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nking Monday

"들뢰즈와 함께 읽는 철학사" 3강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8-03-15 12:04
조회
104
흄-2

‘흄’ 하면 경험주의죠. 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도 고등학교 윤리 시간에 경험주의의 대표적인 철학자라고 배우셨을 겁니다. 합리주의의 데카르트와 경험주의의 흄. 일반적으로 합리주의와 경험주의는 “관념 속에는 의미 속에 없는 무엇 또는 감각적인 것 속에 없는 무엇이 있는가 라는 질문에 긍정적인 다변을 하느냐 부정적인 답변을 하느냐에 따라” 정의됩니다. 유동적인 감각과 경험의 배후에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선험적인 인식능력이 있느냐 하는 질문. 물론 이것은 가능한 구분입니다. 그러나 들뢰즈는 이러한 구분이 경험주의 철학이 지닌 실천적 힘을 설명하기에는 불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들뢰즈에 따르면 경험주의는 이와는 다른 ‘비밀들’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들뢰즈는 흄의 철학을 SF에 비유합니다. 들뢰즈는 우리가 “흄에게서 마치 공상과학에서처럼 다른 창조자에 의해 제시된 허구적이고 기묘한 어떤 낯선 세계의 인상을 받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이러한 세계란 이미 우리의 세계이며 또 이때의 다른 창조자란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예감을”(〈흄〉) 받게 된다고 말합니다. 흄의 철학은 너무나 낯선,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고 우리 자신이 구성하고 있는 세계를 펼쳐낸다는 것이죠. 들뢰즈는 흄의 ‘관념 연합론’을 적극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이러한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지난 시간에도 언급되었지만, 연합론은 우리의 앎이 경험으로부터 획득된 것들을 결합시킨 결과물임을 말하는 이론입니다. 이로부터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우리의 의식, 사물의 속성, 과학의 질서, 학문 … 쉽게 말해 ‘세계’는 심리적 요인에 근거하여 ‘구성된’ 것이라는 점입니다. 세계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경험의 단편들을 이어붙이는 방식에 따라 다르게 출현한다는 것.

들뢰즈가 파악한 연합론의 핵심은 ‘관계는 그 항들에 외적’이라는 것입니다. 가령 ‘피에르는 폴보다 작다’에서 ‘피에르보다 큰 폴’, ‘폴보다 작은 피에르’라는 각각의 규정을 만들어내는 ‘관계’는 어디에 있나요? 그것은 폴에게도 피에르에게도 내재해있지 않습니다. 규정성을 만들어내는 ‘관계’가 그 항들에 외부적이라는 것. 이러한 사유는 ‘비밀스러운 경험주의적 세계’를 열어놓습니다. “접속사 ‘그리고’가 동사 ‘이다’의 내성의 자리를 빼앗는 세계”(〈흄〉). 그 자체로 어떠한 규정성도 지니지 않는 미결정적인 항들(원자들)의 접속과 절단에 따라 “매번 갱신되는 픽션과도”(채운샘 강의안) 같은 세계. ‘그리고’의 세계에는 관계 이전의 본질도, 기원도, 의미도, 목적도, 어떤 종류의 ‘백지상태’도 없습니다. 때문에 여기서 제기할 수 있는 질문은 ‘그것은 무엇인가’가 아니라 ‘그것은 어떻게 기능하는가’이며, 이때의 철학이란 ‘시원’과 ‘목적’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어떻게 어리석음과 독단에서 벗어날 것인지를 탐구하고 실험하는 일입니다.

루크레티우스

흄에 대한 보충 강의를 듣고, 루크레티우스에 대해서도 잠깐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기원전 1세기 로마의 철학자였던 루크레티우스. 에피쿠로스의 후계자였던 그는 〈사물의 본성에 대하여〉라는 책을 써서 에피쿠로스의 철학을 정교화하고 확장했다고 합니다. 그가 자기 철학의 핵심적 과제로 삼은 것은 ‘거짓된 무한’에 대한 고발이었습니다. 그에 따르면 인생의 최고 목표는 쾌락의 증진과 고통의 경감인데, 이때 쾌락의 가장 큰 장애물은 고통이나 결여가 아니라 ‘망상’입니다. 인간의 불행은 스스로의 유한성을 직시하지 못하고 죽음, 사랑, 삶, 행복 등에 ‘영원성’의 표상을 덧씌우는 데서 비롯됩니다. 루크레티우스는 철학(=자연학)을 통해 우리가 세계에 덧씌운 표상을 해체하고 유한한 삶을 ‘유쾌하게’ 사는 길을 모색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루크레티우스에게는 흄과 유사한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에피쿠로스주의자인 루크레티우스는 기본적으로 감각을 신뢰했습니다. 가령 대상과 나의 거리에 따라 그것의 윤곽이 동그랗게 보이기도 하고 네모나게 보일 때, 우리는 그 대상의 본질을 우리의 감각이 왜곡하고 있다고 생각하죠. 그러나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은 감각은 상황마다 참되게 인식하며, 그 사물은 동그랗게 보일 수 있는 측면과 네모나게 보일 수 있는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때 이성이 하는 일은 감각적 인상들을 ‘일관되게’ 정리하는 일입니다. 왜곡은 감각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성에 의해서 행해집니다. 이성은 감각을 선개념(프롤렙사이즈)으로 환원합니다. 각각의 참된 감각적 인상들에 ‘의견’을 덧붙임으로써 세계를 하나의 통일적 형식에로 소급시키는 것이죠.

‘자연학phusiologia’이 요청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에피쿠로스학파의 자연학은 자연에 대한 ‘대상적 앎’이 아닙니다. 자연 전체에 대한 하나의 정합적인 앎에 도달하는 것은 그들의 관심이 아니었습니다. 퓌지올로지는 “주체를 자유로운 주체로 변형시키는 한에서의 자연에 대한 앎”입니다. 이들이 보기에 자연이란 “다양한 것의 생산”이었습니다. 요소들의 접속과 절단에 의해 매번 다르게 생산되는 총체로서의 자연. ‘그리고’의 자연. 이러한 자연(=다양한 것의 생산)은 ‘일자’나 ‘전체’와 같은 관념을 통해서는 도달 불가능합니다. 이런 의미의 자연에 대한 앎(phusiologia)은 우리의 이성이 만들어내는 거짓된 통일성, 영원성, 무한성 등의 ‘신화’로부터 삶을 구출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다음주에는 루크레티우스를 본격적으로 만나보고, (드디어) 들뢰즈가 소개하는 니체를 만나볼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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