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티(불교&티베트)

<불교 of 티베트 시즌 2> 1회 세미나 후기

작성자
윤지
작성일
2020-07-21 23:51
조회
116
불티 세미나 시즌 2를 시작했습니다. 지난 시즌부터 함께 공부하신 분들 그리고 새로 오신 두 분까지 모두 12명이 모였습니다. 저희는 총 10주간 매주 일요일 오전에 모여 티베트 불교의 지혜와 영성을 함께 탐구해 볼 계획입니다~ ^_^/

첫 시간이어서 돌아가며 자기 소개를 했는데요, 시즌 1에서 티벳 역사와 문화, 불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공부를 계속하게 되셨다는 분도 계셨고, 티벳 불교의 치밀함과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접근 방식이 놀라웠다며 더 공부해보고 싶다는 분도 계셨습니다. 명상에 대한 관심으로 시작하게 되셨다는 분들도 몇 분 계셨고요. 그러나 무엇보다도 다들 이번 시즌 다루게 될 삶과 죽음, 바르도라는 주제에 흥미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어려운 주제이긴 하지만 티벳의 큰 스승들의 가르침을 따라 저희가 함께 텍스트를 공부해 간다면 저희 각자가 지닌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죽음에 대해, 그리고 삶에 대해 어떤 마음의 태도를 지녀야 할지 조금이라도 지혜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겨우 10주간의 공부로 너무 큰 목표일까요?! ^^;;


낭송은 바람을 타고
~

자기 소개를 마친 후 초기 경전인 <쌍윳따니까야>를 돌아가면서 낭송했습니다. 초기 경전은 2500년전 부처님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살아있는 경전입니다. 그 중에서도 <쌍윳따니까야>는 ‘주제에 따라 함께 엮은 가르침의 모음’이라는 뜻이라고 해요. 다른 경전들에 비해 내용이 상대적으로 짧고 주제별로 묶여있어서 부분 부분 읽고 낭송하기에 좋죠. 그렇지만 짧은 내용에도 심오한 가르침들이 담겨있어 의미를 이해하기가 결코 녹록하지만은 않습니다. 가능하시다면 다음 시간 읽을 분량을 한 번 미리 읽어오시면 (본문 아래의 깨알 같은 주석과 함께 ^^) 낭송할 때 내용을 더 풍부하게 음미하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설령 내용을 다 이해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낙담하지 마시고, 낭송을 하고 또 낭송을 듣는 가운데 불경이 지닌 청정한 기운을 신체로 느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티벳에 가면 오색 천에 경전의 내용을 새겨서 긴 줄에 묶어 바람에 휘날리게 하는 ‘룸따’라고 불리는 깃발이 있다고 합니다. 바람을 통해 경전의 귀한 가르침들이 세상으로 멀리 멀리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소망을 담은 것이라고 해요. 저희는 룸따대신 일요일 아침 낭송을 통해 부처님의 말씀을 소리에 담아 세상에 보내는 것으로... ^0^  이 말씀을 드리니 이림샘께서 그럼 선풍기를 돌려야 한고 해서 다들 한바탕 웃었네요.

윤회계의 이원론 vs 시공을 초월한 한마음

첫 시간의 토론 텍스트는 파드마삼바바의 <티벳 해탈의 서> 였습니다. 파드마삼바바는 인도의 대학자로 티벳의 왕 티송데첸의 초청으로 티벳에 가서 불법의 초석을 다졌던 큰 스승이라고 지난 시즌 배웠죠. (기억이 가물가물 하신가요...^^) 그 때가 8세기 중반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파드마삼바바가 보물처럼 숨겨놓았던 책들이 몇 백년이 지나 세상에 빛을 보게 됩니다. 이 책들은 20세기 초 에반스 웬츠라는 영국인에 의해 서양에 소개되고요. 저희가 이번에 토론한 부분은 에반스 웬츠가 <해탈의 서> 를 서양인의 관점에 맞추어 해설한 부분이었습니다.

개론이라고 해도 한 줄 한 줄 불교의 중요한 내용들이 들어가 있어서 불교를 시작 단계에서 공부하시는 분들은 읽기가 어려웠다고 하셨죠. 그런데 제 짧은 경험에 비추어보면 불교 경전은 어떤 텍스트도 쉽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렇구요! 다만 불경을 읽으면 경전이 전하는 어떤 특별한(?) 기운이 저를 매료시켜서, 모르면 모르는 대로, 쪼금 이해하면 이해한 대로 기쁜 마음으로 읽게되는 희한한 경험을 하는 것 같습니다. ^^ 아무튼, 에반스 웬츠는 저희가 <해탈의 서> 문턱을 넘을 수 있도록 최대한 친절한 설명을 해주시려 했던 것 같죠.

