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기너스

비기너스 시즌 3 아홉번째 시간(3.10) <젠더> 후기

작성자
현숙
작성일
2020-03-14 14:58
조회
89

젠더 1~3강 후기


이번 주에는 이반일리치의 문제작 <젠더> 1강부터 3강까지 읽고 토론했습니다. 특별히 의도한 건 아니라고 하지만 지난주 <생명관리정치>에서 열띤 토론을 벌인 호모에코노미쿠스와 이번 토론 부분이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는 지점이 많아서 좋았습니다. 토론에 나왔던 주요 개념 몇 가지를 정리해볼까 합니다.


우선 세미나 시작부터 끝까지 토론에 등장한 젠더와 섹스. 일반적으로 우리는 사회학이나 페미니즘에서 정의하고 있는, 젠더는 사회적 성역할이고 섹스는 생물학적 성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리치는 젠더를 해부학적이나 조건적 성이 아닌 남녀 간의 위계적이지 않은 상보적 이원성 속에서 각자의 일이나 삶의 방식으로 나타나는 산업사회 이전의 토박이적 성을 뜻하고, 반면 섹스는 산업사회 이후에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전제 위에 등장한 단일한 성(unisex)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젠더가 딱히 한단어로 설명될 수 없는 구체적 삶의 토박이성이고, 따라서 활동에서 드러나는 어떤 형태이기 때문에, 일리치가 버내큘러 젠더의 대립으로 설명하는 이코노믹 섹스가 무엇인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얘기해보고 다시 젠더를 이해해보려고 했던 것 같아요.


우선 젠더는 상보적 이원성이 뜻하는 것처럼 남녀간의 차이를 분명히 하고 있지만 불평등하다고 말할 수 없고, 섹스는 평등을 전제로 하고 있지만 오히려 평등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일(work)에서 분명히 볼 수 있는데요. 먼저 산업사회 이전에 일이란 표준화될 수 없었던 각각의 고유한 삶의 활동으로 그것을 딱히 지칭하는 단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산업화 이후 일이 임금 노동이 되고 임금 노동 이외의 고유한 활동이 배제되고 평가절하 되었죠. 말하자면 산업사회 이전에는 남녀의 일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 특성에 따라 각각의 공동체마다 고유한 역할의 분담(일)이 있었다면, 산업사회 이후에는 경제적 소득을 올릴 수 있는 임금노동과 그 일을 보완해 주는 일로 나뉘게 됩니다. 결국 일(노동)이 젠더에서 섹스로 넘어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일리치는 1장에서 산업화된 언어인 핵심어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요. 현대사회에 대부분 쓰고 있는 단어들이 대부분 핵심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핵심어의 특징은 가르쳐진 모국어의 특징인데, ‘그 말들이 버내큘러한 말들을 억압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표준화난 문법적인 규칙보다 훨씬 효과적’입니다. 왜냐하면 ‘핵심어가 젠더 장치체계에 공통된 시각을 지시하고 젠더를 배제’(22)하기 때문입니다. 신도시나 장례식 등을 예로 들면서 처음에 들었던 단어의 의미와 지금 보편적 상식이 된 단어의 의미가 달라졌으며, 이 보편성의 단어가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같은 방식과 형태가 되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젠 어느 신도시를 가도 같은 건물, 상가, 도로가 있고, 어느 장례식장엘 가도 같은 제복을 입은 사람들과 같은 음식, 같은 장례 절차를 밟고 있다는 거죠. 누가 어떻게 사는지, 고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아무 상관없어졌고 그저 경제적 표준화만이 작동하게 되었다는 걸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 말하거나 글을 쓸 때, 일리치가 강조하는 핵심어, 즉 표준화하는 경제적 의미를 빼고, 언어를 신중하고 낯설게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기너스에 처음부터 등장하고 있는 푸코와 일리치의 중요 개념인 ‘희소성’에 관해서도 한참 얘기했는데요. 와카모도 미도리는 "폴라니는 세계대전 이후의 경제적 자유주의의 특징은 인간의 욕망이 무한한 것에 비해서 그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경제적 자원)이 유한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희소성의 원리’에서 ‘경제문제’의 존재 이유를 찾는"(『지금 다시, 칼폴라니』,생각의 힘, 184)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희소적 가치는 신자유주의의 특징인 호모 에코노미쿠스라는 주체가 상정되는 한에서만 상정될 수 있습니다. 남녀 모두 특별한 성장조건없이 자연스럽게 성인이 되기 마련인데, 학습능력이라는 인적자원을 필요로 하는 호모에코노미쿠스에게 ’교육‘은 성인이 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해진 것입니다. 삶을 영위하기 위한 고유하고 버내큘러한 가치였던 배움은 사라지고 희소가치라는 공통된 척도인 교육제도로 탈바꿈해 버린 셈이죠.


