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 한강

[대종사] 3~7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18-06-22 01:41
조회
53
子祀·子輿·子犁·子來四人相與語曰:孰能以無爲首, 以生爲脊, 以死爲尻, 孰知死生存亡之一體者, 吾與之友矣.四人相視而笑, 莫逆於心, 遂相與爲友.

 

자사, 자여, 자리, 자래 네 사람이 서로 함께하여 말했다. “누가 능히 태어나기 이전을 머리로 삼고, 생을 등뼈로 삼고, 죽음을 꽁무니로 삼을 수 있는가? 누가 생과 사, 존과 망이 한 몸임을 알겠는가? 나는 그와 더불어 친구가 될 것이다. 네 사람이 서로를 보고 웃고, 마음에 거슬리는 것이 없자 마침내 서로 더불어 친구가 되었다.

 

무위(無爲)는 구절마다 다르게 해석되는데, 여기서는 태어나기 이전의 상태를 말합니다.

고(尻)는 ‘꽁무니’입니다. 실제로 신체의 기운은 머리로 들어와서 척추를 타고 꽁무니로 나간다고 합니다.

 

俄而子輿有病, 子祀往問之. :偉哉夫造物者, 將以予爲此拘拘也! 曲僂發背, 上有五管, 頤隱於齊, 肩高於頂, 句贅指天.陰陽之氣有沴, 其心閒而無事, [+]而鑑於井, :嗟乎! 夫造物者又將以予爲此拘拘也!

 

얼마 후에 자여가 병에 걸리자 자사가 그에게 병문안을 왔다. 자여가 말하길, “위대하구나 조물자여, 나를 이렇게 구부러지게 하였구나! 구부러지는 게 등에 생겨서, 오장이 위에 있고, 턱은 배꼽에 숨겨지고, 어깨는 정수리보다 높고, 상투는 하늘을 가리키는 구나.” 음양의 기가 고르지 않고 흩어졌는데도 그 마음은 편안하여 아무 일이 없는 듯하다. 비틀거리며 뛰어가 우물에 비쳐보며 말하길, “아아! 조물자가 또 나를 이렇게 구부러지게 하였구나!”

 

왈(曰)을 누구에게 붙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는데 이번에는 자여에게 붙였습니다. 만약 자사의 말로 본다면, 여(予)는 이인칭인 ‘자네’의 뜻인 자(子)의 오자로 읽게 됩니다.

 

子祀曰:女惡之乎?

자사가 말하길, “그대는 그것이 싫은가?”

 

:, 予何惡? 浸假而化予之左臂而爲鷄, 予因以求時也., 浸假而化予之右臂以爲彈, 予因以求鴞灸., 浸假而化予之尻以爲輪, 以神爲馬, 予因以乘之, 豈更駕哉! 且夫得者, 時也, 失者, 順也., 安時而處順, 哀樂不能入也. 此古之所謂縣解也. 而不能自解者, 物有結之. 且夫物不勝天久矣, 吾又何惡焉!

 

자여가 말하길, “아니다, 내가 무엇을 싫어하겠는가? 점점 나의 왼쪽 팔뚝을 닭으로 변화시키면, 나는 [바뀐 팔뚝으로써] 새벽을 알릴 것이고, 점점 나의 오른쪽 팔뚝을 총알로 변화시키면, 나는 [바뀐 팔뚝으로써] 새를 구울 것이고, 점점 나의 꽁무니를 바퀴로 변화시키고, 정신작용을 말로 변화시키면, 나는 [바뀐 꽁무니로써 말에] 올라탈 것이니, 어찌 다시 [말을 수레에] 매겠는가! 또 생을 얻는 것은 때에 따르는 것이고, 생을 잃는 것도 때에 따르는 것이다. 때를 편안히 여겨 순종하여 따르면, 슬픔과 즐거움이 들어올 수 없다. 이것이 옛날에 이른바 매달렸다가 풀려나는 것이라 한다. 그런데도 스스로 풀려나지 못하는 사람은 사물에 속박되었기 때문이다. 또 사물이 오래된 시간의 흐름을 이길 수 없으니, 내가 또 무엇을 싫어하겠는가!”

