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3주차 철학팀 후기

작성자
지영
작성일
2019-11-21 22:59
조회
81
이번 시간에는 크로포트킨의 <만물은 서로 돕는다>의 1~4부까지 읽고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이 책의 각 장들은 《19세기》라는 잡지에 발표 된 글들을 모은 것인데요, 당시 과학적으로 논쟁이 되었던 논점에 대해 크로포트킨 자신이 시베리아와 만주를 여행하며 관찰한 사실들을 놓고 논의를 이어가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저희 조에서는 먼저 ‘동물부터 미개인에 이르는 상호부조’의 수많은 사례들이 재미있었다', 그런데 ‘얼핏 상호부조’라는 당위를 먼저 세우고 이를 입증하기 위한 근거들을 모아놓은 것 같다', 논리 자체는 이해가 가는데 막상 나한테 닥친 현실과 연결이 안 되고 관념적으로 느껴진다‘는 이야기들이 오갔습니다. 여기서 ‘크로포트킨이 이토록 많은 동식물과 인간의 상호부조 사례들을 열거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이 책을 왜 쓴 것일까’라는 질문이 이어졌는데요. 이에 대해 저희는 크로포트킨이 당시 과학계의 정설로 여겨지던 ‘적자생존’ 이란 개념 하나로 광범위한 사회현상을 일반화 하는 방식에 반론을 제기하며 자신의 논의를 펼쳤다는 것으로 정리했습니다. 전쟁(제1차 세계대전)의 끔찍한 참상을 ‘적자생존’의 논리로 퉁 쳐버리는 것은 ‘다윈의 논리를 협소하게 제한’한데서 생기는 오류라는 것인데요, 먼저 크로포트킨은 헉슬리나 홉스 등이 다윈의 ‘생존경쟁’이란 용어를 ‘적자생존’이란 개념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그들이 든 근거 자체가 비과학적이라는 것을 자신의 연구를 통해 증명합니다. 수많은 동식물의 사례를 통해  자연계는 ‘상호투쟁’ 보다는 ‘상호부조’가 지배적임을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크로포트킨이 말한 상호부조란 무엇일까요? ‘단순히 함께 사는 것만이 좋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건가? 그게 아니라면 어떤 논리를 발견할 수 있을까?’, ‘상호부조가 원칙 혹은 철칙이라고 하는데, 왜 더 좋은 것이라고 하지 않고 철칙이라고 할까’, ‘상호부조를 진화의 관점에서 본다는 건 뭘까?’ 등의 질문과 그에 대한 많은 논의들이 있었는데요, 잘 정리되진 않았습니다. 그 중에서 몇 가지 인상적인 이야기들은 이렇습니다. ‘서로 돕고 사는 것이 좋다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왜 사람이 함께 살아야 하는가를 이야기 하는 것 같다’, ‘상호부조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단순히 미개함의 상징이라 여겼던 영유아 살해, 노인유기, 식인 등의 풍습이 특수한 상황에 처한 원시부족 특유의 연대 행위라는 점이 새로웠다’ 등 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상호부조는 도덕이나 상식 이전의 근본적인 생명 차원과 연관되 보입니다. 인간 뿐 아니라 동식물도 '부조'의 본능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요. 이러한 생명 차원의 연대에서 크로포트킨은 무엇을 본 걸까요? 그는 연대하는 동식물들의 특징으로 ‘독창성・지능’의 발달을 이야기 하는데요, 개체들이 서로의 역량을 촉발하고 자신의 삶을 이끄는 역량을 키워나가는 이미지가 그려졌습니다. 이런 연대는 나와 다르다는 다양성과 차이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이야기도 나누었습니다.

정옥샘 조에서 흥미로웠던 질문은 ‘상호부조라는 게 무리・조직을 지속시키고 잘 화합해서 산다는 점을 특화시키는 것이 아닌가’하는 것이었습니다. 경쟁한 종 보다 화합한 종이 살아남았다는 내용은 ‘살아남는다’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보는 것인가라는 거죠. 그런데 단순히 그냥 화합해서 잘 살아남았다는 게 아니라 화합을 위해 ‘불화’도 감수했다는 점이 ‘상호부조’의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가뭄 등으로 양식이 부족해진 원시 부족 무리에서 노인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고 가족들에게 작별을 고하거나 영아를 살해하거나 식인 등의 행위들이 ‘불화를 포함한 부조’가 아닌가란 생각이 듭니다.

또 자연의 특성 자체가 희소성을 근거로 하지 않는다는 얘기도 재미있었는데요. 어떤 것을 희소하다고 말하는 건 인간중심으로 자연 안에 위계를 두는 관점이라는 논의가 있었다고 합니다. 때문에 자연은 희소적인 게 없고, 다만 늘 ‘도주할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들(?)만 있는 거라고요. 멸종이라는 것도 마주침을 통해 변이 되는 건데, 우리는 어떤 연속되는 상태에 상대해서 이런 변화를 ‘멸종’이라고 말하는 거죠. 이런 점을 보면 상호부조는 존재 방식의 다양성을 절대 긍정하는 차원의 개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상호부조가 지금 우리에게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돕는다’는 게 무엇인지 다음시간에 5~8부를 마저 읽으며 생각해봐야겠습니다.

그럼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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