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NY

절탁 NY 2학기 4주차 후기

작성자
정아
작성일
2021-06-01 23:04
조회
85
고통, 원인-충동, 총체성

2학기 네 번째 시간, 저희 조는 <우상의 황혼>에서 여러 샘이 공통으로 뽑아온 ‘고통’에 관한 문장으로 토론을 시작했습니다. 지난 시간 읽은 부분에서 니체는 인간에게 원인을 찾고자 하는 충동이 있음을 보여주었지요. 우리는 어떤 상태에 있게 되든 그런 상태에 있게 된 원인을 찾으려 한다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고통을 겪게 되면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지 꼭 알아내려 합니다. 고통에 책임이 있는 사람을 찾아내고 그에게 비난을 퍼붓고 단죄하려 하죠. 니체는 고통의 책임을 남에게 돌린 경우와 자신에게 돌린 경우로 각각 사회주의자와 그리스도교인을 꼽습니다.

저희 조에서는 원인을 찾으려는 강한 충동이 ‘불행을 겪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 같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이처럼 강한 원인-충동으로 인해 남을 탓하거나 자책하는 일이 반복된다면, 어떤 일의 여러 원인을 생각해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인가 하는 물음도 있었습니다. 저는 이 문제를 니체가 언급한 ‘보는 법을 배우는 것’과 관련시켜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우리에게 이런 충동이 있다는 걸 이해하고, 사건 앞에서 즉각적인 판단을 유보한다면 이런 원인-충동으로 빚어지는 오류를 줄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에 대해 니체가 말한 전체성, 총체성과도 연결시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어떤 사건이나 사물을 전체 속에서, 총체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무엇일지에 대해서요. 총체성에 대해 니체는 ‘자신을 삶으로부터 떨어뜨리지 않는 것’, ‘이성과 감성과 느낌과 의지를 분리하는 않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근대 이후 우리는 모든 걸 분리시켜 생각하는 데 익숙해졌지요. 신체와 정신을, 이성과 본능을, 행위와 자신을 분리시켜 생각합니다. 어떻게 이런 습성에 맞서 싸울 것인가, 이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인 것 같습니다.

자기 연마와 실천으로서의 배움

니체가 말한 ‘자기 자신을 되는 대로 방치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이기적인 것과 이타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얘기해보았는데요, 니체는 이 둘에 관해 이야기할 때 그 기준이 우리와는 완전히 다르죠. 우리가 아는 개념과는 정반대인 것 같기도 하고 둘이 서로 구분이 안 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채운샘도 강의에서 ‘다른 차원의 도덕(윤리)’에 관해 이야기하며 잠시 언급하셨듯이, 니체적 의미에서 ‘이기적이 되라’는 말은 ‘자신에게 정말로 유익한 일을 하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내게 정말로 유익한 행위, 나를 명예롭게 하는 행위, 나를 강하게 만들어 줄 행위가 무엇인지 충분히 숙고하고 그것을 하라.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에게 힘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하고, 자기를 통제하고 통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고행과 수행이 필수적으로 따르게 되지요. 이런 수행으로 자기 행위를 조형하는 일, ‘자기 연마’와 ‘실천’이 없이는 다른 차원의 도덕, 새로운 윤리를 말할 수가 없습니다.

샘은 푸코가 말한 ‘실존의 미학’과도 통하는 지점이 있다고 하셨죠. 자신의 존재를 미학적으로 만드는 것은 자기 연마와 실천의 문제이기도 하다고요. 윤리란 ‘실존의 미학’이자 ‘부단한 실천 자체’이기도 하다는 것, 이번 강의에서 기억에 남은 말입니다. 자신의 존재를 실존의 미학으로 조형해내는 일, ‘배움’이란 이처럼 계속 연마하고 실천하는 문제라는 것.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죄와 벌>

이번 주부터 <악령>을 읽기 시작했는데요, 1부에서는 아직 본격적인 내용이 나오지 않고 여러 인물들의 일화만 이어져서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알 수가 없었다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1부 말미에서 사건이 발생하고 주요 인물들이 등장하며 기대감이 오른 만큼, 2부는 좀더 수월하게 읽히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채운샘은 <악령>과 <죄와 벌>이 모두 ‘선악을 넘어서는 문제’를 말하고 있지만, 도덕을 해체한 자리에서 마주하는 두 가지 가능성의 예를 각각 보여주고 있다고 하셨죠. 작품의 끝에서 <죄와 벌>은 새로운 도덕의 가능성을, <악령>은 완벽한 폐허를 마주하게 됩니다. 두 작품 모두 도덕을 해체하는 자들이 등장하고, 어떻게 보면 그들은 니체가 말하는 강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강자냐 약자냐가 아니라, 그의 힘의지가 건강한가 병들었는가를 봐야한다고 하셨죠. 강자로 드러나는 방식이 범죄자나 사이코패스일 수도 있는데 이들은 그저 병든 약자일 뿐입니다.

<죄와 벌>의 라스꼴리니꼬프도 병든 자에 속하죠. 그는 자기 논리에 갇혀 이미 병이 든 상태였습니다. 그것이 병든 사상으로 나왔고, 결국 살인까지 저지르게 되지요. 그는 도끼로 노파를 내리치는 순간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그의 심리적 여정이 시작됩니다. 샘은 소설에 묘사된 로쟈의 ‘방’의 모습에도 그의 심리상태가 드러난다고 하셨어요. 그는 그 차단된 세계 안에서 자신의 생각 안에 갇혀 지냅니다. 이런 삶의 방식은 유형지에 가서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거기서도 로쟈는 방을 만들고 모두를 차단한 채 혼자 지냅니다. 유형수들도 그를 피하며 적의를 느끼고요. 반면 소냐는 반대였지요. 뭔가 특별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모두가 소냐를 좋아합니다.

샘은 소냐의 특별한 점으로, 고통이든 시련이든 자신에게 다가온 모든 걸 거부하려 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자세를 꼽으셨지요. 반면 라스꼴리니꼬프는 자신의 논리 외에 모든 걸 거부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믿음으로 다른 사람의 믿음을 심판하고자 했죠. 신의 행위를 하려고 한 점에서 그는 무신론자임에도 불구하고 유신론자가 된 거라고 샘은 설명하셨어요. 하지만 생이 예측불가능함 자체임을, 인간이 무엇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인 후 자신이 만든 방이자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다고요. 그렇게 <죄와 벌>은 로쟈의 소생을 예고하며 막을 내립니다. 그와는 조금 다른 결말을 준비하고 있는 <악령>의 2부는 우리를 어디로 데려다줄지, 또 부지런히 읽고 토요일에 만나요, 샘들!
전체 1

  • 2021-06-02 13:42
    자신에게 느껴지는 고통을 감당하는 방식이 니체에게나 저희에게나 중요한 척도라고 생각이 되네요..
    그리스도교인, 사회주의자, 그리스인, 괴테, 니체, 소냐와 라스꼴리니꼬프 등 많은 사람들에게서 고통과 관련된 의지의 방향성 혹은 감수성의 차이를 주목해보아도 재미있겠네요!
    일목요연하고 정갈한 후기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