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

소생프로젝트 8.9일 후기

작성자
정옥
작성일
2018-08-13 20:01
조회
97
후기가 늦었습니다. 늦어질수록 정리하기 어려운 것이 후기인걸 알면서 말입니다ㅜ

8.9 소생 프로젝트 후기

 

책을 읽으며 놓치지 않아야 하는 것이 텍스트가 담고 있는 큰 주제입니다. 특히 도시히코처럼 ‘의식’과 ‘본질’이라는 분명한 주제로 전체를 관통하고 있을 때는 더욱 그러합니다. 저자는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동서양은 물론 다양한 인물을 가로지르며 핵심을 뚫고 있습니다.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사유의 훈련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방식에 능숙하지 않은 우리는 자꾸 미끄러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주제의 핵심을 놓치지 않으려기보다 지엽적인 것에 걸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후기만이라도 그걸 놓치지 않아야 하는데 말이지요;; 이번 시간은 지난 시간에 이어 이즈쓰 도시히코의 『의식과 본질』 4-6장을 읽었습니다.

 

본질을 본다는 것

도시히코는 텍스트 내내 본질이 무엇인지, 본질을 무엇이라고 보았는지 탐색하고 있습니다. 기존에 제가 생각한 본질은 보이는 현상의 특성을 만드는 비물질적인 성질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도시히코를 통해 본질을 이해하는 다양한 사유를 접하고 있습니다. 본질을 탐색한다는 것은 지각하고 의식하는 너머를 사유해 보는 것입니다. 의식에는 표층의식과 심층의식이 있습니다. 우리가 뭔가 의식하고 안다고 하는 것은 표층의식인데 분절적 의식을 말하지요. 그런데 무의식이든 꿈이든 때론 기시감을 느끼기도 하고요, 내가 의식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지요. ‘본질’ 탐구는 이 심층의식에 대한 사유입니다. ‘드러난 것이 전부일까? 의식으로 내가 규정한 것은 믿을 수 있는 것인가? 의식한다고 할 때 뭘 의식한다는 것일까? 이때 허구와 실재는 가를 수 있는 것인가?’ 이렇게 의식활동이 어떻게 생겨나는지를 묻는 의문에서 본질에 대한 질문도 나오게 되는 것이지요. 왜 이렇게 본질에 대한 탐구를 치열하게 했던 것일까요? 그것은 삶의 문제와 별개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안다는 것이 어떤 사실을 안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의식이 어떻게 삶의 문제와 직결 되는지는 자본주의와 관계 맺는 이슬람과 기독교를 비교해 보면 더 선명해지는 것 같습니다. 나카자와 신이치도 이와 같은 주장을 하였다고 하는데요. 자본주의와 기독교의 관계성에 먼저 볼까요. 기독교는 자기증식이 가능한 삼위일체론을 만들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이론은 탄생의 원초적 존재로 아버지를 상정하지요. 그리고 재생으로써의 아들과 이 둘을 본질적으로 이어주는 성령이 있는 구조입니다. 이 아버지는 자본주의로 오면 원초적 자본이 되어 이윤이 불어나는 자본 구조와 동형을 이룹니다. 아버지와 자본은 세상의 기초라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마치 자본이 있어야 다음 스텝이 가능한 것처럼 말입니다. 돈이 있어야 공부도 할 수 있고, 돈이 있어야 여행도 하고, 연애도, 결혼도, 집도 모두 돈과 별개로 생각해 볼 수 없지 않나요. 결국 기독교의 삼위일체와 자본주의가 동일 메커니즘위에 있고, 이는 세계를 인식하는 메커니즘 또한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절대 불변의 아버지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예수의 탄생과 대속자로써 죽음에 대한 원죄, 자본주의에 오면 이것이 이자와 부채의 개념과 같아지지요. 부채와 이자로 증식 가능한 것이 자본주의이지요.

동양과 이슬람은 이와는 아주 다른 사유구조와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근대 자본주의 태동기에 근대화 과정이 더뎠던 것도 이 자본주의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겠지요. 동양의 자연에 대한 이해는, 늘 변한다는 것이지요. 축적과 증식이 아님은 물론이거니와 기원 또한 없습니다. 자연은 생산의 대상이 아니라 본받을 대상이고 자신과 일체되어야 하는 것이었지요. 이슬람에서 알라의 계시를 받은 무함마드는 심지어 상인이었습니다. 이슬람 또한 자본주의 경제 질서와는 거리가 멀지요. 신의 말씀이라는 이데올로기에 따라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으며, 윤리, 규범, 제의 등을 설명하고 있을 뿐입니다.