 

침가(浸假)는 ‘점점’, ‘점차적으로’라는 뜻입니다.

신(神)은 정신 작용입니다.

가(駕)는 ‘말 매다’라는 뜻입니다.

득(得)과 실(失)은 우연히 자연의 흐름에 따라 생을 얻고 잃은 것을 말합니다.

안시이처순(安時而處順)을 두 글자로 바꾸면 안명(安命)입니다. 안명에서 명(命)은 생과 사입니다.

천(天)은 천도(天道), 시간의 흐름을 말합니다.

 

俄而子來有病, 喘喘然將死, 其妻子環而泣之. 子犂往問之, :! ! 無怛化倚其戶與之語曰: 偉哉造化! 又將奚以汝爲, 將奚以汝適? 以汝爲鼠肝乎? 以汝爲蟲臂乎?

 

얼마 후에 자래가 병에 걸려서 숨을 헐떡거리다 죽자 그의 아내와 자식이 빙 둘러싸서 곡을 했다. 자리가 조문을 와서 말하길, “조용히 해라! 그만둬라! 변화에 호들갑 떨지 말아라!” 문에 기대어 말하길, “위대하구나 조화여! 또 그대를 장차 무엇으로 만들려 하는 것인가? 장차 어떤 형체로 태어나게 할 것인가? 그대를 쥐의 간으로 만들 것인가? 그대를 벌레의 다리로 만들 것인가?”

 

천천연(喘喘然)은 숨 찬 모양입니다.

단(但) ‘놀래다’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호들갑 떨다’, ‘유난 떨다’로 해석했습니다.

전생 개념은 불교가 들어온 이후에 생겨났습니다. 그 전에는 전생 개념 대신 끊임없는 화(化)에 대한 의식이 있었고, 우(又)는 반복되는 화(化)를 말하는 단어입니다.

쥐의 간, 벌레의 다리가 되는 것은 신체의 변화를 겪는 과정입니다.

 

子來曰: 父母於子, 東西南北, 唯命之從. 陰陽於人, 不翅於父母., 彼近吾死而我不聽, 我則悍矣, 彼何罪焉! 夫大塊載我以形, 勞我以生, 佚我以老, 息我以死. 故善吾生者, 乃所以善吾死也. 今之大冶鑄金, 金踊躍曰 我且必爲鏌釾大冶必以爲不祥之金. 今一犯人之形, 而曰 人耳人耳, 夫造化者必以爲不祥之人. 今一以天地爲大鑪, 以造化爲大冶, 惡乎往而不可哉!成然寐,蘧然覺.

 

자래가 말하길, “부모가 자식에게 동서남북으로 가라고 하면 [자식은] 오직 그 명을 따라야 한다. 음양은 사람에게 다만 부모가 아니니, 음양이 나를 죽음에 가까이 가게 했을 때 내가 그것을 듣지 않는다면 나는 못된 자식일 것이니, 음양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무릇 조물자는 형체를 주어 나를 땅 위에 서게 했고, 생으로써 나를 수고롭게 하고, 노쇠함으로써 나를 편안하게 하고, 죽음으로써 나를 쉬게 한다. 그러므로 내가 생을 좋아한다면 역시 죽음을 좋아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 위대한 대장장이가 금속을 주조하는데, 금속이 뛰어올라 말하길, ‘나는 반드시 막야검이 될 거야!’라 하니, 위대한 대장장이는 반드시 상서롭지 못한 금속으로 여길 것이다. 지금 어쩌다 한 번 사람의 형체에 미친 것을 두고 말하길, ‘사람이 될거야, 사람이 될거야.’라 하니, 무릇 조화가 반드시 상서롭지 못한 사람으로 여길 것이다. 지금 어쩌다 한 번 천지를 커다란 화로로 삼고, 조화를 대장장이로 삼았으니, 어디로 간들 좋지 않겠는가!” 편안한 모양으로 잠들었다 어느 순간 깨어난다.

