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과 글쓰기

5.9 주역과 글쓰기 공지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21-05-01 14:44
조회
103
드디어 <계사전>을 다 읽었습니다. <계사전>은 말이 행동에 드러난다는, 뭔가 마지막 답지 않은 구절로 끝납니다. 이는 <계사전>이 아마도 동일한 저자가 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생각해보면 <주역>은 <계사전>과 같은 말들이 계속 덧붙어 확장되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텍스트입니다. 여기서 동일한 저자를 특정하는 건 별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 학기에 <주역>과 <계사전>을 읽으면서 성인이란 어떤 사람인가를 많이 듣고 또 생각했습니다.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서양의 영웅과는 다른, 뭔~가 이렇다할 건 이룬 게 없는 거 같은데 이상적인 인물이라고 추앙받는 동양의 성인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이런 질문은 <계사전>과 <주역>에서 무엇을 배울까와 연관됩니다. 성인이 썼고 또 성인을 지향하는 텍스트이니까요. 이번 시간 강의에서 성인은 중심을 잡을 수 있는 인물이라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성인은 항상되게 걸어갈 수 있는 인물이라고요. 사실 '걷는다'고 하면 화려한 맛도 없고 누구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꾸준히 항상되게 걸어간다는 건 언제나 중심을 잡고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균형을 잡고 노력할 수 있는 인간, 이것이 동양이 지향하는 북극성과 같은 성인이지요. 항상되다는 것은 완성되었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언제나 전망과 비전을 고수할 뿐이죠. 어떻게 보면 성인과 성인 아닌 사람은 종이 한 장 차이일지도 모릅니다. 중심을 잡느냐, 아니면 중심을 잡는 것에 싫증을 느끼고 더 대단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며 치우치거나. 그뿐입니다.

<주역>의 세계는 자연을 모델로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꼭 자연의 질서를 따라서 살자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연을 인간이 질서화 하는 방식이 있고, 그것이 <주역>의 상징체계이지요. 그 상징체계는 철저하게 국가 담론입니다. 애초에 <주역> 자체가 문왕 때 성립되었고 정이천의 신권(臣權) 회복 의지에 따라 발굴된 텍스트입니다. 이렇게 보면 <주역>은 인간이 자연을 따라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텍스트가 아니라, 자연을 국가로 포함시키는 텍스트라고 할 수 있지요. 채운샘은 우리가 자연을 새로 물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나무와 풀이 자연인 것처럼 스마트폰 역시 자연이라고요. 사실 <주역>에 나오는 사물들은 당시 인간들에게 익숙한 생활용품들이었습니다. 또 나오는 인간의 행위는 모두 국가의 의례나 비근한 인간관계였지요. 이렇게 보면 <주역>은 결코 고원하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 아니고, 성인은 일반인(?)이 범접하기 어려운 경지의 인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성인은 언제나 이 비근한 관계 안에서 자연의 질서를 구현하는 자가 아니었을까요? 다만 너무나 항상적인 운동을 하고 있기에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 믿고 따라갈 수 있는 북극성과 같은 역할을 수행한 것이지요.



5월 9일에는


<우주변화의 원리> 총론(23~53쪽)

<원형과 무의식> 중 [정신의 본질에 관한 이론적 고찰] 절반(13~50쪽)

<주역> '화천대유', '화택규' 괘


읽고 질문거리나 인상적인 부분을 체크해 오시면 됩니다.


후기는 재복샘

간식은 규창, 정옥샘


일정이 살짝 달라질 예정입니다. 아래 시간표를 참고하세요^^


10:00~10:30 <주역> 괘 강독

10:30~12:00 <우주변화의 원리> 토론

12:00~13:00 점심 및 산책

13:00~14:00 <주역> 괘 토론

14:00~17:00 강의


그럼 방학 잘 쉬시고, 5월 9일에 만나요//
전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