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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기너스 시즌3 / 2월 18일 그림자 노동 후기

작성자
소소 (최난희)
작성일
2020-02-20 00:12
조회
86
비기너스 시즌3 / 2월 18일 그림자 노동 후기

이번 주는 일리치의 그림자 노동 4장, 5장을 읽고 각자 써온 과제를 가지고 토론했습니다. 민호쌤 팀인 제가 그 토론 내용을 취합해 후기를 쓰기로 했습니다.

우선 민호쌤은 4장 민중에 의한 연구를 읽고 글을 써오셨습니다. ‘민중을 위한 과학’과 ‘민중에 의한 과학’을 읽으며 그 차이에 관해 생각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토론할 때는 ‘민중을 위한 과학’과 ‘민중에 의한 과학’이 분리된 것처럼 이야기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오늘 다시 일리치의 글을 읽으면서 그 두 분야가 현실적으로 ‘아파르트헤이트’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일리치가 ‘민중에 의한 과학’이라는 낯선 개념을 도입했을 때는 그 개념이 아니고는 기존의 상황을 낯설게 볼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일리치가 낯설게 보고자 했던 상황은 어떤 상황일까요?

일리치는 R&D(Research and Development)라 불리는 일련의 과학 활동을 가져오는데 이 활동의 대상이나 과정, 활동 주체를 소개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무슨 무슨 프로젝트사업을 말하고 있는 거구나, 라고 이해했습니다. 이 활동은 덩치가 큰 사업이다 보니 막대한 자금을 지원받고 공인된 자격을 갖춘 사람이 개별로 하거나 팀으로 하거나, 하여간 이런 활동에 종사하는 사람은 사회적으로 존경까지 받습니다. 이들의 활동은 그 축적된 지식으로 특허를 받고 그 지식을 독점합니다. 생각나는 것은, 재작년인가요. 서아프리카 일대에 에볼라 바이러스가 창궐했을 때 선진국 제약회사들은 항생제 개발을 할 수 있는 기술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약을 개발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개발비용 대비 이윤을 따져봤을 때 타산성이 떨어진다는 거죠. 서아프리카 주민들에게 비싼 항생제는 그림의 떡입니다. 그렇다고 빈곤과 내전에 찌든 정부가 보조금을 줄 리도 만무하고요. 일리치는 R&D 주체가 정부. 기업. 군. 재단, 사업목적으로 수행하는 소규모 연구진 등 다양한데 그 주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연구 결과와 연구자와의 관계가 어떠냐를 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R&D의 주체로서 실질적으로 민중을 ‘위한’ 과학을 하기는 거의 불가능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 속에 소속된 한 개인이 민중을 ‘위한’ 가상한 신념을 지녔다 해도 그 신념이 조직의 이해관계를 뛰어넘기란 불가능할 테까요. 이미 정부, 기업, 군 등의 근대적 주체가 설정하는 ‘공익’이라는 것이 뭘까요? 그들은 근대가 만들어 낸 문제들을 기정사실화하고 그 해결책을 찾는 것을 ‘공익’이라고 하는 게 아닐까요? 미세먼지에 대한 해결책으로 공기청정기를 만들어내는 활동 같은 것이 적합한 예일지 모르겠습니다. 일리치는 대게 R&D의 수혜자는 늘 민중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민중에 의한 과학’이란 뭐냐, 민호쌤은 떠나온 아카데미에서의 활동을 되돌아보면서 그 ‘연구’와 지금 연구실에서의 ‘연구’를 비교해보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연구실의 ‘연구’가 일리치가 말하는 ‘민중에 의한 과학’일 수 있는지, 있다면 어떤 맥락에서인지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제가 비슷하게 쓰고 있는 건가요? 갈수록 총기가 떨어져서요) 제가 생각하기에 민호쌤의 그 질문은 세미나에 참여하고 있는 우리의 질문이기도 하다고 봅니다. ‘민중에 의한 과학’은 그 자체로 형태가 정해져 있어서 그것을 획득하면 되는 그 무엇이 아니라, 어떤 조건이 우리의 사용가치를 줄이고 있는가를 탐색하는 활동이 아닐까, (푸코식의 계보학적 탐색) 동시에 각자가 자기가 놓인 일상을 조금씩 다르게 배치하면서 당분간 감당해야 할 불편을 즐겁게 넘어가는 훈련이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그런데 일리치는 끝까지 ‘아파르트헤이트’를 경계합니다. 우리 속의 이분법적 사고를 되돌아보게 만들죠. 이런 저의 결론마저도 다시 고개를 갸웃거리게 합니다. “민중에 의한 과학은 (...)시장이나 전문가에 대한 종속을 심화시키지 않으면서 일상 활동의 사용가치를 증대시키는 연구”(P137)라는 표현을 가져오면서 ‘민중을 위한 과학’과 ‘민중에 의한 과학’의 차이를 가장 잘 정의했다고 생각되는 이러한 문구조차도 “소극적 차원에 머물러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다시 사유를 이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각자가 놓인 현실은 ‘민중을 위한 과학’적 성과물들과 뗄레야 뗄 수 없습니다. 자율성을 추구한다는 것이 그런 현실적 조건을 무시하고 ‘플러그를 뽑듯 뽑’는 것처럼 간단한 것은 아니겠지요. 그렇다고 “‘좋았던 옛날’로 되돌아가거나 아미쉬 공동체의 삶을 모방하려는 것”도 대안은 아닙니다. 일리치는 “새로운 종합을 이루려고 한다”(P138)는데 그 ‘새로운 종합’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저는 일리치가 ‘민중을 위한 과학’도 빠른 속도로 변이를 해나가는 중이기 때문에 그에 반응적으로 도출하는 품행은 소극적인 차원의 대항이라는 뜻으로 해석했습니다. 가령 스마트폰의 장단점을 분석하고 장점만 쓰자는 식은 아니라는 거죠. 스마트폰을 쓸 수밖에 없도록 강제하는 사회문화적인 흐름에 비판을 가하는 것 자체도 저는 정치적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런 차원도 ’연구‘에 속하지 않을까요.