 

음양과 피조물의 관계를 부모와 자식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悍)은 보통 ‘사납다’는 뜻인데, 여기서는 ‘못된 자식’이라는 뜻으로 사용됐습니다..

대야(大冶)는 조물자입니다..

용약(踊躍)은 ‘폴짝 뛰는 것’입니다.

일범(一犯)은 어쩌다 우연히 한 번 사람의 형체를 타고나게 된 것을 말합니다.

성(成)은 ‘편안한 모양’입니다.

매(寐)는 ‘잠자다’라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화(化)의 과정을 설명하는 단어로 사용됐습니다.

거(蘧)는 ‘어느 한순간’, ‘갑자기’의 뜻입니다.

 

子桑戶·孟子反·子琴張三人相與友, : 孰能相與於無相與, 相爲於無相爲? 孰能登天遊霧, 撓挑無極., 相忘以生, 無所終窮?三人相視而笑, 莫逆於心, 遂相與爲友.

 

자상호·맹자반·자금장 세 사람이 서로 더불어 친구가 되어 말하길, “누가 서로를 사귀지 않는 것으로 서로를 사귈 수 있는가? 누가 서로를 위하지 않는 것으로 서로를 위할 수 있는가? 누가 하늘에 올라 구름에서 노닐고, 무극에서 거닐 것이며, 생을 잊고 마치고 다하는 바를 없게 할 수 있는가?” 세 사람이 서로를 보고 웃더니, 마음에 거슬리는 것이 없어서, 마침내 서로 함께 친구가 되었다.

 

상여어무상여(相與於無相與), 상위어무상위(相爲於無相爲)는 《도덕경》의 위무위(爲無爲, 무위를 행하다)와 비슷한 구절입니다. 여기서는 마음으로 사귀는 경지를 말합니다.

요도(撓挑)는 소요유(逍遙遊)와 같습니다.

 

莫然有閒而子桑戶死, 未葬. 孔子聞之, 使子貢往侍事焉. 或編曲, 或鼓琴, 相和而歌曰: 嗟來桑戶乎! 嗟來桑戶乎! 而已反其眞, 而我猶爲人猗!子貢趨而進曰: 敢問臨尸而歌, 禮乎?

 

얼마 안 되어 잠깐 사이에 자상호가 죽었지만 아직 장례를 치르지 않았다. 공자가 그것을 듣고 자공으로 하여금 조문을 가게 하여 장례를 돕게 했다. 간혹 노래하기도 하고, 간혹 거문고를 타기도 하며 서로 화답하여 노래하며 말하길, “아아, 상호여! 아아, 상호여! 너는 이미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는데 나는 여전히 사람으로 남아 있구나!” 자공이 재빨리 달려가 말하길, “감히 묻건대, 시신을 앞에 두고 노래를 부르는 것이 예()입니까?”

 

막연(莫然)은 아이(俄而)와 같이 ‘얼마 안 되어’의 뜻입니다.

閒 이 글자는 맥락에 따라 간(間)이나 한(閑)으로 읽는데, 여기서는 ‘사이’, ‘틈’이라는 뜻에서 간(間)으로 읽었습니다.

차래(嗟來)는 차호(嗟乎)와 같이 탄식하는 것입니다.

진(眞)은 본래의 모습으로 끊임없는 화(化)의 과정입니다.

의(猗)는 야(也)와 같이 종결형 어조사입니다.

 

二人相視而笑曰: 是惡知禮矣!

 

두 사람이 서로 쳐다보고 웃으며 말하길, “이 인간이 어찌 예()를 알겠는가!”

 

子貢反, 以告孔子, : 彼何人者邪? 修行無有, 而外其形骸, 臨尸而歌, 顔色不變, 無以命之. 彼何人者邪?

