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nking Monday

"들뢰즈와 함께 읽는 서양 철학사" 8강후기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8-04-21 16:32
조회
128
늦은 후기 죄송합니다ㅠㅠ 이번 주에는 베르그손과 스토아 학파를 만나보았습니다.

베르그손

차이란 무엇일까요? 연구실에서 공부를 하다보면 ‘차이’라는 말을 자주 쓰게 됩니다. 차이와 생성.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는 아무런 의미부여도 않던 단어들인데, 어느새 습관적으로 이 말들을 입에 올리고 있네요. 그러나 막상 차이가 무엇인지, 생성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고 그저 어디에나 적용될 수 있는 해답처럼 남용하고 있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베르그손은 차이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베르그손이 선배 철학자들에 대해서 본질적으로 비판하는 점은 그들이 ‘본성상의 차이들’을 놓쳐버렸다는 점이었습니다. 베르그손에게 차이란 무엇이었을까요? 분명 이때의 차이란 너와 나의 차이 혹은 더와 덜의 차이는 아닐 것입니다. 베르그손이 말하는 ‘본성상의’ 차이가 무엇인지, 한 번 알아보도록 하죠.

들뢰즈의 해석에 따르면 베르그손에게 차이란 양적인 것도 질적인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존재의 근저에 있는 운동”(채운샘 강의안)입니다. 베르그손(과 들뢰즈)의 고민은 차이를 그 자체로 정립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A를 B와 비교함으로써만, 상대적으로 차이를 인식합니다. 혹은 차이를 존재에 대해 외재적인 것으로 생각하죠. 이때 차이화란 A와 A'가 만나 스스로를 지양함으로써 B에 이르게 되는 과정으로 이해됩니다. 즉 차이란 존재에 대한 부정이 되는 것이지요. 동일성에 대한 지양으로서의 차이. 이런 관점들은 차이 자체를 말하지는 못합니다. 상대적인 비교나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 사후적으로만 차이에 접근하지 못하게 되죠.

차이를 이렇게 볼 수밖에 없는 것은, 우리가 존재를 주어진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존재가 차이에 선행한다는 생각. ‘나’의 어떤 고유한 본질이 먼저 있고, 그로부터 변화/성장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이러한 고정된 존재의 운동이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생각. 베르그손은 이와 반대로 생각했습니다. 그가 생각하기에 본성에 있어서 차이를 만드는 것은 사물들도, 사물들의 성질들도 아닌, ‘경향들’입니다. 베르그손이 생각하기에 우리가 ‘주어진 것’으로 간주하는 모든 것들은 바로 이 ‘경향들’의 운동의 결과물이었습니다. 채운샘께서는 존재를 ‘막’으로 비유해주셨습니다. ‘안’에 있다고도 ‘밖’에 있다고도 할 수 없는 ‘막’처럼 스스로를 차이화하며 끊임없이 외부와 소통하는, 그리고 그 소통 자체인 존재들. 세계에는 고정된 실체도, 운동의 외재적인 원인도 없습니다. 내재적인 경향들의 운동, 그리고 그 운동과 구분될 수 없는 결과물들이 있을 뿐이죠.

참된 차이란 바로 이 경향들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인식하는 사물들, 이미 형성된 것들은 경향들의 표현이며, 이들 사이의 정도상의 차이란 “경향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후 자신들의 기초적인 원인들 속에서 취해진 사물들이 갖게 되는 위상”(〈차이의 개념〉)입니다. 그러니까 사실은 존재가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차이가 존재를 생산하는 것이죠. 우리가 경험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오직 복합물들, 닫힌 것과 열린 것의, 기하학적 질서와 생기적 질서의, 지각과 감정의, 지각과 기억의 복합물일 뿐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본성상의 차이’를 그 자체로 인식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경향들의 차원(=본성적 차이의 차원 = 생의 약동)이 경험을 규정하는 동시에 경험에 외재적인 선험적 조건은 아닙니다. “그것들은 순수한 것이면서 동시에 체험되는 것, 살아 활동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체험되는 것, 절대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체험되는 것”입니다.

채운샘은 이를 동양의 ‘도(道)’에 비유하셨습니다. 도는 우리가 손에 쥘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경험세계로부터 떠나 있는 무엇도 아닙니다. 도는 똥 덩어리에도 있지만 똥 덩어리 자체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러한 ‘도’ 혹은 ‘생의 도약’의 차원을 사유해야 할까요? 제 생각에 그것은 ‘주어진 것’에 종속되지 않기 위해서인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의 신체는 어떤 주어진 것도 없는 차원에서 능동적으로 환경을 문제화함으로써 적정 체온을 유지합니다. 주어진 것에 안주하여 문제를 구성하지 못한다면, 기온의 변화에 따라 온도가 시도 때도 없이 바뀌게 되겠죠. 우리의 정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식은 대상에 대한 주체의 관조가 아니라 경향들의 운동이 만들어낸 결과물이겠죠. ‘사유’한다는 것은 주어진 것을 견고하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문제를 구성하는 일입니다. ‘도’의 차원을 사유한다는 것은 ‘도’라는 실체에 대한 사변적 앎을 구성하는 일이 아니라, ‘주어진 것’에 대한 고착을 넘어 ‘사유’를 시작하는 일입니다.

