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nking Monday

"들뢰즈와 함께 읽는 철학사" 6강 후기

작성자
황지은
작성일
2018-04-05 10:27
조회
122
이번 시간에는 저번 시간에 이어 니체의 영원회귀에 대한 들뢰즈의 사유를 만나보고, 칸트로 넘어갔습니다. 먼저 니체를 보실까요!
1. 니체와 들뢰즈

1) 영원회귀, 차이와 반복

들뢰즈는 영원회귀 개념을 ‘주사위 던지기의 두 계기'로 비유하는데, 주사위 자체 보다는 던져짐과 떨어짐이라는 두 행위에 초점을 맞춰 설명합니다. 우선 ‘던져짐'은 “통제의 거부” 그리고 “우연과 다양체에 대한 긍정”입니다.(채운샘 강의안) 이 때 들뢰즈가 말하는 ‘다양체, 다양성'은 수적인 것이 아닌 ‘차이의 개념'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매 번의 던져짐 마다 우연한 계기들이 작동하면서 이전의 던져짐과는 전혀 다른 던져짐이 구성된다는 것. 이에 반해 ‘떨어짐'은 “통일성의 조직화의 계기”입니다.(채운샘 강의안) 요소들이 매번 다르다고만 말하는 것은 카오스나 다름이 없을텐데요, 들뢰즈는 그 차이들이 어떻게 일정한 통일성으로 조직되는가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차이와 동일성의 관계. 영원회귀는 매번의 ‘차이'(우연)를 통해 ‘새롭게 생산’(필연)되는 전체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존재는 그저 ‘동일한 형태’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힘들이 매번 바뀌면서 유지되는 ‘힘들의 차이의 종합 및 힘들의 재생산의 종합’입니다. 매번 ‘-됨'으로서 존재하기. 따라서 기존의 철학이 동일자를 주어진 것으로 보고 그것들의 차이를 사후적으로 도출했다면, 들뢰즈는 차이 자체를 사유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인가'가 아닌 ‘이것이 어떻게 이것으로 발생하는가?’를 질문하기.

2) 긍정하고 활동하는 존재

니힐리즘은 기존의 사유에서부터 그 지평이 나아가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존재도, 가치도, 세계도 모두 주어졌다고 받아들이는 사고, ‘던져짐’이라는 사고의 부재. 지금 나의 현존이 ‘이미 달성된 목적’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 우리는 ‘불만, 불안, 걱정, 죄책감’ 등에 끌려다니게 됩니다. 나의 현존은 어떤 역량의 표현이며, 일정한 관계 즉 힘들의 차이 속에서 드러난 결과입니다. 니체는 힘들의 차이를 긍정하는 것이 진정한 기쁨이라고 말합니다. 들뢰즈는 니체를 통해 슬픔의 정서에 반하는 투쟁에까지 나아가는데요, 이 지점에서 스피노자와 만나게 됩니다. 스피노자는 ‘사회적 평면 위에서 어떻게 기쁨의 실천이 일어날 수 있을까'라는 실천적 질문을 제기하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존재가 어떻게 존재하는지’의 문제를 넘어 ‘사회 속’에 살아가는 개체로서 어떻게 기쁨을 ‘실천’할 것인지를 물은 것입니다.

2. 칸트와 들뢰즈

1) 유한한 합리적 존재

이름만 들어본 칸트...를 이번 기회를 통해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습니다! 칸트는 현대철학의 시작이라고 불리는데요, 그 이유는 바로 철학 안에서의 내재적 비판을 가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중세 철학은 이성이 우리의 경험 밖에 있는 초월적 존재(신)를 인식할 수 있다며 이성의 우월성을 강조했는데요, 칸트는 이러한 사유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성이 ‘모두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그러니까 이성에도 한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어쨌든 이 시공간 밖에 있는 무엇을 경험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칸트는 우리의 경험 밖에 있는 것을 이성이 사유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독단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이성 자체를 사유하며 형이상학의 원천 범위 한계를 규정하려 했습니다. 어디까지를 우리가 규정할 수 있고, 불가능한 것들을 어떻게 버릴 것인가. 또한 이성을 어떻게 올바르게 사용할 것인가, 어떻게 이성의 사용을 통해 완전한 존재에 이를 수 있을 것인가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니체는 칸트의 이러한 접근을 비판합니다. 칸트의 질문은 ‘어떤 조건에서 인식이 발생하는가?’에서 머물렀으며 그 조건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묻는 지점까지는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는 유한한 합리적 존재를 상정하고, 어떻게 이성의 사용을 통해 완전한 존재에 이를 수 있는가를 물었습니다. 이성 자체를 의심하지 않고 ‘더 올바른 이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장엄한 도덕체계'를 향해 나아가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의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은 결과적으로 그것을 승인하는 권력을 옹호하는 것으로 나아가며 이는 도덕주의로 귀결되기 때문이죠.

