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NY

절탁 NY 2학기 3주차 후기

작성자
루이
작성일
2021-05-28 01:38
조회
107
저는 공정에 예민한 편입니다. 어떤 일에 대해 공정하지 않다 느낄 때 발끈하는데 요즘 한강에서 숨진 대학생 사건에 빠져있습니다. 평소 뉴스에 관심이 없는데도, 이 사건은 한 달 전 언론 노출되었을 때부터 신경이 쓰였습니다. 처음에는 왜 한 학생의 실종을 유난스럽게 언론에서 다루는 걸까. 뭐지? 어떤 집 자녀이길래? 라는 불편함을 전제로 한 관심이었습니다. 발견 후에는, 논리에 맞지 않는 정보들로 원하는 결론을 보도하려는 언론 대, 첨예하게 자료들을 찾아 반박하는 유튜버들의 힘겨루기, 그리고 이 사건에 대한 경찰의 수사가 공정한가를 보는 저와 비슷한 대중의 존재(유튜버들이 발품으로 찾은 CCTV 공개 영상의 조회 수가 하루 만에 100만 명에 이르고, 유족의 블로그 게시물에 빠르게 올라오는 만개 이상의 댓글)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후기가 늦은 이유입니다.

뉴스, 블로그, 유튜브의 댓글을 보면 사람들 대부분이 이 사건을 동석자  A씨와 가족을 악, 고인과 유가족은 선으로 (또는 반대로), 주요 언론을 악, 유튜버들을 선이라는 (또는 반대로) 구도를 그리는 게 보입니다. 저도 유사한 구도 속에서, 이 사건의 진짜 진실이 밝혀져 공정하게 매듭지어지기를 바라고요. 이번 학기 우상의 황혼을 시작하며 채운샘은 선과 악을 뒤집는 게 아닌, 선과 악을 나누는 생각이 깔고 있는 전제 자체를 문제 삼는 가치 전도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이 사건만 보더라도 제가(그리고 함께 사건을 보는 유저들이) 얼마나 이분법적인 사고로 세상을 판단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첫 시간,  우상의 황혼에서 저희 조는 예술과 교육에 대해 주로 토론했습니다.

어쩌면 당시 독일 교육뿐 아니라 우리가 받는 교육도 선과 악을 구별 짓는 틀과 니체가 말한 ‘애매한 평균성’을 지닌 인간을 만드는 시작이 아닐까요? 제가 토요일에 등교하던 때에는 학교에서 열심 = 좋은 것, 게으른 = 나쁜 것, 알아서 숙이고, 튀지 않게 행동하는 규칙을 배웠던 것 같습니다. 그것에서 일탈했을 때의 대가, 벌을 체험하거나 보면서,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서 모나지 않고 쓰임새 좋은 인간으로 다듬어지고요. 순이샘 글의 학교생활이 우리 대부분이 기억하는 학교가 아닐까요?

주어진 것에 감사하기, 항상 열심히 하기, 평균 이상이 되도록 노력하기, 남에게 폐 끼치지 말기. 표현만 번지르르해졌지 지금도 이 틀을 속에서 생활합니다. 자연스레 선과 악을 기준으로 생각이 일어나고 판단하고요. 수업에서 전제 자체를 문제 삼는다는 말이 그럴듯하게 다가왔는데, 내가 서 있는 그 자리에서 그 틀을 문제 삼는다. 정말 스스로의 투쟁이 필요한 무거운 문제인 것 같습니다. 그저 열심히 바쁘게 나를 증명하며 쉼 없이 사는 삶을 핑계로, 일정 선 이상 생각하고 질문하기는 항상 미뤄놓고 있으니까요. 지난 학기 조 토론에서 난희샘께서 “가장 바쁜 것이 가장 게으른 것”이라 하시는데 저도 모르게 노트에 받아 적어 샘들이 웃으셨던 기억이 있습니다. 저는 그 말씀에 뜨끔했던 것이지요.

교육자로서 수연샘의 고민이 깊을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인영샘, 민호샘이 인용하신 니체의 보는 법은, 습관에서 벗어나 다르게 보고 감각하기를 제안합니다. 현주샘이 이야기하신 평범함을 지양하는 니체의 고급 교육도 대안인 것 같았습니다. 예술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요. 채운샘은 “예술의 존재 이유라는 게, 이 가치의 토대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일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고요. 이번 분량의 [24] 예술을 위한 예술에서 특히 “예술은 삶의 자극제이다.”라는 문장이 제 마음에 콕 들어왔는데, 이해가 부족해 미뤄뒀던 비극에 관련된 부분을 지안샘이 인용해주신 덕분에 샘들과 “삶의 수없이 많은 추한 것, 강한 것, 의문시되는 것도 역시 등장시키는” 비극적 예술가 다루는 끔찍한 것과 의문스러운 것의 역할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점심 후, 2교시에서는 죄와 벌은 해피앤딩일까라는 질문을 시작으로, 도스또예프스끼가 어떤 가치들을 전복하고 있는지, 특히 세 인물 소냐와 라스꼴리니꼬프, 그리고 스비드리가일로프를 중심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채운샘의 두 질문으로 여러 샘들이 이야기를 간략히 정리해봅니다.

Q1. 초인을 꿈꾸던 라스꼴리니꼬프는 왜 인간을 넘어서지 못했을까?

