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기너스

비기너스 시즌 3 여덟번째 시간(3.10)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20-03-05 09:58
조회
70
안녕하세요, 비기너스 공지입니다. 코로나 때문에 몇 주째 세미나를 쉬거나 적은 인원이 모여 간소하게 세미나를 하고 있습니다. 이번 주에는 일곱 분이 오셨는데요, 사람 수는 적지만 토론 열기가 어마어마해서 토론이 10시까지 이어졌습니다. 이번에 함께 읽은 9, 10강에서 푸코는 드디어 미국 신자유주의에 대한 본격적인 분석에 돌입했습니다. ‘인적 자본’ 개념이나 ‘자기 자신의 기업가로서의 호모 에코노미쿠스’에 관한 분석도 나왔고, ‘법률의 인포스먼트’ 개념을 통해 신자유주의 통치술이 어떻게 비경제적인 부문을 경제화하는지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인적 자본’ 개념과 그에 대한 푸코의 분석이 정말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자유주의자들은 고전 경제학이 노동을 진지하게 분석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스미스나 리카르도와 같은 고전 경제학자들은 “노동을 시간이라는 요소로 축소시킴으로써 부단히 무력화”할 뿐 “노동 자체를 분석하지 않았다”(308)는 것이죠. 그래서 이들은 경제분석에 노동을 재도입하고자 하는데, 이는 “자본과 생산 사이 어디에 노동이 위치하는가를 아는 문제”가 아니며 “노동이 얼마에 팔리고 기술적으로 노동이 무엇을 생산하며 노동이 부가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같은 질문”(314쪽)을 던지는 일과도 무관합니다. 여기에는 본질적인 인식론적 변동이 있습니다.

“로빈스의 정의에 따르면 경제의 임무는 인간행동의 형태, 인간행동의 내적 합리성을 분석하는 것입니다. 이런 분석은 희소 자원들이 주어졌을 때 개인 또는 개인들이 무엇보다도 어떤 하나의 특정한 목적에 그 자원들을 할당하도록 결정하게 만드는 계산이 무엇인지를 도출해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 계산이란 것이 사리에 어긋날 수도 있고 맹목적일 수도 있으며 부족한 것일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그러므로 경제학은 더 이상 절차의 분석이 아니라 행동의 분석이 되는 것입니다.”(푸코,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난장, 314쪽)

‘경제’라고 말하면 무엇이 먼저 떠오르시나요? 누군가는 시장을 떠올릴 수도 있겠고, 다른 누군가는 상품이 대량생산되는 공장을 상상할 수도 있겠고, 또 다른 누군가는 해외무역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무엇을 떠올리든 우리는 ‘경제’를 비경제적인 나머지 영역 바깥에 위치시킵니다. 그런데 신자유주의자들에 따르면 경제분석이 출발점이나 참조의 일반적 틀로 삼아야 하는 것은 시장도 상품도 아닌 “양자택일적인 목표에 개인들이 희소 자원을 할당하는 방식에 대한 연구”(313쪽)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이 보기에 경제란 어떤 제도나 절차에 국한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희소한 자원을 특정한 목표에 할당하는 모든 인간 행위는 경제적 행위이며, 이러한 경제적 행위야말로 경제의 본질입니다. 그것이 꼭 화폐나 상품으로 되돌아오지 않더라도, 또 그것이 사리에 어긋나고 맹목적일지라도 희소 자원을 특정한 목표에 할당하는 모든 인간 행위는 경제이며 경제의 출발점이라는 것. 즉 개인들이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 자신의 한정된 시간과 에너지를 공부하는 데 쓸지 운동하는 데 쓸지 결정하는 것, 나아가 희소 자원으로서의 감정을 분배하는 것은 모두 경제의 문제라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경제분석 안에 노동을 재도입한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인간의 모든 행위를 일종의 자본 운용으로 보는 것, 그래서 노동을 단지 자신의 노동력을 돈으로 교환하는 소극적인 활동이 아니라 자신의 한정된 능력 자본을 이용하여 소득(즉 이윤)을 만들어내는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활동으로 자리매김하는 것. 이렇게 신자유주의 경제학은 모든 비경제적 영역을 경제화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의 기업가로서의 주체를 생산해내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다음 주 공지입니다. 이반 일리치의 『젠더』를 3장까지(~114쪽) 읽고 평소와 같이 공통과제를 써 오시면 됩니다. 간식은 송송이 선생님과 제가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전체 1

  • 2020-03-07 13:25
    공부를 통해 어떻게 살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졌을때, 답없음과 할 수 없음으로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는 이유가 아마도 삶 자체가 경제적 행위가 되어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제적 행위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쓰는 말이나 글조차 경제적 언어를 빼고는 표현이 불가능할 정도로 인간의 모든 행위는 경제적이 되어 버린 거죠.
    말과 사고를 경제적으로 하면서 탈경제적인 것을 고민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되겠구나 싶더라구요.
    어쨌든 이번주에 푸코가 호모에코노미쿠스인 한에서 개인이 통치가능화되는 것을 보았으니,,, 다음주에는 일리치의 버내큘러한 젠더를 통해 호모에코노미쿠스적이 아닌 다른 주체의 생산방식?을 찾아볼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