덧붙여 일리치가 제시하는 ’과학‘에 대한 상반되는 관점에 대한 이야기도 나눴습니다. 12세기 사상가 생빅토르 위그의 기술론이 전혀 새로운 과학관으로 대체되는 과정이 이 장에 소개됐는데요. 위그가 과학을 인간 존재의 약함을 보완하고 치료하는 치료제라는 관점으로 다루었다면 베이컨으로 대표되는 근대과학관은 ’인간이 낙원에서 창조된 상태에서 누리던 주권과 능력을 복원하고 되찾는 활동이라고 봤다는 거죠. 위그가 썼던 라틴어 (지금은 일종의 사어지만 당시 학술공동체에게는 살아있는 언어였다는 겁니다)로 ‘필로소피아’는 현대영어로 옮기면 철학보다는 과학에 가까운 의미라는 겁니다. 제 개인적인 추측입니다만 이 부분에서 고대 그리스 이오니아학파라 불리는 자연철학자들의 사상과 위그의 과학관이 어떤 지점에서 통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데모크리토스 등의 자연철학자를 소크라테스 플라톤 이전의 사상가들이라고 뭉뚱그리지만 사실 이들의 철학과 플라톤류의 철학과는 베이스가 다릅니다, 자연철하자들은 사상과 물질을 둘로 보지 않았습니다. 자연 원리에 대한 이해와 자연의 일부인 인간을 이해하는 것은 동일선상에 있다고 생각했죠. 아무튼 위그는 자신의 기술론을 일반대중에게 이해시키 위해 저술한 책에서 이교도인 인물을 등장시켜 과학에 대해 의미심장한 정의를 하게 했죠. “과학이란 잘 알려진 것을 소중히 아끼는 태도라기보다는 이미 맛보았고 그래서 만족을 얻었던 것을 더 얻으려는 욕망에 이끌린 사려 깊은 진리 추구” 라는 말이 그 말입니다. 그런 반면 베이컨은 과학을 사물의 원리를 파헤치는 활동으로 보았고 과학과 기술이 발전할수록 ‘자연에 통달’하여 자연을 정복할 수 있다고 봤습니다. 일리치는 우리가 ‘과학’이라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를 문제시합니다. 그러면서 ‘민중에 의한 과학’이 비판적 테크놀로지를 기반 삼지 않는다면 심각한 난관에 부딪힐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R&D는 외부의 자연을 통제하려는 시도에서 벗어나 사람들에게 교묘하면서도 효과적으로 자기 통제를 부여할 수단을 찾는 쪽으로 돌아섰기 때문이라는 거죠. 결론은 민중에 의한 과학이 그 임무와 목적에 충실하려면 ‘인간이란 노동자이자 소비자이며 이들을 위해 연구하는 것은 전문가의 임무’라는 생각을 뒤집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토론의 주제는 그림자 노동이었습니다. 선희쌤이 포문을 열었습니다. 쌤은 일리치가 그림자 노동을 통해 궁극적으로 전달하려고 했던 것이 뭘까, 고민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토론을 진행하면서 내내 우리 곁을 떠나지 않은 질문이었습니다.

