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NY

절탁 NY 2학기 4주차(5.29) 공지

작성자
나영
작성일
2021-05-23 19:21
조회
122

“보는 법을 배우는 것-이것은 눈으로 하여금 평정에, 인내에, 그리고 자신에게-다가오게-놔두는 일에 익숙하게 하는 것이다; 판단을 유보하고, 개별적인 경우를 모든 측면에서 다루어보고 포괄하는 법을 배운다는 것이다. (...) 거기서 본질적인 것은 결정을 유예시키고자 하는 ‘의지’가 아니라, 바로 그럴 능력이다. 비정신적인 것, 천박한 것은 모두 특정 자극에 저항할 수 없는 무능력에서 나온다.” (우상의 황혼)



니체가 말하는 보는 법을 배운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집중해서 본다거나 세밀하게 보는 것과는 다릅니다. 자극에 대한 반응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것에 잘 반응하는 것을 말하지도 않습니다. 모든 것에 반응하고 빠르게 대응하는 것은 하강이자 쇠진한 것이라서요. 그래서 자극에 대해 저항할 수 있어야 합니다. 조 토론에서는 평정과 인내의 습관을 부여하고, 사물이 자신에게 다가오게 하도록 훈련이 필요하다, 조건화된 방식으로 살지 않도록 사유하는 것은 의지가 아니라 능력의 문제니 니체의 긍정을 이런 능력을 기르는 기르는 문제와 함께 생각해볼 수 있겠다는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바라볼 때 자신의 관념을 덧씌워서 볼 수밖에 없습니다. 관념을 덧씌우지 않고 세상을 바라보는 일,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서는 우선 그 관념은 오류투성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요.

니체에게 타인의 고통을 함께 느끼는 연민은 인간의 자기극복에 있어 최대의 장애물입니다. 연민은 자신의 건강을 해치는 것이자 생리적으로 털어냈어야 할 것에 대한 애착과도 같다는 겁니다. 저는 차라투스트라의 ‘이웃사랑에 대하여’라는 단편을 인간은 서로 간의 자기극복을 도와주는 관계가 되어야 하므로 이런 연민을 갖지 않는 우정 관계를 가져야 하지 않겠냐는 질문으로 이해했거든요. 그런데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에 드러나는 연민은 니체의 연민과는 달라요. 니체가 도스토예프스키를 “내가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었던 단 한 사람의 심리학자였다”고 평가했는데, 그의 작품에 보이는 연민이 넘쳐나는 인물들을 보면서는 “남 걱정 마시고 너나 잘하세요”라고 말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이런 연민을 통해 도스토예프스키는 선악을 넘어가려고 했던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 변호를 좀 해보자면, <죄와 벌>에서 라스꼴리니꼬프를 향한 소냐의 연민은 그저 그를 딱하게 여기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의 죄를 함께 떠안아 어쩌면 그보다 더 고통을 받는 경지에 도달한 연민이에요. 왜 그래야 할까요? 이 연민의 뿌리를 보면 어떻게 연민으로 선악을 넘어가려고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모든 사람은 모든 사람에 대해 죄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나 혼자 고결한 척, 무고한 척 이런 거 안 통해요. 누구를 지목하며 죄인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가 없습니다.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죄를 심판하는 재판 장면이 나오는데요. 검사는 배심원들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어느 한 개인의 범죄에 놀라기보다는 우리들의 만성화된 사고에 더 두려움을 가져야 한다고요. 죄를 지은 행위를 비판하기는 쉬워도 비슷한 마음을 품고 있던 자신을 돌아보기란 어렵습니다. 하지만 감정도 행위라는 니체의 입장에서 검사의 대사를 읽어보면 십분 이해가 됩니다.