“단순히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그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항상 무언가 더 큰 것을 원했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갈망이 강했다는 것 하나만 가지고서, 당시에 스스로를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하도록 허용된 사람으로 여겼던 것인지도 모른다.(799쪽)”

로지온에게 인간을 넘어서는 초인이란 뭘까. 니체적 강자일 수도, 소설에서 나폴레옹 같은 범인을 넘어선 초인일 수도 있겠다. 그는 공리주의를 이유로 영웅이 되기를 꿈꾸며, 원칙을 죽이고(살인하고) 기존의 사상과 투쟁해 선과 악의 저편에 서고자 했다. 그런데 점차 죄의식과 두려움을 느끼고, 가족에 대한 걱정, 자기 연민에 빠져 괴로워한다. 그는 살인이 아닌, 약함과 보잘것 없는 마음 때문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자수를 하며 범인의 굴레에 머무른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 자살을 실행한 스비드리가일로프가 라스꼴리니꼬프가 못한 인간을 넘어선 자, 더 동물적인 자일 수도 있겠다.

Q2. 도스또예프스끼는 어떻게 선악을 넘어가려 했나?

인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소설에서는 소냐의 종교적 선을 통해서가 아닐까.

작품에서 그는 인간의 절대적 선이나 악을 그리지 않는다. 예를 들어, 죄와 벌에서는 약자 또는 악으로 여겨질 수 있는 매춘부 소냐가 종교적 선으로 라스꼴리니꼬프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는다. 그가 인간을 믿는다는 건, 삶이 먼저 있고 선악은 후에 덧붙이는 해석이라고 했을 때, 어떤 총체성으로의 인간. 선악이 우선이 아닌 힘의지와 충동으로 우선으로 움직이는 인간에 대한 믿음인 것 같다. 또한 죄와 벌에서는 인간성을 넘어서는 소냐의 인간에 대한 더 큰 확장도 발견할 수 있다. 로쟈의 살인 고백을 들은 후, 소냐는 은옥샘이 인용하신 “당신은, 당신은 도대체 자신에게 무슨 짓을 저지른 거죠!(604쪽)”라며 그에게 죄에 대한 벌을 받으라고, 본인이 그 과정을 함께하겠다고 한다. 로쟈는 그녀에 사랑에 힘입어 벌을 받고, 새로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이야기, 한 사람이 점차로 소생되어 가는 이야기, 그가 새롭게 태어나는 이야기, 그가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옮겨가는 이야기, 이제까지는 전혀 몰랐던 새로운 현실을 알게 되는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다.(810쪽)”

마지막으로, 금주 에세이는 지안샘의 글과 저의 에세이 방향에 대해 샘들의 코멘트를 들었습니다. 그럼 토요일에 뵙겠습니다.
전체 3

  • 2021-05-28 11:18
    한강 대학생 사건이 이토록 영향이 컸군요.
    샘 후기를 보니, 저두 학교를 벗어났음에도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우리의 '폐끼치지 않고 열심히하기 주의'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저 열심히 바쁘게 나를 증명하며 쉼 없이 사는 삶을 핑계로, 일정 선 이상 생각하고 질문하기는 항상 미뤄놓고 있으니까요." 라는 말에 공감했어요.
    중구난방 오갔던 세미나를 잘 정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2021-05-31 08:10
    한강 사건은 이제는 너무 피로도가 높아서 기사 제목만 봐도 스킵하게 돼요. 니체가 말하는 심플한 삶과 무관심함 사이를 오가며 혼란스러움을 느끼게 되기도 하더라구요. 지난주에 루이샘과 공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야겠다 생각하고 갔는데 못 해서 아쉬웠어요. 호옥시 공정무역 커피도 좋아하시나요? 그렇다면 커피라도 한 잔...ㅎㅎ

  • 2021-05-31 22:36
    루이샘과 후기에 언급 하신 내용으로 저희 조 세미나 시간에 잠깐 얘기 나누기는 했는데, 시간이 부족하여 본격적인 이야기를 하지 못해 아쉬웠어요. 니체라면 지금 현대인들이 바라는 ‘공정함’에 대해 무엇이라고 했을지 이러한 질문으로 함께 얘기해 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또 저 번 시간에 민호샘이 언급한 우리 나라 핵 발전소 폐기물이 중국을 거쳐 티베트에 묻혀 그곳 사람들이 병들어 죽는다는 얘기, 쉬는 시간에 수연샘이 해주신 블러드 쉬림프에 대한 얘기도 지금 우리의 삶과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각자에게 강렬하게 느껴지는 사건들은 다르지만 니체와 도스토예프스키의 렌즈로 함께 읽고 이해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삶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지 않을까… [죄와 벌]의 라스꼴리니꼬프와 [악령]의 젊은 세대들의 분노와 광기에 대해 생각해 보면 현재의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에게 넘쳐나는 이 도덕적인 분노와 광기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한때 음모론 좋아하고 편향된 여론에 휩쓸려 스스로 정의롭다고 여겼던 저를 돌아보면서, 앞으로 질문을 놓지 않고 계속 숙고해 봐야겠습니다. (저는 스벅을 버리면서 공정 무역 커피도 버렸어요. 제게 양극단의 허영심을 발견했기 때문이죠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