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 S

1학기 6주차 후기

작성자
윤순
작성일
2021-03-29 09:00
조회
111
- ‘내가 만난 스피노자글쓰기 준비

스피노자와 만나고 우리에게 어떤 변용이 일어났을까요? 공부라고 하는 이성적 활동에서 일어난 변용에 영향을 준 것들에는 읽게 된 책 뿐 아니라 시공간적 마주침(공간, 학인, 시절 등)들이 포함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글쓰기를 하면서 봉착하는 반복되는 문제를 발견합니다. 저 같은 경우는 스피노자의 철학을 이론적으로 접근해서 설명하려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다 보니 스피노자와 제가 만난 지점이 드러나기보다 꽉 막힌 이론적 설명이 나열되는 글을 주로 쓰게 됩니다. 채운샘께서는 공부를 하며(책을 읽고, 토론을 하고, 강의를 듣고, 글을 써가며) 어떤 지점에서 나를 새롭게 보게 되었는지 즉 자기 진단이 선행되고, 글은 이 지점에서 출발하는 것이 좋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가졌던 익숙한 관념들’로부터 출발하는 게 아닌 스피노자라는 렌즈를 통해 만나게 된 문제에서 출발하는 글쓰기. 이 글쓰기에서는 우리가 같은 책을 읽고 토론하고 있지만, ‘각자의 스피노자’가 다르게 출현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변용되는 지점들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죠. 스피노자를 공부하며 삶에 있어서의 달라진 질문과 변화는 각자 다르게 나타납니다. 내가 스피노자를 이해한 방식이 ‘내가 만난 스피노자’가 됩니다. 스피노자를 통과하며 쓰게 되는 이번 글에서는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감수하는 방식(느끼는 신체)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Key word’(스피노자의 개념) 하나를 정하고 자신의 변용 지점들이 드러나야 합니다. 따라서 이번 ‘내가 만난 스피노자’의 글쓰기 작업은 스피노자의 난해한 개념들을 모두 설명하려는 이론적 글보다는 ‘편안하고 솔직하게’ 단 한 가지라도 자기가 소화한 스피노자의 개념이 자신의 삶 속에서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를 서술하는 글이 되어야 합니다. 각자에 의해 쓰여 질 ‘나밖에 말할 수 없는 스피노자’들 기대됩니다.^^

여섯 번째 『윤리학』 강독 토론에서는 ‘1부 신에 대하여’가 끝났습니다. 이에 채운샘은 강의에서 스피노자는 왜 『윤리학』을 신으로부터 출발했을까를 새로 오신 선생님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스피노자는 왜 『윤리학』을 ‘신에 대하여’부터 써야 했을까요?

- 스피노자는 왜 윤리학신에 대하여로 시작했을까?

우리에게는 기원(진리)을 찾고 싶은 지적 욕망이 분명히 있습니다. 근원이 되는 궁극적인 ‘무엇’이 신이 될 수 있었고, 지금도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스피노자가 ‘신’에서 시작한 것이 이 지적 욕망을 실현하기 위함이었을까요? 실천적 측면에서 근원을 안다고 해서 이 작업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까요?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채운샘은 스피노자가 실재 삶을 긍정하기 위해윤리학을 신에서 시작한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Yes’로만 말할 수 있는 긍정, 이 긍정은 인정이나 정서적으로 좋음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윤리학』에서 조건적 긍정이 아닌 절대적 긍정, 부정이 없는 체계를 만날 수 있습니다. 긍정이 ‘현행적’임을 볼 수 있습니다.