 
“물론 그자는 몹쓸 놈이라고 할 수 있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서 그런 자가 어디 그자 한 사람뿐이겠습니까? 어쨌든 그자처럼 살인까지는 하지 않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속으로 그자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고, 또 그렇게 느끼고 있습니다. 마음은 파렴치한 놈과 똑같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홀로 자신의 양심과 마주치게 되었을 때, 이렇게 자신에게 물어보았을 것입니다. <체면이란 대체 뭘까? 피를 흘렸다고 해서 그것을 죄라고 하는 것은 편견이 아닐까?>하고 말입니다.”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이 재판 장면을 그대로 <죄와 벌>에 가져와 볼게요. 두 여인을 살해한 라스꼴리니꼬프의 죄는 과연 그 혼자만의 죄라고 할 수 있을까요? 가난한 사람들에게 높은 이자를 받으며 전당포를 운영하는 고리대금업자를 죽이고 싶어 했던 사람은 라스꼴리니꼬프 한 사람만이 아닙니다. 술집에서 우연히 다른 사람들의 대화를 듣게 되었는데, 그들도 노파를 죽이고 싶어 합니다. 또 자신의 여동생 두냐를 괴롭게 하는 사람들 때문에 돈이 필요했고 이 역시 살인의 동기가 됩니다. 매춘으로 자기 자신을 살해한 소냐도 마찬가지예요. 소냐의 아버지는 실직하고 술을 퍼마셔요. 그러다 새로 일자리를 얻었는데 거기서 또 짤려요. 소냐는 가족들을 먹여 살리겠다고 일을 했는데 월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쫓겨나요. 그러다 매춘을 제안받게 되죠. 많은 사람이 얽혀있는 문제입니다. 그러니 라스꼴리니꼬프가 악인이네, 소냐의 죄가 소냐 한 사람의 죄네 말할 수 있냐는 겁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질문을 독자에게 되돌려줍니다. 저는 <죄와 벌> 마지막 부분 소냐와 라스꼴리니꼬프의 대화가 인상적이었습니다. “교차로로 가서 사람들 앞에 절을 하고 땅에 입을 맞춰, 그 땅에 죄를 지었으니까. 그리고 온 세상을 향해 큰 소리로 ‘나는 살인자다!’라고 말해.” 

작가는 또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어떤 근거나 목적이 있으면, 그것이 다수를 위한 일이면 누군가를 죽여도 된다고 생각하냐고요. 그래서 하나의 악을 통해서 많은 선을 행하는 만인의 행복이 가능하겠냐고요. 자신의 고통을 감당하지 못하는 라스꼴리니꼬프를 통해 도스토예프스키는 이에 대한 답을 하고 있다고 봅니다. 토론에서는 고통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그리스 비극이 등장했습니다.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삶의 가장 가혹한 문제들에 직면해서도 삶 자체를 긍정하는 것”을 디오니소스적이라고 명명했습니다. 디오니소스가 삶의 모든 고통을 긍정하고 또 고통의 총체로서의 삶을 긍정한 것과 비교해보면, 초인을 꿈꾸었던 라스꼴리니꼬프가 왜 인간을 넘어갈 수 없었는지 알겠습니다.  이 문제는 4학기에 읽을 <비극의 탄생>에서 더 고민하면 되겠죠?

<죄와 벌> 마지막 페이지에서 “변증법 대신에 삶이 도래했다”는 문장이 기억에 남습니다. 함께 읽은 <우상의 황혼>의 보는 법을 배우기, 그러니까 관념을 덧씌우지 않고 세상을 바라보는 일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니체와 도스토예프스키는 관념이 아닌 삶으로 뛰어들라고, 생각은 그만하고 곧장 삶에 몸을 내맡기라는 과제를 우리에게 남겼네요. 이제 도덕의 문제는 <악령>으로 이어집니다. 악령을 먼저 읽은 한 도반께서 “돌려까기 많아서 나영샘이 완전 좋아할 거다”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럼 얼마나 좋을지 돌려까기 좋아하는 분들과 잘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과제 & 공지]

1. <우상의 황혼> 끝까지 읽고 공통과제 쓰기

2. <악령> 1부 끝까지 읽고 니체의 도덕, 힘의지와 결부시켜 생각할 구절 5개 골라오기

3. [내가 만난 니체] 에세이 4페이지 쓰기

4. 다음 주 간식 : 루이샘, 순이샘

5. 과제를 하다가 궁금한 점이 생기면 단톡방에 올려주셔도 됩니다. 내가 모르면 쟤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편히 질문하시면 누군가는 대답을 할 것이고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겁니다.