마히야와 후위야, 이슬람의 본질론

이슬람의 본질론은 아주 독특합니다.  보통 본질과 현상을 대별해  라캉의 분류를 빌려보면 보편적 규정성을 가진 세계를 실재계로 부르고  구체적 현실을 사실계로 파악합니다.  보통은 실제계를 본질로 보게 되지요. 그런데 이슬람은 희한하게 이 둘 다를 본질로 봅니다.  사물에는 두 개의 본질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히야와 후위야가 그것인데요. 마히야는 이데아 같은 것으로 보편적 본질을 말합니다. 후위야는 사물이 가진 개별적 특수성을 말합니다. 책에서는 이를 재미있게 설명하고 있는데요, 우리가 꽃을 지시할 때 이 꽃이라고 하지요. 마히야는 보편적 꽃에 방점을 찍어 이 ‘꽃’을 가리킵니다. 꽃이라는 보편적 본질에 주목합니다. 후위야는 개체성을 강조하는 ‘이’꽃에서 본질을 찾는 것입니다. 마히야는 플라톤의 이데아나 초월적 본질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후위야는 사물 개개에 다른 것으로 환원 불가능한 개체의 고유성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샘은 이를 16세기 철학자 둔스스코투스와 들뢰즈를 들어 설명해 주셨지요. 둔스스코투스가 살았던 서양의 중세 시대는 신이 세계를 창조했다고 철썩같이 믿던 시대였지요. 둔스가 보는 세상은 신이 신적인 것을 가지고 창조한 것이 세상입니다. 신이 가진 자기 본질을 발현해 세상을 만들었다면 모든 사물에도 신적인 특성이 부여되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해서 모든 사물에는 바로 이것임, 이것 성질 (thisness)이라고 하는 개체의 고유성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사물 모두에 흐르는 보편성이 있고, 각각은 개체화의 원리에 의해 그것으로 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후 철학자 들뢰즈가 잠재성이라는 것으로 그 사유를 그대로 이어 받습니다. 이와같은 사유는 개체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어떻게 본질을 현실화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인식에 대한 고민과 동일하다고 볼 수 있지요. 여기서 공부를 하는 우리의 문제는 질문을 끌어내야 한다는 것이죠. 사실 읽고 이해하기 바쁘다는 핑계가 있지만 샘은 후루룩 질문을 던지셨어요. 보편적 본질 있으면서도 다른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개체적 본질 있다면 원래 본질은 두 개인 건가? 본질이라고 말할 때 고유한 하나를 의미하는 것 아닌가? 기존에 자신은 어떻게 생각했나?등등. 드러난 것은 다 허구라고 말하는 니체의 말을 언급하며 의심하고, 통칭하지 말라고 하셨네요. 질문, 질문, 질문. 만들어진 모든 것이 다 동일 아니다라는 사실. 어쨌든 이슬람 사람들은 본질을 파악하는데 있어, 사물X가 X로 존재하는데 있어 구체성의 원인이 있고 그 구체성을 관통하는 공통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 이슬람의 사유입니다.

 

말라르메의 본질론, 사물이 사라진 허무의 자리

말라르메는 (1842-1898) 프랑스 시인입니다. 말라르메가 본질론과 관련된 것은 그의 독특한 시어 때문입니다. 도시히코는 말라르메의 본질론을 언어가 허물어진 자리에서 찾고 있습니다.

말라르메의 시는 내용이 연결되지 않는 것은 기본이고요. 행도 없고 활자의 크기도 다릅니다. 번역이 불가능하고 읽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이 독특한 시는 언어에 대해 문제제기를 합니다.

뭔가 말하고 있는데 어떤 의미도 없고 말하지 않은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것을 허무, 무로 해석했고 도시히코는 이를 절대언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요, 세미나에서는 절대 언어를 풀지는 못했습니다. 언어의 의미를 부정하며 그 의미가 부정된 것을 無로 보는 것 아니냐 정도로 풀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송대 유학자들의 정좌에 비해 신체성이 소거된 절대 관념적인 것이 아니냐는 해석도 했었지요. 무지했지요. 샘은 말라르메가 신체성을 복원했다고 설명하셨는데요. 그 이유는 그 시가 낭송함으로써 구현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누워있는 글씨는 누운 모양으로 큰 글씨는 큰 소리로 작은 글은 속삭이듯, 구석에 씌여진 글자는 그렇게 구석에서 낭송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체성을 가지고 구현 하는 시란, 우리가 일반적으로 시라고 생각해 왔던 것을 철저하게 붕괴 시키고 언어가 작동하지 않는 곳으로 유도한다는 면에서 절대언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말라르메가 표현한 것은 시이고 언어인데,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것이다, 도시히코는 이런 말라르메의 언어가, 궁극적으로 무에 도달한 것을 본질이라고 해석한 것이지요. 바쇼의 본질이 현상을 떠나지 않았던 것과 비교하면 동일한 본질을 보는 것이지만 탐구방식은 매우 다른 것이었지요.

