부수는 일을 수반할 것입니다. 니체는 말합니다. 창조하는 자는 자신의 불길로 자기 자신을 태워버릴 각오를 해야 한다고.

다음주에는 2부를 읽고 세미나를 합니다. 《차라투스트라》는 〈거울을 들고 있는 아이〉부터 〈고매하다는 자들에 대하여〉까지(135p~202p) 읽고 오시면 됩니다. 간식은 경아샘께서 맡아주셨습니다. 다음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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