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nking Monday

"들뢰즈와 함께 읽는 철학사" 4강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8-03-20 14:30
조회
140
(1) 자연, 다양한 것의 생산

‘자연’이란 무엇일까요? 에피쿠로스적 논제에 따르면 자연이란 ‘다양한 것들의 생산’입니다. 좀 의외의 정의죠. 우리는 흔히 자연을 인간(인위)와의 대립 속에서 생각하고, 발전을 향해 달려가는 문명과 달리 멈춰 있는 무엇으로 표상하죠. 그러나 에피쿠로스와 루크레티우스에 따르면 자연은 관습과도, 규약과도, 발명과도 대립하지 않습니다. 사실 모든 것은 자연이죠. 인간도, 인간이 만들어낸 것도,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사회적 규약들조차도. 그렇다면 자연은 무엇에 대립할까, 루크레티우스에 따르면 자연은 신화에 대립합니다.

에피쿠로스학파가 말하는, 신화에 대립하는 자연에 대해 알아볼까요. 고대 원자론자들의 우주는 원자와 허공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최소 단위인 원자와 원자들의 운동을 가능하게 하는 허공. 존재하는 모든 것은 허공 속에서의 원자의 운동으로부터 파생됩니다. 이들의 자연에는 어떤 초월적인 것도 없습니다. 원자와 허공이 만들어내는 세계 ‘이전’이나 ‘바깥’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어떤 목적이나 의미, 법칙도. 때문에 이들에게 자연이란 부분들을 결정짓고 요소들 사이에 위계를 부여하는 ‘중심’이나 ‘총체’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요소들을 전체화하지 않으며, 부분들의 작용에 의해 매번 새로워지는 합입니다.


(2) 편위 clinamen

원자와 허공의 세계, 어떤 초월적인 힘도 개입하지 않는 내재적인 세계. 그렇다면 이런 세계에서 원자들의 운동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원자들의 우연한 결합일 뿐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능동성과 자유를 말할 수 있을까요? 에피쿠로스학파는 운동의 근거를 원자의 내부에 설정함으로써 이러한 문제를 넘어갑니다. 에피쿠로스와 루크레티우스에 따르면 원자들은 자신의 무게로 인해 허공에서 낙하운동을 하는 동안 “아주 불특정한 시간, 불특정한 장소에서 자기자리로부터 조금 단지 움직임이 조금 바뀌었다고 말할 수만 있을 정도로” 비껴납니다. 원자들의 내재적 경향인 편위, 미세한 경로이탈, 이것이 우리를 존재하고 운동하게 하는 근거입니다.

처음 편위 개념에 대해 들었을 때, 저는 ‘뭐 이렇게 무책임한 개념이 있나’하고 생각했습니다. ‘불특정한 시공간에서의, 원자의 미세한 비껴남’ 이 한 마디로 모든 것을 퉁쳐버려도 되나? 그렇다면 모든 것은 ‘우연’이라는 알 수 없는 영역으로 환원되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어쩌면 ‘뭔가 더’를 요구했던 저는 관념론자였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편위는 분명 우연성을 표현하는 개념이지만, 그것은 우리의 ‘의지’나 ‘자유’를 불가능하게 하는, 우리가 흔히 표상하는 것과 같은 의미의 ‘무질서’와 동일시 될 수는 없습니다. 편위 개념의 핵심은 ‘우발적 마주침’을 야기하는 힘이 우리 바깥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원자들은 단지 충돌의 반작용으로만 운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 내재한 힘에 의해 경로를 바꾼다는 것. 따라서 원자들의 결합물인 우리는, 우리가 마주치는 모든 우연적인 순간들 안에서 우리의 의지, 역량, 능동성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