영아쌤은 이번 과제를 쓰면서 ‘노동’에 대한 생각이 뒤집혔다고 하셨습니다. 현대의 상식으로 노동이라 함은 임금을 받는 일이고 그렇지 않은 일은 ‘일 같지도 않은 일’로 하찮게 치부되지요. 쌤은 지금까지 월급 받는 남편의 일을 위한 ‘내조’가 사실은 산업사회의 경제 성장의 공식부문 뒤에 가려진 비공식부문이고, 기획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딸내미 생일날 외식한 경험을 들려주셨습니다. 일리치가 “가사노동뿐만 아니라 직장 통근, 자기계발, 벼락치기 시험공부, 장보기 등 경제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강요되는 무급활동” 들이 그림자 노동의 예라고 한 대목과 연결해보시면 됩니다. 그 날 한 푼 더 아끼겠다는 일념으로 주변 식당을 일일이 인터넷으로 검색해 가격 비교를 해서 식당 하나를 물색했다고 합니다. 알고 보니 그 식당이 가격이 쌌던 이유가 자기가 먹은 접시를 손수 치우는 댓가였다고 하면서 자발적인 듯 보였던 그 활동도 사실 그림자 노동이 아니었을까, 자기 같은 ‘착한’ 고객 때문에 누군가는 일자리를 잃었을 것이고 인건비를 줄이려는 기업에 자기도 모르게 일조한 것 같아 씁쓸했다고 합니다.

인상 깊었던 이야기는 자급자족 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임금노동자를 만들어내기 위해 여성을 집안에 가두는 엔클로저가 어떻게 진행됐는지를 나눈 대목이었습니다. 18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도록 민중들은 자신들에게 노동자의 품성을 부여하려는 시도에 극렬히 저항했는데 목초지에 대한 엔클로저나 거지를 부랑자로 간주하고 가두려는 공권력에 가장 완강하게 저항하고 군중을 이끈 존재는 여성이었다는 것입니다. 현숙쌤께서 산업사회가 남성의 임금노동을 위한 보조 역할로 성을 이분화시켰고 그 과정에서 여성 ‘본성’에 대해 새로운 관념을 덮어씌었다고 하셨습니다. 중세에는 여성들이 약풀로 피임을 조절할 줄 알았고 출산거부운동으로 권력에 대항하는 존재였다는 거죠. 이런 여성의 힘을 꺾기 위한 조치로 마녀사냥이라는 것이 행해졌다는 겁니다. 아무튼 일리치는 앞선 시기의 여성운동가들이 여성의 사회적 권리를 위한 투쟁에서 임금노동에 가려진 그림자 노동에 주의를 환기시켰다는 점에서는 긍정적 평가를 내려야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들의 한계는 “여성이 불구의 처지가 된 것이 반드시 경제적인 보수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급자족의 측면에서도 무익한 노동을 강요받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놓쳤다는 겁니다.(P196)