일리치는 젠더를 통해 무엇을 얘기하고 싶었을까요? 아마도 성이라는 근원적 신체성이 획일화된 거름망에 걸러졌고, 그래서 의미 자체가 달라졌다는 것.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협소하고 왜소해진 성에 대한 진실체계를 상기시켜 주고, 그것이 아닌 다른 방식의 성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았을까라는 의견도 나왔습니다.


자연스럽게 그림자노동의 성차별에 관한 얘기와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평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에 관해서도 한참동안 얘기해봤는데요. 상호보완적이 관계가 평등이라고 할 수 있을까? 현실적으로 남녀가 상호보완적 관계라는 것이 어떤 것일까? 혹은 어떻게 상보성을 만들어 갈 것인가? 라는 질문이 나왔는데, 솔직히 저는 이때부터 정리가 안되더라구요.^^ 그나마 지금의 성이 얼마나 획일화되고 중성화되었으며, 젠더를 상실한 기본적 욕구의 상품화된 가치가 되었는가를 고찰해볼 수는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호모에코노미쿠스와 대립하는 차원의 젠더를 논한다는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가능한지를 질문하며 책을 읽어봐야겠습니다.


이밖에도 여러 얘기가 나왔던 것 같은데 정리가 잘 안되는 관계로 오늘의 후기를 마치겠습니다.코로나19가 언제까지 우리를 괴롭힐지는 모르겠지만, 다음 주에는 좀 더 많이 함께 해서 반가운 얼굴도 보고, 채운샘 강의도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들 건강하고 씩씩한 모습으로 다음 주에 만나요~ 꼭!!

전체 3

  • 2020-03-15 12:17
    저는 <젠더>를 읽으면서 일리치가 '성 인지 감수성'이 무척 중요해진 지금 시대에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 담론을 워낙 아는 게 없어서 그런지 조금 어렵더라구요... 거기에는 샘 말대로 산업사회에서의 보편적 '일'의 등장, 학교화, 근원적 독점, 호모에코노미쿠스적 삶 등 '버내큘러적 삶'을 무너뜨리는 양상들이 뒤엉켜 있는 것 같아요.

  • 2020-03-15 13:07
    현숙샘,
    젠더 세미나에서 어떤 얘길 나눴는지 참으로 궁금했는데
    고맙게 잘 읽었습니다~
    후기를 읽다보니 정의롭고 달콤한 것으로 인식 오류를 일으키는 이놈의 평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네요.
    ‘상호보완적 관계가 평등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남녀가 상호보완적 관계라는 것이 어떤 것일까?’라는 현숙샘의 질문에 대해 저도 고민해보았네요. 저는 젠더에 평등을 갖다 붙이면 안 된다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평등이란, 높고 낮음이 전제되었을 때 우리가 납득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젠더는 이런 전제를 깨야하는데, 저는 젠더를 이 전제로 다시 끌고 들어오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건 아닌가...
    저도 정리가 안 되었지만, 댓글 남기고 싶어서 적어봅니다.^^

  • 2020-03-15 16:00
    저는 일리치가 '버내큘러 젠더'라는 개념을 통해서 우리의 상식적인 개념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낯선 삶의 양식과 존재의 방식을 보여주려고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토박이적인 삶과 필요와 상품으로 점철된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삶 사이에 놓인 어떤 심연?을 가시화하고자 하는 일리치의 고민이 이번에는 성이라는 주제를 통해 구현된 것 같달까요. 일리치는 '성'의 문제가 단지 '성'의 문제로 환원될 수 없고, 또한 '경제'의 문제는 경제적인 가치들이나 언어들로는 파악될 수 없는 존재의 변이를 함축한다는 영감을 주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