칸트는 ‘주체, 자연, 이성'을 전제하지 않는 흄의 철학이 ‘독단론의 잠에서 해방시켜주었다'고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흄이 나아가지 못한 지점을 비판했습니다. 흄이 연합론을 주장하며 관념 속에서 현상들이 연합하면서 인식이 발생한다고 했다면, 칸트는 그 연합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질문했습니다. 주체가 현상들을 연합할 수 있는 법칙을 가지고 있어야 인식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칸트의 질문은 인식이 정초되는 방식, 즉 인식능력의 매커니즘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들뢰즈가 보기에 칸트는 인식이 발생하는 근거를 질문하는 데까지는 나아갔지만, 주체의 생성을 묻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습니다. 흄은 관념의 연합을 통해 ‘나'라는 주체가 생성된다는 지점까지 나아간 반면, 칸트는 또 다시 주체의 동일성을 전제했다는 것이죠. 칸트는 ‘인식하는 주체의 능력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질문하고, 그 답으로 인식의 능력들(감성, 상상력, 오성, 이성)이 서로 조화되고 서로를 치환하며 특정 목적을 달성한다고 말합니다. 이 답에는 ‘자아의 동일성'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자아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의 질문이 부재했던 것이죠.

2) 초월론적 경험론

하지만 들뢰즈는 칸트에게서 중요한 개념을 빌려오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초월론적 지평'입니다. 경험의 조건이지만 그 자체가 경험은 아닌 지점. 칸트는, 중세 철학자들처럼 ‘초월자' 내지 ‘신'에 의지해 경험 ‘위'나 ‘밖'에서 경험을 구성하는 근거를 찾는 대신에, 경험 ‘이전'에 어떻게 우리의 경험이 조건지어지는지를  물었습니다. 채운샘은 씨앗을 예로 드셨는데요, 씨앗이 꽃으로 피기 전에 조건들이 있을 것입니다. 흙, 바람, 물, 햇빛 등. 이것들은 분명 꽃을 피게 하는 조건이지만, 우리가 그것들을 꽃의 조건으로서 경험 하는 것은 아닙니다. 비슷한 예로 푸코의 ‘에피스테메'(역사적 선험성) 개념이 있습니다. 에피스테메는 특정한 시공간의 담론들의 집합입니다. 담론들을 형성하게 하는 조건이라고 할 수 있겠죠. 에피스테메, 즉 조건은 형성되어 있는 담론들과 분리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꽃을 피우게 하는 조건들이 꽃 자체와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경험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닌 것이죠.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칸트는 인식의 근거를 질문했지만, 인식의 근거로서 다시금 자아를 소환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반면 들뢰즈는 ‘경험론적 사유', 전제를 가지지 않고 ‘발생적' 관점에서 질문하는 사유의 지평 속에 있습니다. 주체가 무엇이냐고 묻는 대신 그것이 어떻게 구성되는가를 질문하는 것. 합리론은 주어진 것으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결국 그 주어진 것을 견고하게 만들 수 밖에 없습니다. 칸트는 ‘신’을 제거했지만 그 자리에 ‘생각하는 주체’를 '주어진 것'을사 위치시켰습니다. 이와 달리 경험론은 발생에 대해 묻습니다. 경험론은 '주어진 것'에서 출발하는 대신 그것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질문하고, 그것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다시 물으며, 나아가 기존의 전제에 균열을 가하고 관념들의 변화가능성을 묻는 지점에까지 이릅니다.

경험론은 사유를 감각으로부터 시작하게 합니다. 감성적인 것의 특권. 에피쿠로스 또한 감각이 아니라 이성이 우리를 기만한다고 했었죠. 니체 또한 취향, 감각을 중시하는데, 그는 이것을 힘이라고 부릅니다. 니체는 우리가 가치를 내재한 상태로부터 인식한다고 하는데요, 그 출발점은 감각입니다. ‘힘을 어떻게 감각하는가’로부터 세계를 해석하게 되고, 그것으로부터 어떤 것의 가치를 평가하게 됩니다. 감각으로부터 출발해 앎의 영역을 사유하는 것. 오랫동안 서양의 형이상학은 감각이 우리를 속이고 인식을 방해한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들뢰즈는 반대로, 니체와 스피노자를 따라 ‘신체성의 복권'에 주목합니다.