 

자공이 돌아와서 공자에게 고하며 말하길, “저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행동을 닦는 게 있지 않고, 형체를 소홀히 하며, 시신을 앞에 두고 노래 부르며, 안색이 변하지 않아 이름할 수 없습니다. 저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외(外)는 ‘소홀히 하다’라는 뜻입니다.

안색이 변하지 않음은 애도하지 않음을 말합니다.

 

孔子曰: , 遊方之外者也., 而丘, 遊方之內者也. 外內不相及, 而丘使女往弔之, 丘則陋矣. 彼方且與造物者爲人, 而遊乎天地之一氣. 彼以生爲附贅縣疣, 以死爲決疣潰癰, 夫若然者, 又惡知死生先後之所在! 假於異物, 托於同體., 忘其肝膽, 遺其耳目., 反覆終始, 不知端倪., 芒然彷徨乎塵垢之外, 逍遙乎無爲之業. 彼又惡能憒憒然爲世俗之禮, 以觀衆人之耳目哉!

 

공자가 말하길, “저들은 이 세상의 바깥에서 노니는 사람들이고, 나는 이 세상의 안에서 노니는 사람이다. 세상의 바깥에서 노니는 사람과 세상의 안에서 노니는 사람은 서로 만나지 않는데, 내가 너로 하여금 조문을 가게 했으니, 내가 실수한 것이다. 저들은 바야흐로 조물자와 함께 짝이 되어 천지 사이의 기운에서 노닌다. 저들은 생을 쓸데없이 붙어있는 혹으로 여기고, 죽음을 종기가 터지는 정도로 생각하니, 무릇 이러한 사람들이 또 어찌 사생(死生)의 이전과 이후의 존재하는 바를 알려고 하겠는가! 다른 사물로부터 [기를] 빌려서 같은 몸에 깃들이게 하니, ()과 쓸개를 잊고, 귀와 눈의 감각에 휘둘리지 않으며, 죽음과 삶을 되풀이하니, 태어나기 이전과 죽은 이후를 알 수 없다. 이 세상의 바깥에서 무심(無心)한 표정으로 방황하며, 의도하지 않은 채 소요(逍遙)한다. [그러니] 저들이 또 어찌 심란하게 세속의 예()를 행함으로써 세상 사람들의 귀와 눈에 보이려 하겠는가!”

 

방외(方外)와 방내(方內)가 대비됩니다. 방외는 세속의 틀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을 말하고, 방내는 예를 따지며 세속의 틀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부췌현우(附贅縣疣)는 혹이 붙은 것으로 생을 하나의 혹이 생겨난 것으로 비유한 단어입니다.결우궤옹(決疣潰癰)은 고름이 차서 터지는 것으로 죽음에 대한 비유입니다. 우쌤은 예전에 사람의 병이 고름이 차서 터짐으로써 병을 고쳤다고 하셨습니다. 삶은 건강이고, 죽음은 병드는 것이라는 인식을 엎어놓는 지점입니다.

 

子貢曰: 然則夫子何方之依?

 

자공이 묻기를, “그렇다면 선생님께서는 어느 세계에 속하십니까?”

 

孔子曰: , 天之戮民也. 雖然, 吾與汝共之.

 

공자가 말하길, “나는 하늘로부터 형벌을 받은 사람이다. 비록 그렇지만 나는 너와 함께 할 것이다.”

 

륙민(戮民)은 하늘로부터 형벌을 받은 사람입니다.

공(共)에 대한 해석 두 가지이 있습니다. 하나는 여(與)로 보는 것인데, ‘그러면 같이 가다’라는 뜻이 됩니다. 이럴 때 해석은 “방내인이지만 너와 함께 방외인의 삶으로 나아가겠다.”가 됩니다. 다른 하나는 ‘함께하다’, ‘공유하다’의 공(共)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럴 때 해석은 “나는 방내인이고 너도 방내인이니, 함께 방내인으로 살겠다.”가 됩니다.

 

子貢曰: 敢問其方.

孔子曰: 魚相造乎水, 人相造乎道. 相造乎水者, 穿池而養給., 相造乎道者, 無事而生定. 故曰, 魚相忘乎江湖, 人相忘乎道術.

