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

8월 16일 후기

작성자
민호
작성일
2018-08-20 11:48
조회
98
 

철학과 예술, 수학 등을 통틀어 옛날의 사상가들은 보이는 현상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을 해왔습니다. 보이는 현상만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 예술가들은 이를 표상이라고 부르는데, 예술은 그런 표상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현상들을 꿰는, 관통하는 흐름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마주할 때, 너와 내가 마주하는 것은 뭐지? 왜 같은 것을 마주한다고 하지만 매번 다른 거지? 하는 궁금증이 들지만 그걸 끝까지 밀고 가지 않습니다. 철학에서도 이와 같이 ‘실재’에 대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실재란 현상에 대립되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의 현상은 매번 똑같은 부동의 사물이 아닌 매번 다르게 현현하고 다르게 느껴지는 사물입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현상에 더 근원적인 무엇이 있을 것. 실재에 대한 질문은 철학의 영역에서 중요한 질문이었습니다. 실재에 대한 탐구로서 서양에는 이데아, 동양에서는 리理라는 개념이 등장합니다. 다른 지역, 다른 문화에서 유사한 시기에 생겨난 실재에 질문들은 세상의 사상적 진동이 비슷하게 나타남을 보여줍니다. 또한 비슷함 가운데도 다르게 차이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이즈쓰의 <의식과 본질>은 실재에 대한 논의가 방대하게 실려 있으니 거기서 콕 꽂히는 부분, 더 공부해보고 싶은 부분을 찾고 끌고가라는 당부가 있었습니다.
  1. 신화적 사고


우리는 지금 수량화 되고 정확히 측정 가능한 시간 속에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과연 시간이 어느 곳 누구에게나 똑같이 흘러갈까요? 숲에서 뛰노는 아이의 시간과 직장인의 시간, 농부의 시간과 과학자의 시간, 고대 농경사회의 시간과 근대의 시간은 과연 동일한 일분 일초는 아닐 것입니다. 현재를 사는 우리는 원하던 원치 않던 상당히 많은 네트워크 속에서 에너지를 분산시키며 살고 있습니다.

시간의 관점을 매우 가까이 가져오면 미시적이고 세포적인 관점에서의 시간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선 아주 미세한 시간 속에서 보는 족족 변화와 생성을 만들어내고 있지요. <에어컨 권력>이라는 에세이가 보여주듯 몇 십 년의 기계문명이 인간의 기운과 기질을 바꾸는 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생명 전체의 역사에서 손톱부분에 해당하는 인간의 역사인데 말입니다. 그러나 멀리서 보는 거시적ㆍ지질학적 시간에서는 세상은 그렇게 변한 것이 없습니다. 3000년 전에 만들어진 주역의 시대와 지금의 시대 천지가 개벽한 완전히 다른 네트워크 같으면서도 또 한편, 인간으로서 그렇게 크게 다르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신화의 시대, 원형이라고 하는 차원은 시간의 관점을 달리했을 때, 우리의 시간의식 아래 아주 느리게 변하는 흐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화의 세계에서는, 사슴에게 화살이 박힌 그 자리에 사람도 동일한 아픔을 느꼈다고 합니다. 부시맨의 예가 그렇듯 인간과 동물이 같은 기운 속에 존재했던 시기입니다. 나카자와 신이치는 레비-스트로스의 ‘브리콜라주’ 개념을 이야기하며 신화를 언급합니다. 브리콜라주란, 주변의 ‘자재’를 이렇게 저렇게 재용하고 조합을 변화시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행위를 말합니다. 즉, 어떤 도구나 개념 등의 잡동사니가 그것에 대응하는 목적으로 한정되지 않고 새로이 조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래된 것, 낡은 자재로부터 잠재적인 능력을 끌어내 지금까지와는 다른 기능을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야생의 사고’ 또는 ‘신화적 사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화적 사고는 이즈쓰 도시시코가 ‘~의 의식’이라고 하는 표층의식에 묶이지 않습니다. 표층의식과 함께 가기는 하지만 표층의식만으로 환원되지 않는 의식의 차원, 심층의식의 차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코드와 영토에도 고착되지 않고 그 경계를 넘나든다는 점에서 들뢰즈의 ‘기관 없는 신체’로도 연결해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신화적 사고는 원형으로서 작용한다는 점에서 이즈쓰의 이마주와 관련되며, 또한 신이치가 뒤에 이야기하는 0공간, 없음이 아니라 새로운 의미의 발생을 내포하고 촉진하는 작용으로서의 0은 이즈쓰가 말하는 선종의 무, 허의 개념과도 함께 이야기 해 볼 수 있습니다.

 
  1. 선종


이즈쓰는 선종의 사유를 ‘분절1 - 무분절 - 분절2’의 도식으로 간단히 정리합니다. 분절1의 차원은 코드화의 영역으로 대상과 그에 대한 본질이 고정되어 규정된 채 존재하는 표층적인 인식입니다. 이러한 일반의 인식으로부터 의문이 일어나는 것은 자못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 고대로부터 보이는 현상만이 다가 아닐 거라는 의문과 실재에 대한 탐구는 늘 제기되어 왔습니다. 산을 바라볼 때, 봄의 산과, 여름, 가을, 겨울의 산은 모습이 계속 달라집니다. 그 계절이라는 것도 매 해 매 순간 다르게 드러납니다. 어느 것을 긍정하는 순간 다른 모든 것을 부정해야 합니다. 사실 어떤 것도 ‘산’이라는 언어나 의식으로 분절되지 않은 채 존재합니다. 이런 무규정의 세계를 공, 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0이라고 하는 것도 적절합니다. 아무 수도 아니지만 모든 수를 가능하게 하고 출현시키는 근원으로서 말이죠.