‘발생적'인 것과 '감각'을 모든 인식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 이것은 동일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차이를 의미합니다. 감각적인 것의 핵심은 ‘매번 다르다'입니다. 어떤 동일성을 도출해 내는 것은 우리의 인식이지 매번의 감각이 아니죠. 우리는 매번 다르게 감각하지만 인식을 통해 다른점을 생략하면서 같은 것이라고 간주하게 됩니다. 감각을 도외시하면서 인식을 견고하게 만드는 것이죠. 예술은 감각적인 것으로부터 출발해 감각을 예민하게 확장시킵니다. 반면 우리는 감각이 우리에게 전달하는 차이성을 점점 간과하고 사물을 특정 방식으로 규정합니다. 아름다운 것, 추한 것, 부드러운 것, 거친 것 등등의 익숙한 범주로 매번의 다른 감각들을 환원시켜버리는 것이죠. 우리는 이를 통해 '상식'을 형성합니다. 하지만 예술가들은 이러한 규정성을 허물어 버리죠. 존 케이지는 ‘아름다운’ 소리란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는 온갖 사물들을 가지고 ‘소음'을 만들어 냅니다. 그는 폭죽을 터뜨리고, 욕조의 물을 다시 주전자로 퍼내는가 하면, 피아노 앞에서 아무 연주를 하지 않기도 합니다. 아무것도 연주하지 않는 ‘침묵'의 상태에서 몸의 움직임의 소리나 관객들의 기침 소리 등으로 공연하기. 이는 '음악'에 대한 우리의 규정성을 해체합니다.

이렇게 코드화 되기 이전의 세계, 초월적 지평을 도입하는 것은 우리의 인식이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우리는 어떻게 이것을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게 되었는지를, 즉 인식의 발생조건을 근원적으로 묻기 위해서입니다. 꽃을 두고 꽃이 무엇인가를 분석하거나 꽃의 '바깥'에서 꽃을 피게 한 초월자를 믿는 것이 아닌, 꽃과 그 꽃을 피게 한 근거(조건)를 사유하는 것. 이 지점에서야 꽃이 왜 지는지, 그 변화조건 또한 사유할 수 있습니다. 즉 들뢰즈가 ‘차이’에 대해 말할 때에는 결과로서 나타난 차이들이 무엇인지를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차이를 만들어낸 조건, 즉 ‘발생의 내적 차이’를 묻는 것입니다. 이것은 강도의 세계입니다. 이미 분절된 존재들의 결과론적 차이 이전의 지평은 분할될 수도, 분할된 것이 전체로 환원될 수도 없습니다. degree의 세계. 예를 들면 길이 같은 단위는 10cm와 10cm의 물질을 이어붙이면 20cm가 되지만, 온도 같은 단위는 10℃와 10℃의 물질을 붙여놓는다고 해서 20℃가 되지 않는 것처럼요. 우리가 감각하는 것은 힘, 강도의 차이입니다. 무언가가 발생한다는 것은 그것을 발생하는 힘의 차이로부터 비롯됩니다. 니체적으로 말하자면 ‘힘의지'에 대해 사유하는 것이 바로 ‘초월론적 경험론'입니다.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이것이 이것으로, 저것이 저것으로’ 드러나게 하는 연기조건에 대한 이해. 들뢰즈는 이 초월적 지평을 칸트로부터 빌려왔지만, 칸트와 달리 그것을 ‘발생적 차이’를 묻는 근거로 사용합니다.

다음시간에는 칸트의 나머지 부분을 보고 베르그손으로 넘어갈 예정입니다 ㅎㅎ
전체 2

  • 2018-04-05 12:48
    씨앗이 꽃으로 피기 전, 온갖 차이들이 춤추는 세계를 통과하는 거로군요. @.@

  • 2018-04-05 13:29
    흐윽 뭔가 어렵고도 중요한 강의를 놓친 것 같군요ㅠㅠ 들뢰즈는 '초월적 지평'을 경험을 규정하는 초월적 심급으로 삼지 않고 경험으로 현실화되기 이전의 잠재적인 평면(?)으로 보았군요. 칸트로부터 빌려온건지 칸트를 전복시킨 것인지...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