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nking Monday

"들뢰즈와 함께 읽는 철학사" 9강 후기

작성자
호정
작성일
2018-04-29 14:29
조회
104
이번 시간에는 지난 시간에 이어 스토아 학파의 사건 개념과 그들의 도덕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들뢰즈와 푸코에 따르면, 현대 철학의 과제는 플라톤주의의 전복입니다. 플라톤은 현상세계를 원본(이데아)의 모방으로 보았습니다. 들뢰즈가 보기에 플라톤의 핵심은 현상계의 위계를 수립하고 원본 없는 것들(시뮬라크르)을 추방하는 것이었습니다. 들뢰즈는 이것을 복권시키고자 했습니다. 시뮬라크르를 어떻게 복권시킬 것인가? 어떻게 생성을 중심으로 사유할 것인가? 그는 스토아 학파의 철학으로부터 이를 설명할 수 있는 길을 끌어왔습니다.

스토아 학파는 본질-가상의 구분을 대신해서 물체-비물체의 구분을 제시합니다. 스토아 학파에게는 영혼도 물체이며, 물체는 어떤 본질적인 것의 사본이 아닙니다. 물체적인 것들은 무수한 인과연쇄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물체적인 것들은 원인과 결과가 아니라, 능동과 수동만 존재하는 세계입니다. 물체적인 것들을 원인으로 발생하는 세계가 비물체의 세계입니다. 비물체는 허공, 장소, 시간과 같은 것들, 그리고 언어로만 표현 가능한 것들입니다. 순간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표정, 피고가 하나의 문장(선고)에 의해 죄인이 되는 순간 등은 오로지 언어로만 표현 가능한 것들, 즉 사건입니다.

물체와 비물체의 구분을 통해 스토아 학파가 드러내고자 한 것은 인과관계의 완전히 새로운 배치입니다. 이들은 이데아를 본으로 하여 만든 현상세계라는 기존의 원인-결과 관계를 해체하고, 원인을 원인들에 연결시키고 원인들 사이의 연결(운명)을 생각해냅니다. 스토아 학파에게 플라톤의 이데아란 존재도, 비존재도 아닌, 열외-존재extra-being로, 사물의 표면에서 발생하는 이차적인 존재일 뿐입니다. 물질적인 차원에 속하지 않는 것은 단지 효과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이제 모든 것이 표면으로 올라옵니다. 스토아 학파에서 중요한 것은 표면, 즉 사건의 차원, 의미의 차원입니다.

들뢰즈는 두 가지 이유로 스토아 학파에서 사건과 의미의 층위를 가져왔습니다. 첫째는 시뮬라크르입니다. 이것은 이 세계를 이데아에서부터 설명하지 않고, 발생하는 것을 그 자체로 긍정합니다. 물체 차원의 모든 것은 인과연쇄에 의해 일어납니다. 모든 것들은 자연의 차원에서 인과연쇄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운명을 이해하는 것이고 자연의 섭리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비물체, 즉 의미입니다. 자연의 차원인 물체에 비해, 비물체인 의미는 문화적 차원입니다. 우리는 물질을 지시하는 언어, 주체의 의지를 표명하는 언어라는 표상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언어와 물체의 층위를 나누는 것입니다. 들뢰즈는 언어의 존재론을 새롭게 사유하고 싶어합니다. 물체적인 것과 바로 직결되지만, 물체 그 자체는 아닌 언어. 즉, 물체의 표면에서 발생하는 언어, 사건의 차원에서 언어를 사유하고 싶어했습니다.