말라르메의 시 <주사위 던지기> 링크(클릭)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wbq1212&logNo=220927435569

송대 유학 의 본질론

理는 매우 형이상학적인 개념인데, 유학에서 중요한 논제는 아니었다고 합니다. 이전엔 인의와 예가 더 강조된 개념이었는데 이것이 송대에 와서 형이상학적 주요개념으로 떠오른 것이지요. 理는 격물궁리格物窮理를 말합니다. 이는 대학에 나오는 말인데 문구대로 해석하면 물로 나아가 이치를 탐구한다는 의미입니다. 物은 현상 사물이면서 사건인데, 이 현상으로부터 원리를 탐구한다는 말입니다. 세미나에서의 설왕설래가 무색하게 샘은 격물궁리의 가장 좋은 것은 독서라고 단칼에 정리하셨는데요. 士계급이 공부하는 經에는 세상의 이치가 다 담겨 있기 때문에 경전을 통하면 세상을 모든 이치를 탐구하는 게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지식인士이란 독서인이고 공부란 독서를 말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독서만 하면 안 되고 체화과정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경敬으로 설명합니다. 敬은 조심하고 삼가는 태도 신愼과 같은 의미인데요, 그 방법으로 제시한 것이 정좌입니다. 이 정좌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개념이 이발과 미발입니다. 已發은 이미 드러난 것으로, 희노애락애오욕의 감정이 마음 안에 드러난 상태를 말합니다. 사심이나 편견같이 사물이나 사건을 전체 안에서 생각해보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감정이 일어나는 것도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다 끊어지고 사이사이 틈이 발생합니다. 未發은 마음의 고요한 상태인 그 틈, 간격을 말합니다. 정좌는 이 간격을 넓혀가는 훈련이고요. 세미나에선 이발과 미발이 분리된 것이냐 아니냐 논의가 있었는데요, 두 가지가 선후의 문제는 아닙니다. 의식과 본질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미발이라는 고요한 상태가 흐르고 이발의 감정이 그 위를 요동치며 가는 것이므로 동시적인 문제입니다. 우리가 의식할 수 있는 이발 사이 다른 감정이 있다는 것은 마음의 다른 차원이 함께 존재한다는 것이고, 정좌를 통해 그 본질에 이르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지식인은 곧 정치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자기수행을 하지 않은 자가 하는 정치는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만들 것이기에 궁리와 정좌가 중요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성리학이 지향하던 바였지요. 去人慾 尊天理 자신의 기질에 따른 사사로운 사욕을 버리고, 천리에 따라 자신을 배양해 가는 것입니다. 자연이라는 보편적 천리가 있다는 것이 性이고, 그 원리를 理라고 본 것입니다. 동양에서는 현상과 본질이 다르지 않다고 보았고 지난 시간에도 예를 들어주셨던 하나의 달이 천개의 강위에 떠 있는 것(月印天江)과 같은 것이랍니다. 달도 강도 아닌 게 없는 것이죠. 존재계의 진상 그 자체가 본질이라는 말입니다.

보편적 본질의 실재 논쟁, 이슬람의 원자론과 인과율

이슬람 철학은 그리스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는데요. 아베로에스(이븐 루시드)의 아리스토텔레스 연구는 서양으로 전해지기도 하였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는 인과율로 설명됩니다. 이것은 한 사건엔 반드시 하나의 원인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A->B->C...와 같은 단선적이고 기계론적 인과의 연쇄를 말합니다. 세미나에서는 원인이 있다는 것에서 스피노자와 연동해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제기가 있었는데요, 스피노자의 원인에 대한 사유는 단선적이지 않으며, 앞의 원인이 다음에 바로 영향을 주는 방식과도 다르며, B는 A뿐 아니라 E, G등과도 연관 되어 복합적 관계를 이루고 있지요. (스피노자 강의 후기에서 참조하세요) 스피노자의 세계는 다양한 원인이 그물처럼 연결되어 있고,앞의 원인은 많은 원인중 하나에 불과한 거죠. 스피노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과율 비판했다고 합니다. 어쨌든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이 하나하나 자기 본질이 있고, 인과를 이루며 구성되어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모든 것이 하나의 원인에 의해 결정되어 있는 고정된 세계가 되어 버립니다. 당연히 우연이 부정되는 것이지요.

