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nking Monday

"들뢰즈와 함께 읽는 철학사" 10강 후기

작성자
이정수
작성일
2018-05-06 15:19
조회
203
“들뢰즈와 함께 읽는 철학사” 10강, 아쉽게도 마지막 시간이었습니다. 이날은 들뢰즈의 스피노자 독해를 중심으로 채운 샘의 강의가 진행되었고, 전반부에는 이전 시간에 이어 들뢰즈의 언어관에 대한 보충이 있었습니다. 간략히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들뢰즈, 스피노자, 배움) 들뢰즈는 배움이란 시간을 통해 기호를 해독해 나가는 ‘형성과 수련의 과정’이라고 말한다. 스피노자는 우리가 어떻게 ‘부적합한 인식으로부터 적합한 인식으로’ 나아갈 것인지를 고민했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우리 인간은 자기 신체가 다른 것과 영향을 주고받는 과정 속에서 ‘상상적 인식’을 할 수 밖에 없는 존재다. 상상적 인식이란 어떤 것을 우주적 차원의 연관과 질서로부터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가 다른 것을 겪어내는 수동적 방식에 따라 부분적인 차원에서 편협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따라서 상상적 인식은 적합한 인식이 아니다. 하지만 상상적 인식이 그 자체로 오류인 것은 아니다. 문제는 부적합한 인식을 피할 길 없는 우리가 어떻게 이런 인식을 발판삼아 적합한 인식으로 나갈 것인가 하는 것이다. 배움이란 누군가가 지식 또는 진리라고 승인한 것을 고스란히 받아 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적합한 인식으로부터 적합한 인식으로 나가는 사유의 과정이다. 진리에 도달하는 것은 거기에 도달하는 과정과 분리되지 않는다. 사유하는 과정 자체가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

 

(신체와 정신, 그리고 윤리학) 들뢰즈와 스피노자는 우리의 상식과 달리 신체를 정의한다. 그들에 따르면 우선, 신체는 아무리 작을지라도 무한히 많은 입자를 포함하는데, 이 입자들 간의 운동과 정지, 빠름과 느림의 관계가 신체의 개별성을 정의한다. 또한 신체는 다른 신체들을 변용시키거나 다른 신체들에 의해 변용되는데, 이 변용하고 변용되는 능력이 신체의 개별성을 정의한다. 나는 나를 구성하는 무수히 많은 세포들의 관계의 결과로 존재하는 동시에, 신체나 정신의 차원에서 다른 것들에 영향을 미치고 영향을 받으면서 변용되어가는 과정으로 존재한다. 우리는 1차적으로 우리의 신체를 통해 이 세계와 만난다. 스피노자는 이로부터 출발한다. 이 말은 또한 우리 신체에 적용되는 모든 것이 우리 정신에도 적용된다는 말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의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모른다. 들뢰즈도 “당신들은 그 일이 좋은 일이냐 나쁜 일이냐를 떠나서 당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알지 못한다. 당신들은 신체 또는 영혼이 이런 저런 만남, 배치, 구성 속에서 과연 무엇이 될 수 있는지를 미리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변용 능력에 따라 규정되지만 아무도 어떻게 변용될 지 미리 알 수 없다. 변용 능력은 선험적으로 우리에게 내재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오직 스스로의 실험과 시도를 바탕으로 하는 길고 긴 마주침의 작업을 통해서만 자신의 변용 능력을 알 수 있다. 스피노자의 <윤리학>은 도덕과 아무 관계가 없다. 윤리란 주어져있는 선악도 아니고 내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스피노자에게 윤리란 삶의 평면들을 한 고비, 한 고비 현실화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자신의 역량을 실험해 나가는 것이다.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과의 무수히 복잡한 많은 관계 속에서 제한된 방식으로 존재한다. 제한은 나쁜 것이 아니다. 제한 없이 존재하는 것은 우리의 망상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스피노자에게 자유란 우리를 부자유롭게 하는 것이 제거된 상태가 아니다. 그에게 자유란 구성적 역량이다. 제한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어떻게 그 제한이 나를 완전히 수동적으로 지배하도록 놓아두지 않을 것인가, 이것이 스피노자가 말하는 자유다. 신체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로부터 자신의 문제를 구성하라는 말이다. 신체가 마주치는 다른 것들과의 마주침 속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질문해야 한다.