사건과 의미

스토아 학파는 역설을 언어분석의 도구로, 동시에 사건들의 종합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습니다. 역설paradox는 평행하다는 의미의 para와 하나의 견해라는 doxa가 합쳐진 것으로, paradox는 어떤 견해가 다른 견해들과 나란히 간다는, 의미의 다방향성을 말합니다. 유머처럼, 말해진 것을 벗어나지는 않지만, 말해진 것에 국한되지 않는 방식입니다. 말을 깨버리는 것이 아니라, 열어주는 것입니다. 의미란 사물이나 명제가 아니라 사건과 관계하는 것입니다. 의미는 언제나 이중의 의미이며, 관계에 있어 올바른 방향이 있다는 것을 부정합니다. 의미는 결코 원리나 시원이 아닙니다. 생성의 차원과 연결돼서 의미는 생산되는 것입니다. 선어록에 보면 ‘부처는 무엇입니까?’ ‘부처는 똥막대기다.’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사실, 똥막대기라는 대답에는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똥막대기라는 것이 갖고 있는 선험적인 의미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 대답은 ‘부처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이 전제하고 있는 것을 깨는 것입니다. 즉 ‘부처가 있다. 부처는 뭐다’라는 우리 사유의 전제들을 확 열어버려 질문을 무화시키는 것입니다. 선문답은 다 말들의 세계입니다. 말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말을 하면서도 말들에 갇히지 말자는 것입니다. 동서양 철학 모두 언어에 대한 고민이 있습니다. 언어는 기본적으로 분별인데,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언어를 통해 어떻게 분별적 사고를 넘어갈 것인가라는 고민을 하게 됩니다. 여러 방향으로 열린 언어에 대한 예는 유머와 시, 선문답들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건은 물체들을 1차적인 원인으로 하고, 또 다른 사건을 2차 원인으로 합니다. 하나의 벌어진 일만으로는 사건이 안 되고, 다른 류의 또 다른 사건들과 계열화가 이루어져야 사건의 의미가 생깁니다. 구로자와 아키라의 라쇼몽이라는 영화를 보면 무사가 죽은 사건은 먼저, 칼이라는 물체와 무사의 몸이라는 물체의 인과로부터, 다음으로는 산적, 죽은 자의 아내, 사냥꾼 등의 욕망이라는 비물체적 인과로부터 발생합니다. 사건의 의미는 등장인물의 진술에 따라 다르게 구성됩니다. 여기서 물체적 인과는 ‘사람이 죽었다.’로 단순합니다. 이 차원에서는 의미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들 각각의 욕망이 계열화되는 방식이고, 의미는 이 차원에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들뢰즈의 철학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우면서도 핵심적인 것이 ‘선험적인 장’입니다. 선험적인 장은 모든 것이 발생하는 평면으로, 경험적인 것을 가능하게 하는, 그 경험을 통해 주체를 발생시키는 잠재성의 장입니다. 선험적 장은 대상과 주체를 모두 벗어나는 내재성의 순수 평면입니다. 어떤 것 속에 있지도 않고, 어떤 것에 대하여 있지도 않으며, 어떤 대상에 의존하지도, 어떤 주체에 속하지도 않는 절대적인 차원입니다. 어떤 것 속에도 있지 않은 내재성 자체는 생명입니다. 생명은 오로지 잠재적인 것들만을 포함합니다. 생명은 잠재성들, 사건들, 특이성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잠재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결코 실재성을 결여한 것이 아니라, 잠재적인 것 고유의 실재성을 그에게 부여하는 내재성의 평면을 따라가면서 현실화의 과정에 뛰어드는 것입니다. 이때 내재성이라는 의미는 현실화된 것 바깥에 있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생명 자체의 진화과정 속에서 어떤 조건들을 만나 특별하게 생명을 현실화한 것이 나의 생명입니다. 모든 고유한 생명은 잠재성의 현실화이며, 나는 생명이라는 내재성의 하나의 현실화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현실화된 내가 하나의 결과로 존재한다면, 다른 방식의 결과도 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주체화 양식들의 또다른 가능성들을 생각하는 것은 타자와의 관계들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스토아적 모랄 : 사건에 걸맞게 존재하라.

물체에 부대되는 언어로 표현되는 사건의 차원에서 윤리의 문제가 제기됩니다. 의미는 언어의 층위에서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산소와 몸이 결합한 물체적인 차원의 혼합물을 우리가 늙음이라고 언어화했을 때 번뇌가 발생합니다. 늙음을 벌로 의미화했을 때 윤리적인 문제가 제기될 수 있습니다. 현자는 일어나야 할 것이 일어났다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전체 우주섭리를 알지 못 하기 때문에 전체 인과관계를 임의적으로 끊어놓고 거기에 표상을 덧붙입니다. 윤리의 문제는 의미화의 층위에서 발생합니다. 내가 갖고 있는 표상을 잘 활용해서, 의미화를 통해 어떻게 사건을 잘 받아들이냐가 중요합니다.

