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nking Monday

"들뢰즈와 함께 읽는 철학사" 7강 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8-04-13 08:22
조회
114
칸트, 미학

지난 시간에 이어 이번 시간에도 들뢰즈의 칸트를 만나보았습니다. 예전 들뢰즈 강의 때 채운샘께서 들뢰즈 존재론의 혁명성은 생성을 말했다는 데에 있지 않고, 생성(차이)과 존재(동일성)를 동시에 설명했다는 데에 있다고 말씀하셨던 게 기억납니다. 아마 들뢰즈의 ‘초월론적 경험론’을 이와 같은 측면에서 이해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들뢰즈는 칸트로부터 ‘초월론적 지평’을 훔쳐왔습니다. 그런데 사실 칸트의 초월론적 지평이란 경험적 영역의 모방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칸트가 ‘발생’의 차원을 사유하는 대신, ‘주어진 것(자아의 동일성)’으로부터 출발하여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추상했기 때문이죠. 결과적으로 칸트의 초월론적 지평은, 경험을 조건 짓는 것이 경험된 것(자아)을 그 근거로 삼는, 역설적인 개념이 되고 맙니다. 때문에 칸트의 비판은 주어져 있는 것들을 강화하는 보수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이에 비해 들뢰즈는 칸트의 ‘초월론적 지평’을 ‘발생의 차원’으로 전유합니다. 이때 들뢰즈가 말하는 초월성이란 동시에 잠재성이기도 하고 차이이기도 합니다. 경험된 것, 존재하는 것, 현실화된 것의 배후에는 ‘동일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차이 자체’가 있다는 것이 들뢰즈의 초월론입니다. 이때 들뢰즈가 말하는 발생적 차원이란 장자에서 말하는, 모든 상대적 차이들(동일성을 보증하는 외연적 차이들)이 무화되어 버리는 ‘만물제동(萬物齊同)’의 차원과 유사한 개념일 것입니다. ‘형성된 것’을 매번 빠져나가고 경험적 세계의 동일성을 해체하는 생성의 차원이 동시에 우리의 경험을 조건 짓는다는 것. 모든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사물들이 ‘만물제동의 세계’로부터 비롯된다는 것. 이것이 들뢰즈의 초월론적 경험론이 아닐까요.

들뢰즈는 이를 ‘감각’과 ‘느낌’의 차원을 통해 설명합니다. 가령 초록색에 대한 인식은 ‘초록’이라는 대상과 그것을 인식하는 우리 감각의 규정성으로부터 비롯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노랑과 파랑이라는 변별적 관계에 의해 초록을 인식합니다. 그러나 이때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변별적 요소들은 무의식적인 것으로 인식의 대상이 아니죠. 우리의 감각을 출현시키는 것은 ‘차이’입니다. ‘뜨겁다’ ‘차갑다’라는 감각을 발생시키는 것은 특정한 온도가 아니라 온도들 사이의 차이입니다. 들뢰즈는 이러한 발생적 차원을 ‘미세 지각’ 혹은 ‘순수 지각’이라고 부릅니다. 세잔과 같은 예술가들은 이러한 미세 지각의 차원을 열어내는 것, 즉 우리의 경험적 감각을 해체하는 것을 과제로 삼았습니다. 그는 생 빅투아르 산을 부단히 응시함으로써 경험적 차원의 형태와 색채를 해체했죠.

자연스럽게(?) 들뢰즈의 칸트 미학으로 넘어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들뢰즈의 칸트 연구의 핵심은 ‘상이한 마음의 능력들이 어떻게 일치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칸트는 지성과 감성이라는 상이한 마음의 능력들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리고 상상력이 이 두 능력을 매개한다는 도식작용론을 펼칩니다. 그러나 상상력이 지성을 이끌어서 감성과 일치시킨다는 도식 작용론은, 상상력이 지성의 입법적 역할에 의해 규정된다는 점에서 모순을 일으킵니다. 칸트는 여기에서도 능력들의 일치라는 경험 가능성의 주관적 조건을 제시할 뿐, 그것이 어떻게 ‘발생’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던 것이죠.

