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내어 읽는 니체

<차라투스트라> 2번째 시간 후기

작성자
최계숙
작성일
2018-04-13 23:46
조회
101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2번째 시간

1부를 함께 읽고 토의했다. 토의 시작에 앞서, 니체의 <이 사람을 보라>를 잠깐 보았다. 니체 스스로가 왜 차라투스트라인지 묻고, 대답하는 부분이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선과 악의 투쟁에서 사물의 움직임의 본연적인 바퀴를 처음으로 본 사람이며, (중략) 가장 숙명적 액운인 도덕이라는 오류를 창조해냈으며 따라서 그는 그 오류를 인식한 최초의 사람이지 않으면 안된다. (중략)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차라투스트라가 어떤 사유가보다 더 진실하다는 것이다. (중략) 차라투스트라는 사유가 전체를 모두 모아놓은 것보다는 더 많은 용기를 지니고 있다. 진리를 말하고 활을 잘 쏘는 것. 이것이 페르시아적 덕이다. 내가 이해되는가? 진실성에서 나오는 도덕의 자기 극복, 도덕주의자들의 자기의 대립물로의 자기 극복-내 안으로의 자기 극복- 이것이 내 입에서 나온 차라투스트라라는 이름이 의미하는 바이다. - 이사람을 보라

 

늘 그렇듯이 니체의 설명은 친절하지는 않았다. 선과 악의 투쟁부분이나 왜 이자가 누구보다 용기있는 사유를 한 것인지 와닿지는 않았다. 다른 번역본의 주석에서는 역사상의 인물인 조로아스트 교조 차라투스트라가 선과 악, 신과 악마라는 이원론을 주창한 것과는 달리,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일원론을 주창했다고 한다. 즉 니체가 쇼펜하우어와 바그너를 극복했듯이 차라투스트라는 조로아스터를 자기 극복해 새롭게 변화한 존재라고 풀이되어 있었다.

나는 도덕의 자기 극복이 사유의 진실성에서 나온다는 니체의 서술이 인상적이었다. 어떤 지식이나 지혜와 같은 앎에 기반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의 태도 혹은 능력으로 해석된다. 도덕의 자기 극복이란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말고 자신의 사유의 진실성을 끝까지 밀어붙여, 도덕의 어떤 경계에서 서있을 때 스스로 몰락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지 않을까.

본격적인 토의에서는 연민, 적과 벗, 이웃에 대해 가장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다. 연민은 나에 대해서도 상대에 대해서도 이롭지 않으며, 힘 의지를 약화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논의가 많았다. 적과 벗에 대해서는 적이 될 수 없는 벗은 벗이 아니며, 벗이 될 수 없는 적은 적이 아니라며 결국 적과 벗은 같은 것을 말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이에 반해 이웃과 벗을 비교한다면 이웃은 동일성이 확인되는 집단과 같은 것으로, 벗은 그런 동질적인 이웃과는 달리 자기자신으로 환원될 수 없는 존재를 말한다고 한다. 또한 힘 의지를 고양하는지를 보아야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나에게는 힘 의지에 대한 논의들이 어떤 연립방적식을 푸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변수에 힘 의지라는 값을 대입하니 강자, 약자, 벗, 연민 등등 다른 미지수가 풀리는 듯한. 다른 분들은 힘 의지에 대해 존재의 역량이 커지는 느낌, 활동 능력, 스피노자 식으로 푼다면 능동적 기쁨과 같은 것이라고 자기 만의 해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아직 거기에 미치지 못하니 벌어지는 격차로 여겨진다. 니체의 언어들에 대해 생생하게 표현할 나의 언어를 갖고 싶다.

 

일체의 글 가운데서 나는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피로 써라 그러면 너는 피가 곧 넋임을 알게 될 것이다. 낯선 피를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책을 뒤적이며 빈둥대는 자들을 미워한다. (중략) 피와 잠언으로 글을 쓰는 사람은 그저 읽히기를 바라지 않고 암송되기를 바란다. -읽기와 쓰기에 대하여

 

피로 쓰여진 니체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그의 낯선 피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빈둥대며 읽혀지지 않는 최선의 방법으로 그는 암송을 말했을 것이다. 암송이란 신체기관을 통해 발화되는 것이고 외워야 한다. 외우기 위해서는, 글쓴이의 사고를 흉내내고 그의 문장을 연습하고 그것을 순간적으로 재현해내야 가능하다. 우리 세미나에서 ‘소리내어’ 읽는 이유는, 그것이 그나마 최고로 간접체험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으로서가 아니었을까. 니체의 글은 읽는 이를 계속 낯설게 하고 또 다양하게 변주하는데, 그것에 대해 나의 입으로 말해지는 순간 왜 그렇게 도식적으로 느껴지는 것일까. 힘에의 의지는 ‘봉우리와 봉우리를 잇는’ 니체라는 산줄기의 가장 짧은 길인가. 나에겐 힘에의 의지를 대입해 니체의 개념들을 착착 풀어가는데 대한 저항감이 있다. 그렇게 풀어가는게 현재로선 어떤 기쁨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미나 후반부에서 위버멘쉬를 언급하면서 기존의 가치를 깨려한 니체의 노력에 대해, 우리는 자신의 기존의 가치들을 깨고자 하는데 동의가 된 것인지, 무엇 때문에 깨려하는지 자신의 대답을 가지고 있는지 고민해 보자는 제언이 있었다. 대표로 말씀하신 분은 삶의 어려움과 변화의 필요성에 대한 깨우침을 공부의 이유로 말씀하셨다. 주역 계사전에 나온다는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窮則變, 變則通, 通卽久)...즉,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며, 통하면 오래간다는 뜻과 통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전체 3

  • 2018-04-15 00:41
    니체의 언어와 계숙샘의 언어가 벌이는 전쟁같은 사랑. . 아. . . @.@

  • 2018-04-15 08:51
    “니체의 글은 읽는 이를 계속 낯설게 하고 또 다양하게 변주하는데, 그것에 대해 나의 입으로 말해지는 순간 왜 그렇게 도식적으로 느껴지는 것일까” 정말 공감합니다ㅠㅠ
    힘에의 의지에 대해서는, 저도 그게 어디에나 들어맞는 마스터키처럼 쓰인다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거론하지 않고 넘어가자니 해석이 안 된다는 이유로 회피하는 것 같고... 어떻게 우리만의 해석을 가질 수 있을지...힘의지를 설명해놓은 다른 책이라도 같이 읽어볼까요...?

    • 2018-04-15 11:06
      오오! 들뢰즈씨가 썼다는 니체 힘의 유형학! 니체와(!!!) 철학!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꽈? 같이 읽어보면 좋겠네요!

      근데 말입니돠 왜 '힘에의 의지'를 마스터키처럼 쓰면 안되는거죠? 지금 시절에 해석할때 유용한 마스터키로 쓰고 마스터키를 씹어먹고 그걸로 들어맞지 않는 구멍이 생기면 저절로 마스터키가 아닌게 되는거 아닌가요! 마스터키를 상정해둔다는 전제를 경계해야한다는 건가요?

      계숙쌤 후기를 읽으니 생생하게 떠오르는 그날의 현장! 양치기에서 니체를 읽는(읽기만) 아줌으로 거듭나 살짝 기뻤습니다. 니체씨를 낯선 육성으로 들으며 읽어나가니 다르게 다가오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