하지만 오전 세미나에서도 제기되었던 그렇다면 분절2는 왜 필요했는가에 대한 질문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불교의 철두철미한 현실주의 때문입니다. 불교의 핵심은 어쨌든 현실의 드러난 그대로를 긍정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지금은 A로, B로 이렇게 드러났구나, 하는 것에 대한 긍정입니다. 어떤 것을 진리라고 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이 무가치하다는 유치한 사고 방식이 아닙니다. 어떤 것도 진리라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떤 것이든 드러난 그대로 소중한 것입니다. 세상에 어떤 진짜도 없기 때문에 어떤 가짜도 없습니다. 세상은 그 자체로 여실如實하게, 진짜인 것처럼 존재할 뿐입니다. 그렇기에 모든 것을 긍정할 수 있는 힘, 드러나는 무본질적 분절을 긍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존 케이지의 ‘4분 33초’라는 연주에서는 피아노 앞에서 4분 33초 동안 앉아 있습니다. 그는 그 공연장에서 들리는 모든 소리들까지 음악의 범주를 확장합니다. 기존에 세워져있던 음악과 소음의 경계를 허뭅니다. 존 케이지를 선종적이라고 하는 것은 기존의 규정과 분절이 임시적이란 걸 보여준 점에 있습니다. 모든 존재자가 투명하다는 것. 그것을 침묵이나 정적으로 보여주는 게 아니라 모든 소리가 음악이라는 것으로 보여줍니다. 분절2는 언어와 분절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규정성에 갇히지 않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게 바로 시적 언어, 예술의 표현이라고 생각됩니다.

 
  1. 이마주


 

페루 출신의 문화인류학자 카스타네다는 멕시코에서 현존하는 샤먼들을 만납니다. 거기서 그는 현실이 가장 비현실적으로 되는 체험, 시공간의 완벽한 전환을 경험합니다. 이 세계에는 다른 유의 시공간이 공존하고 있고, 우리가 느끼는 현재는 그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을 이야기 해줍니다. 우리는 단일 시간 속의 삼차원만을 인식하며 다른 것은 신비로 간주해버립니다. 그러나 ‘이마주’는 근대적 이성이나 지성으로 해석될 수 없는 차원을 말합니다. 실재에 대한 모사나 환상이 아닌, 하나의 세계로 환원될 수 없는 세계상, 원형의 표현들이 가득한 신화의 세계 차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샤먼들에게는 그런 영역이 실재이며, 그런 체험이 더 진짜입니다. 우리는 가끔 나 자신이 무척 낯설게 느껴지거나, 다른 어떤 나라가 너무 낯이 익다는 경험을 합니다. 어느 순간이 어디선가 겪은 것 같은 데자뷰 현상이나, 그 순간 한 치의 의심 없는 현실이었던 꿈을 경험합니다. 이즈쓰가 제시한 의식의 구조 도표에서 이마주의 공간 M영역이 가장 크게 묘사된 것은 우리가 인식 가능한 표층세계의 영역이 매우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마주란 실제를 생산하는 더 근원적인 상의 세계, 곧 미묘한 실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마주를 들뢰즈의 개념인 시뮬라크르와도 유사하게 볼 수 있습니다. 순간적으로 생성되었다가 사라지는, 우리 인식에 포착되지 않는 자기 동일성이 없는 복제들. 그것들을 복권시킬 때, 코드화된 세계의 절대성을 허물 수 있고, 코드들을 고장 낼 수 있습니다. 코드에서 또 다른 코드로의 이주가 아니라, 그것들로부터 도주시킬 수 있는 힘, 해방으로서의 흐름들을 발명할 수 있습니다.

 

 

매우 늦은 후기임에도 불구하고 또 제가 이해한 것들이 아닌 모르는 것들을 써버렸네요...

횡설수설합니다만, 그래도 아예 모르는 상태에서 조금 더 디테일하게 모르는 상태로 꾸역꾸역 가고 있는 막연한 느낌적인 느낌이 듭니다 @@
전체 2

  • 2018-08-20 20:46
    오~ 꼼꼼한 후기! 대충 후다닥 올린 공지와 다른 후기네요! 주역을 신화적 사고와 연결한 게 계속 기억에 남네요. 고대에는 일상에서 주역과 같은 것을 통해 자신의 의식을 표층에만 묶어두지 않는 기술이 있었다는 게 계속 관심이 가요. 神적인 요소가 자꾸 땡기네. ㅋㅋ

  • 2018-08-20 22:44
    조금 더 디테일 하게 모른다는 말이 안되는 말이 왜 설득력있는가@_@
    전 뜬금없을 수도 있지만 비정상적인 것, 광인을 무조건 부정하거나 긍정하는 게 아니라 견고한 사고를 전환하는 힘으로 볼 수도 있구나 싶어서 흥미진진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