저는 현숙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처음에 선희쌤이 하신 질문 “일리치가 그림자 노동을 통해 궁극적으로 전달하려고 했던 것이 뭘까”에 대한 답을 애써 ‘만들어’ 봅니다. 일리치가 그림자 노동의 발생을 계보학적인 탐구를 통해 보여주는 목적은 ‘감상성의 결핍’을 촉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책의 첫머리에 네이딘 고디머의 소설 ‘버거의 딸’을 소개합니다. 토론하는 우리는 이 ‘감상성의 결핍’을 두고 설왕설레 했었죠. 그래, 감상성의 결핍이 좋은 거냐, 나쁜 거냐 헷갈리는 겁니다. 잠시 소개하자면 주인공은 어떤 병이 걸렸는데 “자신이 누리는 건강하고 평범한 삶의 조건이 타인의 고통 위에 서 있는 것임을 외면하지 못하는” 병입니다. 저도 처음에는 ‘사람이 감상성이 결핍되어서야 쓰나’하는 쪽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가만 보니 그 감상성이라는 것이 “도와주고 구제하고 해방시켜야 마땅한 사람들에게 고작 감성적 연민을 품으며” 나는 저렇지 않으니 다행이라거나 나는 이 정도로 만족한다는 상식인들의 ‘평범한 행복’을 의미한다고 일단 이해했습니다. 일리치는 이런 감상주의는 속임수이고 “아파르트헤이트의 피해자를 감상적으로 찬양하는 것은 이미 자신을 굴복시킨 권력에 짐짓 장엄하게 저항하는 척하는 일일 뿐‘이라고 일침을 놓습니다. 감상성의 결핍, 매우 겪기 어렵고 내심 앓기 싫을 듯 보이는 이 병은 제가 보기엔 종교적인 차원으로 해석해야할 것 같습니다. 불교에서 유마거사라는 보살은 이런 말로 유명하죠. "중생이 아프므로 나도 아프다." 저는 일리치가  "이 감상주의는 산업사회에서 이데올로기와 종교의 토대를 이루는 복잡한 현상"이라고 했을 때  '이데올로기'는 저개발국가에 대한 선진국의 원조 내지는 자국내 복지를, '종교의 토대'는 기독교식 연민을 지적한다고 봤습니다.  일리치의 사상은 독해를 거듭할수록 우리가 처한 상황이 백척간두의 상황임을 깨닫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일리치의 저작 자체가 진일보!라고 외치는 것 같습니다. 

일단 쓰기는 썼는데 왜곡변형이 많은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다음 주는 <생명관리정치> 9장 10장을 읽어오시면 됩니다.
전체 2

  • 2020-02-20 22:25
    꼼꼼한 후기 잘읽었습니다 난희샘~ 읽다보니 '일리치가 그림자 노동을 이야기하는 이유'나 우리 시대의 그림자경제에 대해 더 궁금해지네요. 저희는 감상성의 결핍은 도처에서 벌어지는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무감각 혹은 체념이라 얘기했는데, 그 지점에서 함께 얘기했던 '플랫폼 경제의 만인의 경영자화'도 생각나구요. 그림자 경제와 아파르트헤이트. 뭔가 알듯하면서도 아리송한 감이 남아있는 것 같아요

  • 2020-02-20 22:55
    참여하지 못한 난희샘 조 토론 내용을 엿보게 해주시니 좋네요ㅎㅎ 샘이 하신 것처럼 계속해서 일리치의 문제의식에 대해 질문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넋 놓고 일리치를 읽다보면 R&D는 나쁘고 민중에 의한 과학은 좋고 임금 노동/그림자 노동은 나쁘고 토박이 활동은 좋고... 이런 식으로 일리치가 긍정하는 것과 비판하는 것을 분류하고 거기에 동조하는 데 급급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일리치가 민중에 의한 과학이 단지 착한 과학이 아닐뿐더러 그저 비제도권에서 이루어지는 아마추어적인 작업도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던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민중에 의한 과학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찬밥 신세도 아니지만 돈에 눈먼 사람들도 아니고, 신중하고 체계적이고 엄격하게 연구를 수행하고 있으며 관련 분야의 R&D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고 자신들의 연구 결과를 적용 가능한 분야에 잘 활용하고 있다고요. 민호의 고민처럼 규문에서의 '연구'가 일종의 '민중에 의한 과학'이 될 수 있으려면 아카데미의 연구 이상의 치열함이 요청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