들뢰즈는 이를 칸트의 예외적인 개념인 ‘숭고’를 가져와서 해결합니다. 숭고의 대상은 비교를 허락하지 않는 크고 많은 것입니다. 이런 대상은 객관적으로 존재가능하지 않으며, 이때의 대상이란 “자연의 어떤 대상의 표상이, 자연이 [이성의 이념에] 도달할 수 없음을 이념의 현시를 달성한 것이라고 마음이 생각하게끔 규정할 경우 그 대상”을 말합니다. 숭고란 이념을 현시하려는 이성과 감성적 직관의 한계에 부딪혀 좌절하는 상상력의 불일치를 가리킵니다. 칸트는 이를 ‘이성과 상상력의 싸움’으로, 병리적이며 수동적인 상태로 설명했습니다. 이에 비해 들뢰즈는 바로 이러한 “싸움(불일치)로부터 능력들은 서로를 극한까지 밀어붙이고 영감을 얻도록 고취하는 식으로 일치를 이루게”(채운샘 강의안) 됩니다. 미리 규정된 일치가 아닌, 능력들의 불일치로부터 발생하는 자유로운 일치.

이로부터 “인식능력의 고유한 실행은 강요받는다는 데 있다”(안 소바냐르그)는 결론이 따라나옵니다. 들뢰즈에게 초월성이란, 즉 능력들의 일치를 가능하게 하는 transcendental한 지평이란, 인식능력의 극한입니다. 인식능력 바깥에서 그것을 정초해주는 선험적 원리가 아니었던 것이죠. “따라서 초월성은 어떤 인식능력의 자율성을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고장나는 지점을 보장해주며, 이로써 초월성은 어떤 ‘탈구작용’이”(채운샘 강의안) 됩니다. 때문에 인식은 자신의 극한에 대면하기를 강요당함으로써만 기능합니다. “저지당하고 분노했을 때 사유는 어떤 기호에 촉발되어 깨어나고, 급박하고 준비되지 않은 상황 속에서 자신을 깜짝 놀라게 만든 갑작스러운 사건에 응답하고자 자신의 모든 수단을 결집”(안 소바냐르그)시킵니다. 사유란 인식능력의 안정적인 균형을 깨트리는 폭력으로부터 기인한다는 것. 저는 얼마 전 ‘영화X’ 세미나에서 함께 보았던 이창동 감독의 《시》가 떠올랐습니다. 주인공 미자는 자신의 손자가 저지른 성폭행에 의한 동급생 희진의 자살이라는, 기존의 인식의 테두리로 환원되지 않는 폭력적인 사건에 직면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폭력적인 사건을 직시하는 동안, 이전에는 아무리 쓰려 해도 써지지 않았던 시를 쓰게 됩니다. 미자는 시 쓰기를 강요당했던 걸까요?

베르그송

다음으로는 베르그송을 만나보았습니다. 베르그송 또한 칸트 만큼이나 까다로운 철학자인 것 같습니다. 물론 까다롭지 않은 철학자가 어디에 있겠느냐만...... 베르그송은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참된 문제를 제기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 잘못 제기된 문제와 싸우는 것을 철학의 과제로 이해했습니다. 우리는 참된 답, 거짓된 답에 대해서는 늘 이야기하지만 질문에도 참된 질문과 거짓된 질문이 있다는 생각은 잘 하지 않습니다. ‘팩트체크’(즉 무엇이 참된 답인지를 가려내는 일)를 그렇게 좋아하지만, ‘팩트는 무엇이냐’라는 질문이 정말로 잘 제기된 질문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죠. 베르그송에 따르면 진정한 자유란 훌륭한 답들을 소유하는 데 있지 않고, “문제 자체를 결정하고 구성할 수 있는 능력”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답이란 잘 제기된 문제 안에 이미 내재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답을 구하는 것은 제기된 문제로부터 그것을 ‘발견’해내는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에 비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단순한 발견이 아니라 발명”(베르그송)입니다.