 
전체 4

  • 2021-05-23 21:17
    저희조에서는 라스꼴리니꼬프가 제기하는 질문, 더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는 어떤 이의 불행과 고통이 허용될 수 있지 않겠냐는 질문이 우리 일상과 동떨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했는데요. 너무나 많은 경우 저희는 어떤 구호 요청, 어떤 문제제기, 어떤 목소리들을 그냥 덮거나 무시하고 외면하고 사는 것 같습니다. 대의나 분위기나 정황이나 시간상의 이유로요. 관념상, 이론상, 계산상으로는 그게 맞고 합리적인것 같습니다. 아무리봐도 옳은 논리지요. 하지만 이것은 2+2=4의 세계, 수학의 세계, 변증법의 세계에서만 맞는 논리인 것 같습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전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고통이 측정가능하고 비교가능해서 무게를 달 수 있다는, 그리고 합리적으로 고통을 제거해 갈 수 있다고, 제거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그런데 나영샘 후기에서처럼, 고통과 삶을 디오니소스의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이 변증법의 미로를 부술 수도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냐가 보여주는 것은 한 인간이 고통을 감당해내는 능력에 있어서의 위대함과 고귀함, 그리고 원망과 아만이 섞이지 않은 성자적인 연미인 것 같습니다. 라스꼴리니꼬프가 눈이 휘둥그레해질!
    관념이 아닌 삶으로 뛰어들라는 말은 곰곰 생각해보게 되네요!

    • 2021-05-24 01:03
      저는 세미나 후 공리주의에 대해 제가 단순한 도덕관념으로 배우고 판단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론에는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인간의 삶과 고통, 행복에 대한 감수성이 배제돼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었어요. [죄와 벌]에서 마르빠 한 사람의 죽음으로 그녀의 유산은 스비드리가일로프에 의해 두냐, 소냐와 그녀의 동생들과 새로운 약혼녀의 행복(?)을 위해 쓰이죠. 스비드리가일로프는 결과적으로 보면 나름의 공리주의(?)를 실천한 것일까요? 로지온이 공상했던 일이 어떤 점에서 실현된 것처럼 보이지만... 또 루쥔은 자기 사적 허영심을 우선해 치졸한 수단을 다 쓰지만 로지온과 스비드리가일로프처럼 누구인가를 죽이지는 않았죠. 그런데 소냐를 모함해 까쩨리나의 명을 재촉하게 한 것은 아닐까요? 어찌 살아보려는 까쩨리나의 마지막 발악에 루쥔의 영향이 아예 없지 않죠. 이렇게 인과가 얽혀 있는 우리의 삶 속에서 공리주의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러려면 민호샘 말처럼 행불행, 고통이 측정가능하다는 전제가 있어야죠. 우리 사회에서는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전제가 문제 인 것 같아요. 죽은 마르빠와 전당포 노인의 돈으로 나머지 사람들이 당장은 모두 얼마큼의 고통이 제거되고, 얼마큼의 행복을 취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결과는 절대 알 수 없을 것 같아요. 오히려 그 돈으로 나쁜 일에 휘말릴 수도 있고, 뿔냐가 엄마와 반대로 훗날 너무 돈이 많아 오히려 돈에 무감각해져 가난했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상상을 해봤습니다.ㅎㅎ

  • 2021-05-24 00:10
    제가 한 말과 행위에 대해 돌아볼 수 있는 기회는 타인이 개입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한 말이 타인에게 다르게 이해될 때나 과제로 쓴 글이 타인에게 다르게 해석될 때 순간 진땀이 나기도 하지만 자신을 마주할 좋은 기회인 것 같아요.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를 읽고, 느끼고, 해석하게 되는 순간,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기 쉽지 않아요. 니체는 습관적으로 판단하고 분별하는 것을 억제하고 격리할 수 있는 본능을 통제 아래 두는 것을 정신성을 위한 첫 번째 준비 교육이라고 해요. 나와 타인을 ‘보는 법’을 배우는 것, 여기서 본질적인 것은 결정을 유예시키고자 하는 ‘의지’가 아니라 그럴 ‘능력’이라는 것! 이 문구에서 ‘능력’만 기억나 다시 찾아봐야지 했는데 나영샘이 딱 정리해주셨네요^^ 자신으로부터 시작해 타인과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법을 배워나가기 위해 ‘우리에게 수많은 이질적인 타자들이 필요하다’라는 말이 이제 조금씩 이해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다시 마음에 새겨봅니다. (한 도반이 제 에세이를 보고 ‘일기는 일기장에 써라’고 해서 자극받고 쓰는 댓글은 절대 아니에요ㅠ)

    • 2021-05-24 12:50
      앞으로 더 자극해달라는 말을 우아하게 하시는 걸로 이해합니다요. 아무튼 에세이에 '엉엉'울었다고 쓰는 거 금지, 남에게 들은 얘기 소화 없이 곧장 질문으로 가져오기 금지입니당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