 

(-속성-양태 : 존재의 일의성) 초월성은 신과 양태들 사이에 근원적인 대립을 설정하고, 원인으로서의 신에게 우월성을 부여한다. 이로써 현실세계에는 위계질서가 생겨난다. 스피노자는 이런 이분법적 구도를 깬다. 스피노자의 신은 실체이자 자연이고, 유일하다. 이 바깥에는 다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스피노자는 이 바깥에서 원인을 구하지 않는다. 신은 자기원인이며, 자기의지에 의해 존재한다. 존재하는 것들은 전체 지평에서 보면 그 원인을 자기 내부에 가지고 있다. 반면, 자연 안에 있는 개별적 양태, 개체들은 다른 것들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신 즉 자연이란 그런 양태들이 무수한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펼쳐지는 전체라 할 수 있다. 이제 실존하는 것의 원인은 이 세계 안에 있게 되고, 신은 양태와 분리될 수 없으며 둘 사이에 위계도 없어진다. 이것이 들뢰즈가 말하는 존재의 일의성이다. 신과 양태는 같은 지평에 있으며 신은 양태들을 존재하게 하는 원인이지만, 신 또한 양태들의 무수한 생성변화를 통해 성립하는 것이다. 들뢰즈에 따르면, 전체가 미리 있고 전체를 충족시켜주는 부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는 부분이 결합하는 양상에 따라 그 모습이 바뀌며, 부분과 더불어 그 곁에서 생산된다. 스피노자에게서 신과 양태는 속성을 통해 연결된다. 속성은 신에게 귀속되는 특성이 아니라, 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다. 속성은 무수히 많지만 우리 인간이 파악할 수 있는 속성은 연장과 사유의 두 가지 뿐이다.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속성을 표현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속성은 실체의 본질 뿐 아니라 실체적 현존의 양상인 무한성과 필연성을 표현하며, 또한 속성은 양태들 속에서 스스로를 표현한다. 속성은 자연의 본질을 표현함과 동시에 하나하나의 개별자 속에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일의성 개념이 도출된다. 일의성은 무한한 자연과 유한한 양태가 동일한 형식을 가짐을 뜻하며, 발생적 관점에서 동일한 원인을 가짐을 의미한다. 따라서 자연의 차원이 내는 목소리와 양태의 차원이 내는 목소리는 위계없이 동일한 하나의 목소리가 된다. 유한한 것이 자신의 역량을 통해 신적인 것을 인식할 수 있고 신적인 것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우리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어떤 정념을 겪으며 살 수 밖에 없는데, 정념을 그 발생 조건 속에서 이해하지 못하면 정념에 예속된 삶을 살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유한성 속에서 그 유한성이 발생시키는 정념과 인식의 메커니즘을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정서에 예속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다. 불교의 깨달음 역시 존재조건에 대한 통찰이며, 이를 통해 우리는 유한한 삶을 살지만 그 유한한 삶에 국한되지 않을 수 있다. 그 삶으로부터 출발하되 그 삶 속에서 다른 차원을 구성함으로써 정념들에 예속되지 않는 삶.

 

(역량과 기쁨의 윤리학) 스피노자에 따르면 실존한다는 것은 실존하는 역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개체가 그런 양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그 개체가 그렇게 존재하지 않을 수 없도록 생각하고 행위한다는 것을 뜻한다. 역량은 실존 속에서 드러나는 존재의 본질이다. 자연의 존재 자체가 자연의 역량을 남김없이 드러내는 것이다. 신은 실존하는 만큼 생산한다. 역량이란 변용하고 변용될 수 있는 역량이며, 우리는 그 역량만큼 존재한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아직 내게서 펼쳐지지 않은 무엇인가가 남아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스피노자에 따르면 존재는 언제 어디서나 완전하게, 충만하게 이미 드러난 것이다. 스피노자에게 악이란 “우리의 활동 역량의 감소와 관계의 분해”를 의미한다. 자연 일반에는 선과 악이 없으며 오직 각각의 실존 양태에게 좋은 것과 나쁜 것,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특정 양태에게 무엇이 좋은지 나쁜지는 시도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문제는 우리에게 좋은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실험해보는 것이고, 어떻게 좋은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마주침을 만들어 나갈지 스스로 시도하는 것이다. 모두에게 좋은 것, 모두에게 나쁜 것, 그런 것은 없다. 나에게 독이 될 것인가 약이 될 것인가는 내 신체와 정신의 시험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것이다. 비록 실패하더라도 슬픔에만 빠지지 않으면 우리는 거기서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선도 악도 실체적이지 않으며,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는다. 인간이 성숙하고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제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제약에 구속당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삶에서 이루어지는 시도와 실험만이 어떤 사유를 발명한다. 들뢰즈의 가장 중요한 화두는 바로 “삶”이었다.