스토아학파

현대철학의 과제는 플라톤주의를 극복하는 것이었습니다. 변하지 않는 초월적 실재인 이데아와 그것의 카피로서의 구체적인 현실 세계를 구분했던 플라톤. 그런데 들뢰즈에 따르면 플라톤주의의 핵심은 이데아와 그것의 모사물 사이에 구분을 수립하는 데에 있지 않고, 모사물들 사이의 계보를 수립하고, 이데아를 닮지 않은 것들(시뮬라크르들)을 추방하는 데에 있었습니다. 즉 플라톤은 ‘이데아’를 도입함으로써, 우리의 구체적인 경험세계를 분류하고 위계화할 수 있었던 것이죠. 더 나아가 이러한 분류의 최종적인 목표는 ‘정의로운 주장자’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된 주장자’를 몰아세우고 ‘환영의 존재’를 추방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뮬라크르를 추방한다는 플라톤의 기획은 역설적이게도 시뮬라크르, 즉 무엇도 닮지 않은 것에 특정한 지위를 부여해줍니다. 시뮬라크르는 아무리 쫓아내려 해도 쫓아내지지 않는, 그 자체의 고유한 실존을 지닌 채 오히려 모델(이데아)의 개념 자체를 의문시하기에 이르는 실재가 됩니다. 이에 따라 플라톤은 철학의 편집-우울증적 형식을 탄생시키게 되죠.

이번 주에 살펴보았던 스토아 학파는 이데아와 가상의 구분을 대신해서 물체적인 것과 비물체적인 것의 구분을 제시함으로써 ‘사건’ 개념을 사유했습니다. 들뢰즈는 이들을 ‘표면의 철학자’라고 규정합니다. 어째서 표면인가 하니, 이들은 비물체적인 것을 닿을 수 없는 높이에 위치시켰던 플라톤과 달리, ‘표면’에 자리 잡게 했습니다. 이들에게 있어 비물체적인 것이란 모든 것의 초월적 원인이 아니라 오히려 표면의 효과이며, 본질이 아니라 사건이었던 것이죠. “모든 것이 모든 것 안에 그리고 도처에”있다고 말하는 이들은 플라톤적인 나눔의 방식에 따라 윤리를 수립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 안에 있으므로, 하나의 혼합물이 다른 혼합물보다 좋거나 나쁘다고 말할 근거는 없습니다. 깊이와 높이에서 표면으로. 모든 것은 사건, 즉 표면의 효과입니다. 사건이란 무엇일까요?

“칼이 살을 벨 때 칼이 만들어내는 것은 새로운 성질이 아니라 새로운 부대물이다. 즉 베어진다는 부대물이다. 부대물은 어떤 실질적 성질도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언제나 동사에 의해 표현된다. 즉 그것은 존재(물체, 사태)가 아니라 존재방식(사건)이다. …이 존재방식은 말하자면 존재의 극한, 표면에서 등장하며, 그 존재의 본성을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작용을 가하는 것도 받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작용을 받는 것은 작용을 받는 물체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순수하게 그리고 단순하게 하나의 결과이며, 존재들 중의 어느 하나로 규정할 수 없는 하나의 효과이다… 스토아학파는 처음으로 존재함의 두 수준을 단호히 구분했다. 하나는 심층적이고 실재하는 존재함의 수준이고, 다른 하나는 표면에서 발생하는 비물체적인 무한한 복수성의 수준이다.”(에밀 브레이어)

칼과 살의 마주침. 이러한 물질적 차원의 결합이 생산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스토아적인 관점에 따르면 그것은 존재가 아니라 존재방식입니다. 풀 안에 빵이, 그리고 빵 안에 풀이 있다고 생각했던 스토아학파에게 살과 칼의 만남에서 생산되는 것은 새로운 성질일 수 없습니다. 이들에게는 삶과 죽음조차도 대립적인 것이 아니었죠. 이때 생산되는 것은 ‘베어짐’이라는 ‘부대물’ 혹은 ‘효과’입니다. ‘살인’ 혹은 ‘자살’이라는 비물질적 차원의 표면효과가 생산되는 것이지요. 이때 ‘살인’ 혹은 ‘자살’이라는 표면효과는 물체적 차원의 ‘칼+살’과 동일시 될 수 없습니다. ‘성장’이라는 사건은 커진 몸의 상태와 동일시 될 수 없는, 물체적 차원의 운동의 표면효과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스토아학파는 존재함의 두 수준을 구분합니다. 부단한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는 ‘원인들의 그물망’으로서의 물체적 차원과, 그 표면효과로서의 비물체적 차원. 이러한 독특한 인과관계 속에서 우리가 특권을 부여하고 있는 비물체적 차원은 이제 단지 ‘효과’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이때의 ‘표면효과’는 플라톤이 추방하고자 했던 시뮬라크르 그 자체입니다. 무엇도 모방하거나 지시하는 바가 없는 탈물질적 효과들.

이러한 스토아학파의 '사건' 개념이 지닌 윤리적 함축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알아볼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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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4-21 21:15
    차이가 존재를 생산한다니 크...ㅋㅋ 생산되는 존재, 주체 이런것들은 아무리 들어도 참 와닿기가 힘든것 같아요 허허 그래도 열심히 이해하려고 노력해볼랍니당 후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