스토아적 도덕은 우주란 복잡한 자연연쇄에 의해서 일어날 것이 일어났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사건을 그 자체로 원하는 것, 즉 발생하는 것을 그것이 발생하는 한에서 원하는 것에 있습니다. 일어나지 않을 것이 일어났다든지, 너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식으로 잘못된 표상을 덧붙이지 않는 것입니다. 스토아적 현자는 스스로를 준원인과 동일시합니다. 모든 일어난 사건 안에는 내가 하나의 원인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안다는 것입니다. 산다는 것은 곧 삶 속에서 우리에게 닥치는 '사건'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스토아 학파는 사건을 어떻게 표상할 것인가, 그것을 어떻게 원하고 또 선용할 것인가를 사유했습니다. 그런 사유를 통해서 '운명에의 사랑'(amor fati)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들뢰즈가 사건 개념을 펼칠 때 자주 거론하는 사람이 조에 부스케(1897~950)라는 프랑스 작가입니다. 그는 1차 대전 당시 하반신이 마비되었는데, 사고를 사건의 차원으로 도약시켰습니다. 그는 ‘내 상처는 나 이전에 존재했으며, 나는 그것을 구현하려고 태어났다’고 했습니다. 스토아 학파의 도덕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에게 발생하는 일을 불공정하고 부적격한 것으로 받아들이면, 사건은 나에게 상처나 원한이 되고 이것이 바로 비도덕적인 것입니다. 사회가 원하는 도덕에 의해 사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원하는 대로 사는 것이 바로 도덕적으로 사는 것이라는 의미겠지요. 사건의 도덕이란 무엇을 해야 하는, 의무나 당위의 문제가 아닙니다. 좋든 싫든 내게 도래하는 사건을 어떤 태도로 맞이하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조에 부스케는 끔찍한 부상으로 몸을 움직일 수 없었지만 그가 설명하려고 한 것은 ‘이 사건, 나는 그것을 체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이 일을 겪지 않았으면 지금의 내가 없는 방식으로 사는 것이 사건에 걸맞게 존재하는 것입니다. 죽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죽음이 내게 닥친 것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자연의 섭리가 나에게 이런 방식으로 현실화되는 것입니다.

들뢰즈는 현실화되지 않은 잠재적 사건들을 특이성 개념을 통해 사유했습니다. 사건이 지니는 의미는 그 사건의 위치, 즉 이웃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건을 통해 의미를 생성한다는 것은 계열화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특이성들은 문제의 장 안에서 분배되며, 이 장 안에서 발생합니다. 문제는 특이점이 형성하는 계열들입니다. 철학 역시 문제의 장을 구성하고 특이점을 현실화하는 과정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철학은 철학자가 자신의 문제적 장으로부터 구성한 문제들을 자신의 사유로 현실화한 것입니다. 플라톤이 세계를 원본과 카피로 나누고, 얼마나 원본에 가깝게 모사했나에 따라 사본들의 세계를 또 나누는 것에서 우리는 플라톤의 나눔의 방법 안에 있는 문제의 장을 끄집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당시 아테네는 전쟁에서 패배했고, 사람들은 존경하는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모함해서 죽였습니다. 플라톤에게는 진짜 정의를 실현하는 사람들은 안 보이고, 정의로운척하는 사람들만이 보였습니다. 이러한 플라톤의 문제의식이 그의 나눔의 방법에 잠재해 있었습니다. 철학자의 물음이란 그가 전제하고 있는 잠재적 장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잠재적 사건을 사유한다는 것은 발생의 조건을 사유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건이 특정한 방식으로 현실화된다는 것은 조건이 달라지면 다르게 현실화될 수도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사건과 함께 발생하는 의미는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사건의 계열화와 더불어 구성됩니다. 하나의 방향으로 계열화되기 이전의 사건-장은 무의미와 역설의 평면이며, 이 평면을 사고하는 것은 하나의 정답만을 강요하는 철학에 맞서, 도주로를 열어놓는 일입니다. 우리는 철학을 통해 우리의 삶에서 자신의 도주로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매주 듣는 월요 철학 강의도 그 일환이겠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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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4-30 18:15
    사건에 걸맞게 존재하라! 사건을 겪기 전과는 다른 내가 되기 @_@ 넘나 어려운 개념들이 많지만 그게 삶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으니 재밌게 다가오고 그래서 더 이해하고 싶은거 같아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