 

자공이 말하길, “감히 구체적인 방도를 여쭙습니다.”

공자가 말하길, “물고기는 함께 물에 도달하고, 사람은 함께 도()에 이른다. 함께 물에 도달할 때는 연못을 뚫으면 잘 자랄 수 있고, 함께 도()에 이를 때는 쓸데없는 일을 하지 않으면 삶이 편안해진다. 그러므로 말하길, 물고기는 강과 호수에서 서로를 잊고 지내며, 사람은 도의 세계에서 서로 잊고 지낸다고 하는 것이다.”

 

조(造)는 ‘도달하다’, ‘이르다’라는 뜻입니다.

급(給)은 ‘만족하다’의 뜻입니다.

망(忘)은 각자의 스타일에 따라 소요유(逍遙遊)하는 것입니다.

도술(道術)은 도의 세계를 말합니다.

 

子貢曰: 敢問畸人.

: 畸人者, 畸於人而侔於天. 故曰, 天之小人, 人之君子., 天之君子, 人之小人也.

 

자공이 말하길, “감히 기인(畸人)에 대해 여쭙습니다.”

공자가 말하길, “기인(畸人)은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으나 하늘과는 어울린다. 그러므로 말하길, 하늘의 소인(小人)은 인간 세계의 군자(君子)이고, 인간 세계의 군자(君子)는 하늘의 소인(小人)이다.”

 

기(畸)는 ‘홀로가다’의 뜻입니다. 세상에 뜻을 두지 않는 것을 표현한 글자입니다. 그래서 기인(畸人)은 세속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 사람이고, 방외인과 같습니다.

모(侔)는 ‘가지런하다’의 뜻으로 방외인이 하늘과 어울리는 것을 표현한 글자입니다.

 

顔回問仲尼曰: 孟孫才, 其母死, 哭泣無涕, 中心不戚, 居喪不哀. 無是三者, 以善處喪蓋魯國. 固有無其實而得其名者乎? 回壹怪之.

 

안회가 중니에게 묻기를, “맹손재는 그 어머니가 죽었을 때 소리 내어 울었으나 눈물을 흘리지 않았고, 마음은 슬퍼하지 않았으며, 상을 치르는 동안 서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 가지가 없는데도 장례를 잘 치렀다고 노나라에 소문이 났습니다. 진실로 슬퍼하지 않았는데도 명성을 얻는 경우가 있습니까? 저는 이것이 괴이합니다.”

 

체(涕)는 ‘눈물을 흘리다’입니다.

척(戚)은 척(慽)과 통용되어 ‘슬퍼하다’라는 뜻입니다.

개(蓋)는 사서에서 발어사로 많이 사용되는데, 여기서는 ‘덮다’의 뜻입니다. 소문이 노나라를 덮은 것을 표현한 글자입니다.

실(實)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뜻합니다.

일(壹)은 ‘이것’이라는 뜻에서 시(是)와 통용됩니다.

 

仲尼曰: 夫孟孫氏盡之矣, 進於知矣. 唯簡之而不得, 夫已有所簡矣. 孟孫氏不知所以生, 不知所以死., 不知孰先, 不知孰後., 若化爲物, 以待其所不知之化已乎!

且方將化, 惡知不化哉? 方將不化, 惡知已化哉? 吾特與汝, 其夢未始覺者邪!

且彼有駭形而無損心, 有旦宅而無耗精. 孟孫氏特覺, 人哭亦哭, 是自其所以乃.

且也相與吾之耳矣, 庸詎知吾所謂吾之非吾乎?

且汝夢爲鳥而厲乎天, 夢爲魚而沒於淵. 不識今之言者, 其覺者乎, 其夢者乎? 造適不及笑, 獻笑不及排, 安排而去化, 乃入於廖天一.

