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nking Monday

"들뢰즈와 함께 읽는 철학사" 5강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8-03-30 11:56
조회
109
1. 비판과 계보학

“니체의 가장 일반적인 기획은 철학에 의미와 가치 개념을 도입하는 데 있다.”(들뢰즈)

니체는 ‘가치평가’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철학’을 내부로부터 전복시킵니다. 기존의 철학(형이상학)이 문제 삼았던 것은 ‘어떻게 참된 인식에 이를 것인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이데아나 물 자체에 도달하는 것. 이때 인식은 ‘참된 인식’이라는 목적에 종속됩니다. 형이상학은 늘 이렇게 질문하죠. ‘~란 무엇인가?’ 대상의 본질을 묻는 질문. 그러나 니체가 보기에 인식이 도달해야 할 참된 실재 같은 것은 없습니다. 니체가 바라보는 세계는 본질과 현상, 대상과 인식, 정신과 신체 등등이 깔끔하게 구분되어 질서 지어져 있는 세계가 아니었기 때문이죠. 힘들의 전쟁터. 그 자체로 복수적인 힘들의 부단한 상호작용. 그것이 니체의 자연이었습니다. 따라서 니체에게 모든 현상은 본질에 종속된 외관이 아니라, “실제적인 힘 속에서 의미를 표현하는 기호 혹은 징후”(채운샘 강의안)였습니다. 니체는 자연으로부터 물 자체가 아니라 힘들의 투쟁의 역사를 봅니다.

니체에게 인식이란 하나의 힘입니다. 인식은 세계를 해석하고 가치평가함으로써, 다시 말해 탈취하고 소유함으로써 그것을 출현시킵니다. 인식은 그 자체로 힘들의 투쟁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죠. ‘대상세계’와 바깥에서 그것을 조망하는 인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힘들의 투쟁의 결과로서의 해석과 가치평가들이 있습니다. 때문에 니체는 ‘~란 무엇인가?’라는 전도된 질문을 ‘누가~’, ‘무엇이~’로 대체합니다. 이러한 질문 형식은 “특정한 퍼스펙티브에서 실재적 힘들의 운동에 주목하는 유물론적 질문”(채운샘 강의안)입니다. ‘참이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누가 참을 원하는가’, ‘누가 말하는가’. 말하는 주체가 아니라, 그러한 세계-해석이 내포하고 있는 힘의지에 대한 질문. 그것은 노예의 부정적인 힘의지를 표현하고 있는가, 주인의 긍정적인 힘의지를 표현하고 있는가?라는 질문.
그런데 분명 이는 단순히 인식의 대상이 ‘진리’로부터 ‘힘’으로 옮겨졌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들뢰즈에 따르면 니체는 “의미와 가치의 철학이 비판이어야 함을 전혀 숨기지” 않았습니다. 니체의 철학은 ‘주어진’ 가치들, “생을 구속하고 생을 불구로 만들고” 생을 길들이는 사상에 대한 ‘총체적인 비판’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니체적 비판은 칸트의 그것과 구분됩니다. 칸트는 “내재적 비판을 총체적으로 파악”했으나, 그것을 실행하지는 못했습니다. 칸트는 진리와 도덕 자체를 위험에 빠트리는 대신 진리와 도덕에 대한 ‘주장’들을 비판함으로써, 진리와 도덕을 이성으로부터 보호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는 여전히 본질의 세계를 전제한 채로 그것에 대한 해석들과 싸웠던 것이죠. 이에 비해 니체는 ‘가치’의 관점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함으로써 도덕과 진리의 자명성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행합니다.

니체의 비판은 사변적 논리를 둘러싼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윤리적인 문제를 함축하고 있죠. 니체의 비판은 ‘반동적인 힘들’과의 투쟁이었습니다. “너는 악하다. 그러므로 나는 선하다”라는 메커니즘을 통해 작동하는 부정적 힘들과의 투쟁. 생을 부정하고 생보다 우월한 가치들에 의존하는 노예적 해석들과의 싸움.


2. 영원회귀

삶을 긍정한다는 건 뭘까요? ‘긍정’은, 치열하게 따져보지 않고 무책임하게 쓰게 되는 말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분명 노예도 긍정합니다. 노예에게 긍정이란 자신이 짊어지고 있는 가치들의 무게로부터 비롯되는 것이지요. 차라투스트라의 경우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에게 긍정이란 “가볍게 하는 것, 살아 있는 것의 짐을 덜어주는 것, 춤추는 것, 창조하는 것”입니다. 니체를 따라서 우리도 ‘누구의 긍정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달라도 너무나 다른 두 긍정 사이에는 ‘영원회귀’의 개념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영원회귀는 니체의 가장 유명한 개념 중 하나지만, 그가 실제로 영원회귀에 대해 쓴 것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마저도 비유로서 암시될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니체 연구자들이 이 개념에 달려든 것은, 그만큼 영원회귀에 함축된 사유가 매력적이라는 뜻이겠죠? 우선 영원회귀는 무엇이 아닌가. 니체는 영원회귀를 통해 영원한 순환의 이미지, 동일한 지점으로의 영원한 회귀, 전체의 회귀, 시간의 제거나 초월을 표현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영원회귀의 세계란 “강도로 이루어진 세계, 차이의 세계로서, 그것은 일자나 동일자를 가정하는 세계가 아니라 반대로 동일한 자아의 폐허 위에서, 유일신의 무덤 위에서 건설되는 세계”입니다. 채운샘의 설명을 통해 가까스로 이해한 바에 따르면 영원회귀에 대한 사유는 ‘나’는 다른 모든 것과 더불어서만 나일 수 있음을 긍정하는 일을 함축합니다. 세계는 무한한 차이와 더불어 동일한 것으로 되돌아온다는 것. ‘지금 이것’이 되돌아오는 것은 어떤 ‘본질’이나 ‘법칙’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것도 동일하지 않고 무엇도 같은 방식으로 반복되지 않는다는 사실로부터 비롯된다는 것.

들뢰즈가 주목한 철학자들의 공통점은 ‘동일성’을 미리 전제하지 않고서 윤리의 문제를 사유했다는 데에 있는 것 같습니다. 패치워크와도 같은 세계를 사유했던 흄, 원자들의 경로이탈(편위)로부터 모든 것들의 생겨남을 사유했던 루크레티우스, 그리고 차이들의 영원한 회귀를 사유한 니체. 들뢰즈는 우리가 ‘윤리’라고 부르는 초월적인 가치의 구도를 버릴 때, 다시 말해 우리가 스스로의 동일성을 정초하고 있는 전제들을 의심할 때 윤리가 시작된다고 생각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베르그손과 칸트를 만나보도록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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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3-30 14:44
    강도로 이루어진 세계, 차이의 세계. 이 봄이 그 어떤 봄과도 다름을 실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