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NY

절탁 NY 2학기 5주차(6.5) 공지

작성자
민호
작성일
2021-06-01 16:05
조회
86
 

 

새로운 우상부터 영원한 우상까지 모든 우상에 망치를 드는 책, 저자 스스로 “이 작은 책은 중대한 선전포고이다”라고 말했던 <우상의 황혼>을 드디어 다 읽었습니다. 니체는 이 책의 서문을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암울하지만 대중에게 책임 있는 일을 하면서 명랑함을 유지한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제 생각에 니체는 이 놀라운 일은 해낸 것 같습니다. 마지막까지 명랑했고, 자신이 살아간 시대나 한 세기가 흐른 지금의 시대에도 책임 있는 일을 했으니까요. 어떻게 했냐구요? 지금의 우리에게도 너무나 당연하고 자명한 가치들에 의문부호를 던지고 그 우상들이 우상임을 밝히면서 그것들이 소리굽쇠처럼 울리게 만들었으니까요. 이성, 교회적 멸절, 도덕의 반자연성, 원인과 결과의 오류, 개선, 평등, 자유, 진보 등등. 물론 그 작업이 얼마나 위대했는가는 니체의 말을 직접 읽고 우리의 우상들을 직접 때리고 캐봐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세미나는 그런 일을 하는 자리로서 적합한 것 같습니다.

토론을 하면서 저는, 니체를 결코 자유주의자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희는 은옥샘의 과제로부터 니체가 제도를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는데요. 그는 ‘현대성 비판’이라는 절에서 현대인들의 제도는 더 이상 쓸모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지 인간을 규격화하는 제도가 나쁘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니체의 비판은 제도가 어떠하다 이래야 한다는 표면적인 문제를 다루지 않습니다. 다만 “제도들을 자라나게 하는 본능들을 모두 상실해버린”, “제도를 제도로 만드는 것이 경멸받고 증오되며 거절되는” 서구의 ‘현대적 정신’을 향합니다. 그것이 로마제국의 것이든 러시아의 것이든, 어떤 제도들이 설립되기 위해선 악의에 이를 정도로 반자유주의적인 의지와 본능과 명령이 있어야만 한다고 니체는 말합니다. 전통에의 의지, 권위에의 의지, 수 세기에 걸친 책임에의 의지. 이런 압력과 시간 없이는 어떤 훌륭함도 아름다움도 만들어질 수 없습니다. 어쩐지 권위주의적이고 꼰대처럼 느껴집니다. 저희의 이런 ‘불편함’을 예상이라도 한 듯 니체는 덧붙입니다. “‘권위’라는 말이 소리를 내기만 해도 사람들은 새로운 노예상태의 위험이라고 믿는다. 우리의 정치가와 우리의 정당들의 가치 본능에는 데카당스가 그만큼 심해져 있다.”(179쪽)

니체는 비도덕주의와 가치 전도를 말합니다. 하지만 도덕을 넘어가고 가치를 전도한다는 것을 그저 도덕의 공백 상태라거나 어떤 가치도 없이 다 허용되는 상태로 오해해서는 곤란합니다. 니체는 사람들이 오늘을 위해 살고, 아주 재빠르게 살아간다고 말합니다. 모든 권위에 등돌리고, 하마터면 열심히 살뻔했다고 떡볶이를 권장하는 우리의 모습은 니체가 보기 자유가 아니라 무책임이고 방종일 것입니다. 니체에게 문제는 부수는 것 자체보다도 만드는 것에 있습니다. 이것은 현대의 데카당스를 비판하는 것도 마찬가지여서 그는 현대인이 틀렸고 고대인들이 맞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거꾸로 갈 수는 없습니다. 그들을 참조하는 것이 우리를 진단하는데 도움이 될지라도요. 우리는 “말하자면 데카당스 안에서 한 걸음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183쪽)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가치들을 무화시키고 도덕들을 폐허로 만드는 것이 대수가 아닙니다. 우리 자신을 형성시키고 굳혀온 지층들이 무엇이었는가를 발견했다면 그것을 부정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것을 완전히 떠나버리지도 그렇다고 거기에 종속되지도 않는 다른 움직임, 다른 선을 그리는 품행을 만들 것인가만이 문제가 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요구되는 것이 훈련입니다. 니체는 모든 품위와 강함과 아름다움은 우연이 아니라 장기간의 축적되고 상속된 노력의 산물이라고 말합니다. 좋은 취향을 위해서는 “많은 것을 행하고 많은 것을 내버려 두어야 한다”(188쪽)고 말하죠. 마음먹음, 다짐, 의지의 문제가 아닙니다. 물론 그런 정신적인 발심도 중요하지만, 구체적이고 비근한 행위들과 그 행위들이 가능한 조건을 조직하는 일로 이어지지 않으면 그 발심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출발점은 몸과 품행과 섭생과 생리학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자신의 손과 발과 입과 장기가 하루 동안 무엇을 하며 보내는가를 의미합니다. 온 지체가 무엇에 얼마나 닿아 있는가, 무엇을 다가오게 하고 있는가, 무엇을 발음하고 무엇을 떠올리는가. 한 마디로 어떻게 사는가. 바로 이 ‘실존’을 되는대로 방치하지 않고, 점검하고 다듬고 다지고 닦는 일, 이것이 니체가 말하는 훈련이고 가치 전도와 같은 멋진 일이 일어나게 하는 지난한 일상일 것입니다. 푸코의 표현을 빌리자면 ‘실존의 미학’이고, 사자성어로는 저희 프로그램 이름인 ‘절차탁마’입니다.

