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

[소생] 철학팀 후기(8.16)

작성자
혜림
작성일
2018-08-20 09:12
조회
85
이번 시간은 새로 읽기 시작한 엘리아데의 『세계종교사상사』, 3장 메소포타미아의 종교에 대해 짧게 토론을 하고, 『이슬람과 기독교』의 문제의식과 각자 책에 대해 요약한 내용을 나누었습니다.

규정된 세계에 균열을 내는 신화의 세계

<3장 메소포타미아의 종교>는 수메르인과 아카드인(셈족)의 우주창조신화에 대한 내용입니다. 창조신의 실수로 인한 벌로서 유한성을 갖게 된 신화적 맥락과 그 유한성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신화적 원형을 보여줍니다. 엘리아데는 셈족의 종교적 천재성은 국가신을 보편신으로 승격시키고, 개인의 기도가 제의에서 중요성을 가지게 된 사실에 주목합니다. 이러한 신화적 원형이 종교적 형태로 발전한 것이 유대교와 기독교이기 때문인지 신화의 이야기 구조가 익숙하게 느껴졌습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다신교 형태의 신화적 세계가 일신교 형태의 종교적 세계로 왜 변화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이 토론 중에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죽음을 관장하며 두려움을 이기게 해줄 절대 권력을 지닌 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종교가 생성되는 힘은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두려움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달려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두려움을 더 강한 두려움으로 사라지게 한 후 무한한 것을 꿈꾸게 만드는 것이 종교의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이 두려움 때문에 사람들은 종교의 형태가 아니더라는  무언가 유한하고 확실한 것을 믿게 하는 것에 쉽게 예속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규정된 세계, 코드화된 세계에서 안정을 느끼는 것이겠죠.

강의시간에 채운쌤께서 ‘왜 신화적 세계가 필요한가?’ 에 대해 이야기 해주셨습니다. 이 이유는 코드화된 세계의 절대성을 깨기 위해서, 이 세계의 규정을 오작동 시키기 이해서라고 합니다. 내가 옳다고 믿는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도 존재한다는 것을 알기 위해 신화적 세계를 알 필요가 있는 것이죠. 신화시대? 사람들은 규정된 세계를 살긴 하지만 신화적 세계를 미신으로 취급하거나 삶에서 분리시키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것이 누군가 만들어 놓은 코드에 예속되지 않고 살 수 있는 힘이 아닐까 합니다.

맹목적인 신심을 깨기 위해서

규정된 세계도 신화적 세계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신심에 의해 작동되기 때문입니다. 그 세계가 실재한다고 공통적으로 믿기 때문에 더 견고해 집니다.  『이슬람과 기독교』는 신심에 대해 문제제기를 합니다. 신심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타자와 나의 근본적인 차이를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신심의 대상이 되는 순간, 사람들은 그 대상을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과 동일시하고 호의적인 이미지를 갖게 됩니다. 엘륄이 볼 때 이것은 타자를 이해하는 태도라고 볼 수 없습니다. 타자를 호의적으로 대상화할 뿐이죠. 이 때문에 이 책은 이슬람과 기독교를 비교하고 있기는 하지만 ‘타자에 대한 대상화’에 대해 고민하게 합니다.

엘륄이 이 책을 쓴 이유는 타자에 대한 맹목적 신심과 미화에 종속되지 않고 정확하게 그 대상을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나와 타자의 근본적인 차이를 디테일하게 알아야 맹목적인 믿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겠죠. 하지만 엘륄는 기독교 개혁자의 입장에서 이슬람을 보기 때문에 이슬람에 대해서 우호적인 시각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이슬람에 대해서 우호적인 시각의 책만 읽은 지라 이 책이 처음에는 혼란스러웠습니다. 팀원 모두 이슬람에 대해서 포용적이고 현실 참여적인 종교라는 우호적인 이미지를 막연하게 갖고 있었습니다.  공포의 대상이었던 이슬람에 대한 이미지가 책 몇 권 읽고 나서 극단적으로  바뀌었던 것이죠. 엘륄의 책을 본 후, 우리는 어떻게 이슬람을 봐야 하는 것인지, 타자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를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발표 시간에 이에 대해 나눠 보려고 합니다.

이번 시간에 주목한 해석의 차이는 절대성과 초월성 개념에 대한 것입니다. 엘륄은 이슬람의 유일신을 숫자적 하나로 해석하고, 알라의 초월성을 인류와 무한한 거리를 두며 어떤 것이든 배척하는 독단성으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알라는 초월적이고 인간과의 관계는 복종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이슬람이 숙명적 태도로 수동적으로 신을 믿고 있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이 개념에 대해서 도시히코와 카렌은 어떻게 해석했는지 차이를 비교해 보기로 했습니다.

공지사항

팀 세미나가 책을 읽고 나누는 시간에서 발표준비가 주가 되면서 긴장감도 있어지고 논의가 더 풍성해지는 것 같습니다. 발표날짜는 9월 13일로 미뤄졌지만, 발표준비는 책읽기와 병행하기로 했습니다. 다음 주는 이슬람에 대한 엘리아데의 시선을 추가 로 작성하기 위해서 『세계종교사상사』, 33장 무함마드 부분을 먼저 읽기로 했습니다. 발제는 제가 맡았습니다. 그리고 저번 주 시간이 없어서 논의하지 못한 이슬람을 보는 시선(카렌, 도시히코, 엘륄, 엘리아데)을 다시 정리해 오시면 됩니다. 각 저자들은 어떤 문제의식을 갖고 어떤 쟁점으로 이슬람을 보고 있는지 한 문단으로 정리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질문을 정리해 오는 것 입니다. 이슬람에 대해 해석이 다른 지점이 무엇이고, 어디에서 차이가 나는지에 대한 질문이나, 『이슬람과 기독교』을 읽으면서 생긴 질문들을 정리하시면 됩니다.

담주에 봐요!
전체 3

  • 2018-08-20 20:54
    이슬람이 타자를 어떻게 대하는지 구체적인 이야기가 나오는 것 같군요! 기대됩니다. 비무슬림이었다가 무슬림이 되는 과정이나 딤미에 대한 태도 등이 궁금했는데, 그걸 발표 때 잘 정리해주실 것 같네요. 재밌을 것 같아요~~

  • 2018-08-20 21:13
    토론 때 충분히 연결하지 못한 개념들, '신심이 문제가 되는 건 타자와 나의 근본적 차이를 보지 못하게 한다'를 심화해 주어서 후기 넘 재미있게 읽었어요^~^
    같은 맥락에서 신심의 대상이 생기면 특정한 코드화가 성립하면서, 이를 중심으로 타자를 분절하게 되는 것 같다고도 덧붙여 봅니다~ㅎ

  • 2018-08-21 00:26
    맹목이란 결국 무지에서 나온다. 무서운 경고입니다. 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