베르그송 철학의 본질적인 주제는 “부정에 대한 비판과, 거짓문제의 원천으로서의 모든 부정의 형식들에 대한 비판”이었습니다. 베르그송은 우선 우리가 상식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비존재’, ‘무질서’, ‘가능성’의 관념에 대해 비판합니다. 우리는 흔히 존재와 질서가 비존재와 무질서보다 선행한다고 생각합니다. 존재의 결여로서 비존재를 사유하고 질서의 부정으로서 무질서를 사유하는 것이죠. 또한 실존이 가능성보다 더 크다고 착각합니다. 우리가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은 이러한 상식적인 전제에 의존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베르그송이 보기에 “둘이나 그 이상의 환원불가능한 질서가 있다는 것을 보지 않고, 무질서에 대립되고 무질서의 관념과 상관관계에 있다고 생각되는 질서의 일반 관념만을 고수할 때” 무질서의 관념이 생겨나고, “서로 끊임없이 대체되는 상이한 실재들을 파악하지 않고, 오직 무와 대립되고 무와 관련될 수 있을 뿐인 ‘존재’ 일반의 등질성 속에서 실재들을 혼동할 때” 비존재의 관념이 나타나며, “각각의 실존물을 그것의 새로움 속에서 파악하기는커녕 실존의 총체를 미리 형성된 요소와 관련지을 때”(들뢰즈) 가능성의 관념이 생겨납니다. 즉, 상이한 질서들 사이의 질적인 차이를 질문하지 않고 질서/무질서의 이분법에 의존할 때, 끊임없이 차이화하는 실재의 운동을 보지 않고 존재/비존재의 구분에 사로잡힐 때, 가능성을 현실화된 것으로부터 역추적할 때 우리는 ‘거짓된 문제’를 제기하게 됩니다. 사실 이는 인간의 지성이 지닌 경향이기도 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그송은 지성 안에서 그것의 또 다른 경향, 즉 직관과 비판을 어떻게 불러일으킬 것인지를 고민했다고 합니다.

직관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경험적 복합물들에 대한 나눔의 방법입니다. 인식의 오류는 “복합물들을 그 자연적 마디/분절에 따라 나누는 것, 다시 말해 본성상의 차이를 보이는 요소들로 나누는 것”(들뢰즈)으로부터 비롯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는 우리가 경험의 복합물을 구별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는 데에서 기인합니다. 우리는 지속과 현존을, 물질과 기억을, 회상과 지각을 구별하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 가령 우리의 지각은 뇌의 간격으로 인해 늘 ‘빼기의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포착하는 게 아니라, 그로부터 우리의 주위를 끄는 요소들만을 특화하는 것이죠. 이때 물질과 기억이 뒤엉키게 됩니다. 우리는 기억에 의해 범주화된 채로, 그 본성적 차이들이 소거된 채로 물질을 지각하게 되는 것이죠. 이로부터 우리는 대상에 대한 우리의 가치평가(기억)과 대상 자체(물질)를 혼동하게 됩니다. 따라서 ‘무엇이 더 아름다운가?’ 같은 방식의 질문을 던지게 되죠. 이때 직관을 발휘한다는 것은 경험상태를 넘어서 경험의 조건으로 나아가는 일입니다. 이때의 질문은 ‘나는 왜 이것을 아름답다고 느끼는가’를 질문하는 일일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베르그송과 스토아 주의에 대한 강의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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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4-15 00:50
    사유란 인식능력의 안정적인 균형을 깨트리는 폭력으로부터 출현한다니, 연인의 배신을 겪으며 '사랑'에 대한 사유를 시작했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도 떠오릅니다. 아무튼, 과연, 음, 어렵군요, 베르그송의 자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