이번 학기 두 번째 문학작품 <악령>에 들어섰습니다. 비교적 인물 수도 적고 사건도 분명했던 <죄와 벌>에 비해 <악령>은 19세기 러시아의 사상들도 등장하고 인물도 많은 데다가 상권이 끝날 때까지 뾰족한 사건이 터지지도 않아서인지 조금 산만하고 뻑뻑하다는 말씀도 있었는데요. 저희 조에서는 인영샘의 열정과 역량 덕분에 전체적인 흐름과 인물에 대한 가닥을 좀 잡을 수 있었습니다(하드캐리!). 주로 스쩨빤 선생과 바르바라 부인의 우정인 듯 애정인 듯 집착인 듯 종잡을 수 없는 관계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저희가 흔히 겪는 평등이 전제된(공상일지도 모르지만) 친구 관계와는 달리 거기에는 돈과 지식과 애정과 교육과 명예 등의 복잡한 선들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특히 저희는 바르바라 부인의 “이 일을 결코 잊지 않겠어요!”란 반응이 미묘한 애정과 질투에서 비롯된 말이었음을 이해하고는 놀라워했는데요. 자기가 무언가를 배울 수 있었던 유일한 심리학자가 도스토예프스키였다는 니체의 말이 너무도 이해가 되었습니다.

강의에서는 <악령>이 러시아의 네차예프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옳지 않는 모든 이들을 죽이고 부정하는 방식으로밖에는 다른 행동을 생각하지 못하는 테러리즘과 무정부주의 앞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도덕적 폐허 위에서 우리는 뭘 할 수 있을까? 비도덕이나 선악의 저편이란 기존의 도덕을 그냥 무화시켜버리는 것일까? 그렇게 모든 것을 부숴버린 자들은 결국 어디에 도달했는가? 이것은 니체를 읽는 저희에게도 꼭 필요한 질문인 것 같습니다. 과연 히틀러나 스탈린과 같은 파시스트들은 강자일 수 있나? 그들은 라스꼴리니꼬프가 그린 초인처럼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우월한 것들의 성장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제거합니다. 이것이 니체적인 초인일지는 더 물어봐야 합니다. 그들은 기존의 인습을 깨부순다는 점에서 강할지 몰라도 어쩌면 니체가 병든 강자라고 표현한 범죄자들일지도 모릅니다. 이런 질문이 <죄와 벌>에서는 라스꼴리니꼬프가 마침내 논리와 변증법의 관에서 나와 사람들의 얼굴과 대지를 바라보는 것으로 답해지는데요. 이 사건을 우리의 말과 생각으로 소화시키는 일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또 악령에서는 어떻게 답해질지 궁금하구요.

 

[과제 & 공지]
  1. <안티크리스트> 1~26절(249쪽)까지 읽고 공통과제 쓰기

  2. <악령> 2부(중권 5장)까지 읽기(토론은 따로 없습니다)

  3. [내가 만난 니체] 에세이 5페이지 쓰기. 오후 내내 토론 및 코멘트가 있어요! 코멘트를 받고 돌아갈 기회니 마음껏 써보아요 ㅎㅎ(조원 수 +1만큼 인쇄해주세요)

  4. 다음 주 간식 : 인영샘, 경희샘

  5. 과제를 하다가 궁금한 점이 생기시면 언제든 단톡방에 올려주셔도 됩니다. 아무 말이나 해주셔도 되구요! 지각과 결석은 모두와의 약속이니 반드시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미리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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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6-02 15:37
    하마터면 열심히 살뻔했다고 떡볶이를 권장하는 우리..ㅎㅎㅎ 정말 우리에게는 '우리 우상들을 직접 때리고 캐보는' 작업이 절실한 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