편위 개념에 따르면, 능동적으로 산다는 것은 능동적으로 자신의 경로를 이탈하는 일입니다. 이로부터 능동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자신을 고집하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이 도출됩니다. 우리를 찾아오는 우발적인 마주침들을 외면하거나 부정하지 않고도 자유를 말할 수 있는 것이죠. 루크레티우스의 세계는 ‘원자 내리는 세계’입니다. 그러나 직선운동에 종속되어 수직으로 낙하하는 비가 아니라, “내리던 원자들이 온 방향으로 튕겨지며 찬란한 불꽃처럼 저마다의 궤도를 그리는 빛의 축제”(채운샘 강의안). 저는 강의를 듣던 중 얼마 전 영화 세미나에서 봤던 요리스 이벤스의 《비》가 떠올랐습니다. 이 영화는 비가 내려와 표면(강물, 도로, 창문, 고인 물 등등)에 부딪치고 파장을 일으키는 장면들을 연달아 보여주는데, 어쩐지 루크레티우스 유물론의 이미지와 어울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혹시 궁금하신 분들은 링크를 타고 들어가서 보세요~ 아름답습니다ㅎㅎ(https://www.youtube.com/watch?v=eNNI7knvh8o)


(3) 실천-철학으로서의 원자론

앞서 에피쿠로스-루크레티우스의 자연에 대립되는 것이 ‘신화’라고 이야기했었죠. 이때 이들이 말하는 신화란 인간의 표상이 만들어내는 ‘거짓된 무한’에 다름 아닙니다. 저는 에피쿠로스가 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에피쿠로스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의 존재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죠. 다만 에피쿠로스는 신을 ‘신화화’하는 것에 반대했습니다. 우리의 표상을 덧씌워 신을 ‘인격화’하는 것. 상벌의 관념을 도입하고 그를 숭배하는 것에 반대했습니다. 에피쿠로스는 말합니다. “대중들의 신을 거부하는 사람이 아니라 신들에게 대중들의 견해를 귀속시키는 사람이 불경한 것”이라고.

신을 믿지 않더라도 우리는 끊임없이 ‘신화’를 만들어내죠. 원자들의 끊임없는 결합과 해체로서의 세계에 ‘영원성’의 관념을 도입하는 것. 특정한 상태가 영원할 것이라고 믿는 것. 채운샘이 설명해주신 바에 따르면 ‘영원성’에 대한 믿음이란, 단순히 영원한 무엇이 있다고 믿고 그것을 추구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형태로만 드러나는 것은 아닙니다. 달라진 조건 속에서 자신의 익숙함만을 고집하거나, 변화를 거부하는 것. 이것도 말하자면 영원성에 대한 믿음의 일종이 아닐까요. 이는 ‘자연’에 대한 우리의 무지이고, 이러한 무지 속에서 우리가 만들어내는 거짓된 무한성은 슬픔의 원인이 됩니다.

들뢰즈가 루크레티우스에 주목했던 것은, 그의 원자론이 얼마나 ‘과학적’인가 하는 관점에서가 아니라, 원자론적인 세계-해석을 통해 그가 얼마나 실천적인 문제를 제기하는가 하는 관점에서였습니다. 들뢰즈에 따르면 루크레티우스의 “자연주의가 지니는 가장 깊은 불변의 성격들 중 하나는 그 자체가 슬픔인 모든 것을, 슬픔의 원인이 되는 모든 것을, 자기 능력의 실행을 위해 슬픔을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고발하는 일”입니다.


* 지난 시간 후반부에 샘께서 다루신 니체에 대해서는 다음주 후기에서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주엔 니체에 대한 본격적인 강의를 들을 예정입니다~ 결석하실 수 없겠죠ㅎㅎ 다음주에 뵙겠습니다 ^^!
전체 2

  • 2018-03-21 11:33
    영원성(신화) VS 우연성(자연)의 대립인가요? 오! 요리스 이벤스의 <비>에서는 빗방울과 온갖 표면이 마주치는 장면이 나오는군요. 흑백인데도 너무 다채로와서 뿅!

  • 2018-03-22 12:13
    요리스 이벤스 <비> 조아요! 들뢰즈의 시네마를 잘 활용하고 계시는군요 ㅎㅎㅎㅎ 들뢰즈와 시네마, 시네마와 거놔의 만남.....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