채운샘은 얼마전 지인분의 회갑연을 참석하셨다고 합니다. 노년의 시작을 나누는 ‘회갑연’, 우리가 ‘노인’, ‘노화’ 등의 고유명사를 떠올릴 때 긍정적이기는 쉽지 않습니다. 늙지 않는 생명체는 없는데도 우리는 이 당연한 진실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이러한 고유명사들에 대해 부정적 반응이 자동적으로 일어나지요. 요즘 문제가 되고 있고, 누구나 노년에 가장 피하고 싶은 치매는 노화의 증상입니다. 하지만 치매가 나타나면 그것을 숨기려하고, 초기에 주변에서 도와주려해도 숨기고 화를 내기에 쉽게 발견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가 자신의 신체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이러한 반응이야말로 자신의 변화를 부정하는 것이겠지요. ‘자기’가 어떠해야 한다는 표상을 붙든 결과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어떤 이상적 ‘나’가 있고, 우리는 표상된 ‘나’를 내려놓지 못합니다. 신체는 변화를 맞이했는데도 말이죠. 자아의식을 붙잡고 변용, 관계의 변화, 시간의 흐름에서의 일어나는 현존을 긍정하지 못합니다. 채운샘은 이 시점에서 삶을 긍정한다는 것으로 ‘기저귀를 차게 되더라도 어떻게 유머를 잃지 않을 수 있을까?’를 사유해 보는 것을 제안해 주셨습니다. 긍정은 가볍게 공유하는 데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스피노자의 긍정은 실존에 대한 전면적 긍정입니다. 어떻게 현행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것이 긍정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이야 말로 우리 삶의 화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나를 긍정하는 순간 다른 것은 부정하게 되는 +/- 구조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는 나와 너가 분리되어 있다는 전제에서 성립하는 구조입니다. 또한 타인의 인정 여부에 따라 자신의 삶이 긍정 또는 부정되는 게 아닌데도 우리는 타인의 인정에 집착하고 보다 더/보다 덜에서 일어나는 정념에 사로잡혀 삽니다. 나를 규정하는 순간 남을 규정하게 되기에 자기에 대한 의식에서 출발할 때, 우리는 전면적 긍정과는 멀어집니다. 내가 아닌 내가 속한 세계를 긍정하는데서 출발할 때, (실체, 자연, 세계)으로부터 시작할 때, 전체와 개체를 동시에 긍정하는데서 출발할 때, 우리는 +/-구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스피노자 철학이 개체와 전체를 동시에 긍정하는 것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스피노자 철학 체계(『윤리학』)에서는 나(자아의식)로 출발 할 수 없습니다.

전체는 n개의 부분들의 합이 아니며, 근원(기원)을 통해 실존을 이해하지 않고, 실존 자체를 그대로 이해하는 접근을 우리는 스피노자, 니체, 들뢰즈의 철학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이들 철학은 개체와 전체의 관계에서 출발합니다. 이 관계와 개체와 개체의 관계는 무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개체도 전체 속에 개체이고, 개체와 개체의 관계에 의해서만 나라는 개체가 실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피노자의 ‘신’도 궁극적 원인인 신이지만, 스피노자는 ‘신에 대하여’에서 신학적 가상을 제거하고, 자연으로의 실체(그냥 이대로 실재하는 세계, 그대로 그러함의 세계)인 신을 정의하고 증명합니다.

요즘 우리가 읽고 있는 라이프니츠는 신 또는 세계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을까요?

- 라이프니츠의 실체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는 비슷한 시기(17세기)와 장소(유럽)에 살았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영향을 준 시대적이고 공간적인 요소들이 겹치기도 하고, 라이프니츠는 스피노자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둘은 상반된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라이프니츠의 글들을 읽으면서 스피노자와 비슷한 지점과 차이가 나는 지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라이프니츠는 다방면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의 연보를 보면,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공적 업무와 지적으로 탐구하고자 하는 분야들에서 한시라도 멀어지지 않은 듯 보입니다. 이런 경향의 한 예로 채운샘은 12세기 성립된 중국 주자의 성리학(리와 기의 개념)과 중국의 역 개념을 라이프니츠는 자신의 철학을 얘기하기 위해 독해했다는 것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그는 기독교의 신과는 완전히 다른 접근인 동양의 자연의 이치를 자기가 이해하는 방식으로 변용하여 중국의 자연신학이라는 이름으로 기술합니다.<라이프니츠가 만난 중국>