 

중니가 말하길, “무릇 맹손재는 도리를 극진히 했으니, 이것저것을 따지는 것보다 낫다. 비록 상례를 간소하게 하려 했으나 못 했어도 이미 간소히 한 바가 있다. 맹손재는 사는 이유와 죽는 이유를 알려 하지 않고, 생 이전과 죽음 이후를 알려 하지 않으니, 변화에 순응하여 사물이 됨으로써 알지 못하는 변화를 기다릴 뿐이다!

또 바야흐로 장차 화()가 일어났을 때 어찌 화()가 일어나지 않았을 때를 알려 하겠는가? 바야흐로 장차 화()가 일어나지 않았을 때 어찌 이미 일어난 화()를 알려 하겠는가? 나와 너는 아마도 처음부터 그 꿈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한 사람일 것이다!

또 저 사람은 몸이 놀라기는 했으나 마음이 손상되지는 않았고, 몸은 새로워졌으나 정()은 마모되지 않았다. 맹손씨는 유독 깨어있으니 사람들이 곡을 하면 자신도 또한 곡을 하니 이것이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나일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이른바 나임을 어찌 알 수 있는가?

또 너는 꿈에서 새가 되어 하늘에 이르며, 꿈에서 물고기가 되어 연못에 노닌다. 지금 말하는 사람을 알 수 없으니, 꿈에서 깨어난 사람인가, [아니면 아직] 꿈꾸고 있는 사람인가? 예를 차리는 것은 자연스레 웃는 것보다 못하고, 드러난 웃음은 자연스런 감정의 변화보다 못하니, 자연스런 감정의 변화를 편히 여겨 화()에 나아가면, 이에 현묘한 하늘로 들어갈 것이다.

 

진(進)은 ‘낫다’의 뜻이고, 지(知)는 예의를 따지며 이것저것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유(唯)는 해석 안 해도 되지만, 수(雖)로 해석해서 읽어도 무방합니다.

유소간(有所簡)은 곡읍을 했으나 눈물을 흘리지 않은 것을 말합니다.

취선(就先)은 생 이전을 말하고, 취후(就後)는 죽음 이후를 말합니다.

약(若)은 순(順)의 뜻입니다.

기(其)~야(邪)는 “아마도 ~일 것이다.”라는 문법적 표현입니다.

차피유해형이무손심(且彼有駭形而無損心) 에서 피(彼)는 화(化)가 일어난 사람을 말합니다.

유단택이무정사(有旦宅而無情死) 이 구절이 《회남자》에서는 유단택이무모정(有旦宅而無耗精)으로 나옵니다. 곽상의 판본과 《회남자》에 남은 구절 중 어느 것이 장자 원래 구절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정(情 혹은 精)이 사라지지 않는다(혹은 마모되지 않는다).”로 해석할 수 있다는 점에서 둘 다 뜻이 비슷합니다.

단(旦)은 ‘바뀌다’, ‘새로워지다’라는 뜻의 이(移)로 해석됩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놀라다’라는 뜻의 달(怛)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택(宅)은 정신이 깃들어 있는 몸을 말합니다.

피(彼)를 맹손재로 보느냐, 맹손재의 어머니로 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집니다.

맹손재로 보는 경우,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신체적 반응은 있으나 그 정신이 손상되지 않았다.”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맹손재의 어머니로 보는 경우, “신체는 죽었으나 근원적 에너지는 손상되지 않고 남아있다.”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이 구절은 사라지지 않고 사물을 만드는 근원적 에너지가 있다는 기론(氣論)과 연결되기도 합니다.

소(笑)는 자연스럽게 웃는 것입니다.

헌소(獻笑)는 ‘드러난 웃음’인데 두 가지로 해석 가능합니다. 하나는 다른 사람을 웃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깔깔깔 웃는 것입니다.

배(排)는 상황에 변화에 따른 감정의 변화를 말합니다.

거(去)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변화로 나아가다’ 라는 의미에서 지(之)로 읽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알려고 하지 않는다’ 라는 뜻의 망(忘=不知)으로 읽는 것입니다.

료(廖)는 현(玄)의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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