이슬람의 사유로 볼 때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 자가 알라입니다. 알라의 의지가 절대적이고 본질적인 것인데 인과율로 세계가 고정되어 버리면 신의 의지가 개입될 가능성이 봉쇄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 가잘리입니다. 가잘리에 따르면, 사물에는 어떠한 고유한 성질도 없다고 봅니다. 사물이 자기 성질 없이 우연적으로 마구 일어나는 게 이 세계입니다 그런데 일어나는 일들이 비슷한 형태로 나타나니까 어떤 인과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지 사실은 우연적으로 발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에 뜻에 의해 세상은 우연하게 존재하는 것이지요. 인과율의 부정에 기반을 둔 완전한 우연성의 세계 이것이 원자론입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이슬람의 사유입니다.

그런데 원자론의 한계는 우연성 때문에 존재와 작용 사이에 어떤 관계도 없게 됩니다. 존재와 작용사이에 어떤 본질도 없다고 한다면 세계는 혼란해지고 세상은 예측할 수 없게 됩니다. 신이 어떤 의지로 세상을 존재케 했는지 알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신은 알 수 없는 존재가 아니지요, 무슬림의 삶을 살게 하는 존재니까요. 이 문제제기 속에 다시 인과율을 주장한 사람이 아베로에스입니다. 어떤 존재와 작용 사이에 아무런 인과도 없는 사물을 만들어내는 것은 신에 대해 알지 못하게 만드는 불가지론에 빠지게 만든다는 것이 아베로에스의 비판이었습니다. 해서 아베로에스의 인과론은 존재와 작용 사이의 밀접한 연관을 중요시합니다. 존재는 존재이면서 그 자체로 ‘작용한다’로 보고 있습니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 내적구조에서 자기 운동성을 품고 있는 것입니다. 꽃은 꽃의 성질을 가지고 꽃으로 피어나는 것입니다. 그럼 이때 신은 어떤 존재일까요. 신은 사물에 본질 부여하고 그 사물에 운동성을 준 존재자이죠. 우리가 존재하면서 관게하고 있는 것들과 일정한 인과법칙에 따라 운동하고 있는데 그렇게 만들어 준 존재가 신인 것입니다. 인과율을 인정하면 어찌되었든 신의 전면적인 자유의지를 일부 부정하게 됩니다. 아베로에스가 이후 이단으로 비판 받았는데 인과율이 가진 한계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결국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만 이 존재하는 방식을 다르게 본 것이지요. 세상이 인과율적인 것이냐, 아니면 신의 자유의지가 발현되는 곳이냐의 문제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보편적 본질의 실재를 인정할 것인지의 아닌지의 문제로 말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삶의 윤리를 만들었고 정치적 판단과 행위를 가른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슬람의 치열한 분쟁이 큰 틀에서는 이해되는 것 같습니다.

카렌 암스트롱이 <이슬람>에서 이슬람의 특징을 비연속적 존재론이라고 했을 때 신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는데 원자론에 의한 우연성의 세계를 인정하는 것이란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슬람의 본질론을 이해할 때, 마히야와 후위야라는 본질이 있음을 모두 인정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신을 요청한다는 것 자체가 보편적 본질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이 세상을 어떻게 구현하는가에 따라 본질에 대한 논리가 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신의 자유의지가 그대로 발현되는 우연성으로 드러나느냐, 아님 일정의 인과에 따라 세계가 구현되는데 그 작용에 운동성을 부여하고 질서를 부여하는 자로 존재하는가의 해석이 있었던 것이지요. 이슬람의 두 가지 본질을 읽으며 분명하지 않았던 것이 신의 역할에 의해 좀 선명해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서두에도 말했지만 본질에 대한 탐구의 문제를 삶의 문제이고 이를 어떻게 자신의 문제로 가져오고, 그럼으로써 자기윤리를 펄쳐 낼 것인지의 문제로 귀결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쥐고 있어야 함을 잊지 않아야겠지요. 이게 제일 어려운 것이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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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8-14 10:34
    잉"무지했지요." 왠지 이 부분에서 터져버렸네요. ㅋㅋㅋ
    / 의식도 여러 층위가 있듯이 본질도 여러 층위가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니 그걸 처음부터 얘기하고 있었는데 이제야 실감했네요. 하하;;
    理, 후위야,마히야, 이슬람의 원자론적 세계. 의식과 본질의 관계를 설명하는 이런 다양한 얘기들이 재밌긴 한데, 정말 어떻게 가져가야 할까요. 어렵네요.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