 

(들뢰즈와 언어) 우리는 보통 ‘언어’라고 하면 중립성을 가진 무엇인가를 떠올린다. 하지만 원래적인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중립적 언어란 존재하지 않는다. 언어란 기본적으로 그 언어가 사용되는 맥락을 떠나서 그 의미가 선험적으로 결정될 수 없다. 의미는 물질적 상태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다. 의미는 어떤 것에 대해서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결합, 물체적인 차원의 결합에 부대하는 계열들과 함께 발생하는 것이다. 들뢰즈는 “한 유형의 언표는 그 언표가 표현하는 내재적 행위들이나 비물체적 변형과 관련해서만 평가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촘스키가 언어의 외부로 배제해버린 발화자, 수용자, 컨텍스트는 들뢰즈에게는 이미 언어의 내부다. 들뢰즈에 따르면 “모든 언어는 명령어다” Order는 질서이자 명령이다. 엄마가 아이에게 사과를 보여주면서 ‘사과’라고 말할 때 그것은 사과를 지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생긴 것은 사과라고 불러야 한다는 행위를 촉구하는 것이다. 말이란 신체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늘 신체와 연관 속에서 개입하고 신체를 다르게 변형시킨다.

바흐친은 언어를 토대의 반영으로 환원하려는 입장에 반대한다. 언어는 관념적인 것도, 의사소통의 도구도, 상부구조도 아니다. 그에 따르면 언어는 “이데올로기적 환경” 안에 존재하는 “이데올로기적 현상”이다. 이데올로기적 환경이란 “집단의 사회적 의식이 현실화된 것, 물질화된 것, 외부로 표현된 것”이다. 언어와 세계는 나란히 존재하며 세계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중립적 언어’란 없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끊임없이 세계에 개입한다. 모든 언어는 현실 속에서 “가치평가적 액센트”를 부여받는다. 이 액센트는 언제나 복수적이다. 따라서 적대적인 집단이 동일한 언어학적 소재를 갖는 경우, 똑같은 말이 전혀 다른 억양을 갖게 된다. 바흐친은 적대집단의 언어를 구분하는 대신 양자가 어떻게 교환, 전취되는지, 계급투쟁의 공간 속에서 어떻게 기호의 의미가 동요하고 결정화되는지에 주목한다.

다수적 권력은 말이 가지는 동일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들은 대화를 하지만 사실은 독백을 하는 것이며, 자기가 가진 말의 지평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말은 주체와 더불어 생성되는 것이다. 바흐친은 “개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조차도 사회적인 힘들의 생생한 상호작용의 결과”라고 말한다. 바흐친의 정의에 따르면, 자유간접화법이란 ‘체험된 담화’로서, 다른 사람의 담화를 이해하고 거기서 받은 인상을 직접적 형태로 재현하는 것이다. 따옴표 없이 전달되는 말은 내가 이해한 방식으로 변용된다. 모든 언어는 그 배치들이 아주 복잡하게 얽힌 결과, 나의 말과 타인의 말을 구분하기 어렵다. 우리는 소음이 제거된 밀실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아니다. 소음이 끊임없이 대화를 방해하기 때문에 내 말이 너에게 완전하게 가 닿을 수 있는 발화상황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언어는 늘 잉여를 낳고, 의미는 변수와 더불어 생산된다. 의미는 물체적, 비물체적 관계뿐만 아니라 비물질 세계내에서 어떻게 계열화되느냐에 따라서 다방향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 언어의 의미가 다방향이라면, 언어에 대한 윤리적 질문은 ‘중립적 언어를 얼마나 더 잘 의도대로 이해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언어들을 사건과 더불어서 능동적으로 변형시킬 것인가’이다. 철학책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다. 저자의 의도에 가깝게 읽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의 언어를 얼마나 능동적으로 변화시킬 것인가가 문제이다.

 
전체 2

  • 2018-05-07 07:38
    삶의 평면을 한고비 한고비 현실화시키는 과정에서자신의 역량을 실험하기, 이 역량의 실험을 위해 나의 언어를 변화시키기. 이번 후기를 읽고 이 두 가지를 마음에 새깁니다.

  • 2018-05-08 10:16
    후기 너무 잘봤습니다 샘~!ㅎㅎ 한계들을 어떻게 능동적으로 변형시킬 것인가? 저는 자꾸 한계들에 갇혀 옴싹달싹 못한다고만 생각했던것 같아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