『모나드론』에서 실체 개념이 분명해지기 전에, 개체적 실체, 물체적 실체, 단순한 실체, 복합적 실체 등 라이프니츠의 실체 개념은 변화합니다. 후에 물질이라고 할 수 없는 모나드로 설명됩니다. 영혼과 육체가 결합한 기관들의 집합이 모나드(열등한)이고, 최상위에 하나의 모나드로 된 영혼과 하나의 모나드로 된 물체(우월한 모나드)가 있습니다. 이것을 범유기체론(프렉탈 구조)이라 하고, 이것이 라이프니츠의 우주입니다. 이 우주는 상부/하부 구조를 가진 실체입니다. 실체들 안에 내재되어 있는 질서(사물의 움직이는 원리)가 영혼이자, 가장 완전한 영혼(신: 자연)입니다. 영혼이 물질을 만들어 낸다고 이야기 됩니다. 영혼과 물질이 결합된 것을 실체적 형상이라고 합니다. 스피노자의 정신과 신체의 수평적 관계와는 다르게 라이프니츠의 영혼과 신체는 수직적으로 영혼이 물질의 상위에 위치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 공통적으로 어떻게 도덕의 세계(사회)를 자연계와 일치시킬 것인지에 대해 사유하고 있습니다. 도덕의 세계는 신학에 의존하고 있고, 이는 외부에 기준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존재론적 근거와 윤리적 근거가 일치하지 못한 체계는 부조리하기 때문에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는 이를 일치시키려 했습니다. 인간 사회에서 출발하는 게 아닌 인간의 정신, 정념, 신체를 기하학적(자연의 원리(?))으로 다루겠다는 것이 스피노자의 시도입니다. 채운샘의 이와 같은 강의를 들으며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논리가 자연의 논리에 부합하지 않기에 스피노자는 존재론적으로 인간도 자연의 원리를 따른다는 전제를 가지게 되었고, 인간중심적으로 가치 평가되고 있는 세계(신)에 대한 비판적 지점을 도출할 수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간사회 역시 더 크게는 자연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라이프니츠도 자연학적으로 사유했지만, 자연 원리를 기독교의 신(창조자)의 존재를 확실히 하는데 적용하는 방향(초월론적 경향)으로 갔던 것 같습니다. 서양철학과 달리 천지인의 변화를 사유하는 역의 원리인 동양철학에서 신은 자연이기에 유럽에서의 기독교의 창조신을 비판하거나 두둔하는 번거로운 작업은 필요 없었습니다.

스피노자와 달리 라이프니츠의 실체는 하나인지 다수인지가 불분명합니다. 개체적 실체(영혼), 단순한 실체(영혼), 복합적 실체(물질), 물체적 실체(생명체), 모나드(영혼) 등 라이프니츠에게 실체는 다양하게 탐구됩니다. 라이프니츠가 1714년에 쓴 『모나드론』에서 본격적인 모나드 개념을 정리하지만, 그의 다른 저서에서 1698년부터 모나드 개념은 시작됩니다. 개체적 실체로 정의되던 실체 개념이 모나드로 정리되고, 물체적 실체(생명체)는 영혼을 가진 ‘실체적 형상’ 개념으로 정리됩니다. 라이프니츠에게 17세기 기계론(데카르트주의자에 따른)을 벗어나서 물체의 운동을 설명하려 할 때, 운동하는 내재적 원리가 ‘실체적 형상’으로 정의됩니다. 중국 『주역』에서의 이진법에 의해 끊임없는 변화를 나타내는 원리를 라이프니츠는 신이 세계를 창조할 때, 미래의 지각(변화) - 변화할 수 있는 모든 동력- 까지도 모두 가진 신에 적용합니다. 라이프니츠의 우주(세계)는 신의 예정조화에 의해 미래까지도 모두 결정되어 있습니다.
전체 2

  • 2021-03-30 14:05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주희뿐만 아니라 실체(자연법칙)에 대한 이해를 왜 그렇게 매달렸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이들의 윤리를 도출하려는 노력에 비하면, 자신의 신체 변용만을 맹신하는 인간이 왜 왜소할 수밖에 없는지도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는 각자의 조건에서 어떻게든 신을 사유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러나 그것을 통해 자신의 사유의 지평을 확장시켰죠. 반면에 지금 우리는 무엇에 의지하여 존재적 지평을 사유할지 정해야 할 것 같네요. 이 시대에는 더 이상 '신'도 없는 것 같고, 그렇다고 화폐나 과학이 될 수도 없을 것 같은데 말이죠~

  • 2021-03-31 12:02
    전체와 개체를 동시에 긍정하는 사유! 예전에 에티카를 읽을 때 신에 대해 말하는 1부와 인식에 대해 말하는 2부가 잘 연결되지 않고 1부의 내용이 추상적으로만 다가왔는데, 샘의 후기를 들으니 더 와닿는 것 같습니다. 스피노자의 신이나 니체의 영원회귀 같은 난해한 개념은 전체와 개체를 동시에 긍정하고 개체적 실존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기 위한 것이군요. 스피노자가 괜히 어렵게 쓴 게 아니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