우주적 실체의 총화인 한마음은 윤회하는 모든 존재의 무수한 마음들을 통하여 표현된다. 그것은 ‘불성’이며 ‘위대한 상징’이며 ‘유일한 씨앗’이며 ‘진리의 잠재력’이며 ‘모든 것의 기반’이다. 원본이 가르치듯 열반의 축복과 윤회의 모든 슬픔은 거기서 비롯된다. 소우주적 측면의 마음은 에고(ego)나 혼(soul)이라 불리는 무지에 의해 여러 가지로 서술된다. 대승불교 최후의 양극인 윤회와 열반이 본질적으로 하나임을 완전히 깨닫게 되면 불법의 목적이자 종착지인 마음의 해방에 이른다. (<티벳해탈의 서> 개론 77쪽)

에반스 웬츠는 시종일관 이원론의 관점에 묶여있는 윤회계의 모든 상태는 환영이며, 참다운 상태에서 마음은 하나임을 <해탈의 서>는 밝히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저희는 ‘한마음’이란 무엇일까에 대해 토론을 했는데 결국 그것은 모든 존재가 지닌 불성이자 공성 그 자체라는 얘기로 돌아왔습니다. ‘한마음은 한정된 수많은 마음들을 비춘다’ (85쪽)는 표현이 화엄경의 해인삼매(海印三昧)와 통하는 것 같다고도 했고요.

대우주적인 마음에서 생겨난 소우주적인 마음은 요가를 통하여 자신이 유래한 대우주적인 마음의 법열 상태를 체험하고 본질적으로 그것과 하나가 될 수 있다. 물방울은 대양과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때 물방울은 더 이상 물방울이기를 그만두는지, 대양이 개개의 물방울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아야 하는지, 아니면 분리될 수 없는 물의 집합이라고 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합일을 달성할 때까지 아무도 말할 수 없다. (85쪽)

<해탈의 서> 본론은 ‘파드마 삼바바의 전기’와 ‘자기 해방이라 부르는 마음 알기와 실재 보기의 요가’ 그리고 ‘스승 파담파 상게의 유언적 가르침’이라는 세 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그 중에서도 본론의 둘째 권인 ‘마음 알기 요가’가 해탈로 가는 핵심 가르침을 전수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요가란 신체 수련의 몸동작이 아니라 정신과 마음을 다스리는 수행의 방법을 의미합니다. 상당히 높은 수준의 근기를 요구하는 수행같아 보이지만 일단 저희는 뚫고 가보는 거스로...! ㅎㅎ

토론 중 어려웠던 부분은 시공간성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참다운 상태에서 수행자는 시간이란 본래 시작도 끝도 없고 과거 현재 미래를 나눌 수 없음을 알게 되며, 공간 역시 마찬가지로 크기와 구분이 없고 한마음과 공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는다고 합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과거, 현재, 미래가 윤회적으로 상상된 이원론일 뿐이라는 게 얘기를 하다보면 뭔가 관념적으로 이해가 될 듯(?)하다가도, 마음에 깊이 각인된 이원론의 관점에서 시공간을 경험하는 우리는 도통 그게 뭘까?에 물음표를 던진 채로 토론을 마무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지식과 지혜에 관한 부분도 재미있었습니다. 세속적 지식과 교육은 실용성에만 가치를 둘 뿐 인간의 정신 수준 향상에는 기여하지 못하는데 <해탈의 서>를 통해 파드마삼바바가 목표한 바는 세속적 지식이 아니라 세속을 넘어선 신성한 지혜라고 했죠. 당연한 듯한 얘기지만 20세기 초 에반스 웬츠가 영적 지혜의 서(書)를 서구에 소개할 때는 이런 근원적 지혜와 실용적 지식의 차원을 구분해서 설명할 필요가 있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드네요. 티벳의 스승들은 지혜를 달성한 높은 산봉우리에서 지식의 왕국인 마야의 영토를 관망한다고 합니다. 본질을 이해하면 지식은 자동적으로 얻어진다는 거죠. 그래서 티벳의 현자들은 이렇게 묻는다고 했다죠. “누가 여의주보다 염소의 똥 알맹이를 더 원할 것인가?” (94쪽)


달라이라마 존자님의 법문


3교시 토론이 마지막이 아니었습니다! 이번 시즌엔 시간이 되시는 분들은 남아서 달라이라마 존자님의 동영상 법문을 함께 보기로 했습니다. 이번에 본 첫 번째 법문은 존자님께서 10여년 전 미국의 산타바바라 대학에서 가르치신 마음의 본성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존자님의 법문에 앞서 법회가 개최하게 된 여러 인연을 소개하고 법문을 청하며 달라이라마 존자님을 소개하는 부분, 그리고 중간 중간 겸손하게 달라이라마님의 법문 통역을 보조하는 툽텐 진파님도 모두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달라이라마 존자님께서 우리 마음과 의식에 대한 심도 깊은 이야기를 아비달마 구사론과 집론까지 언급하시면서도 쉽고 명쾌하게 핵심을 짚어주시는 점이었습니다.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오직 마음으로만 가능하다는 것, 가령 우리를 힘들게 하는 파괴적인 감정을 없앨 수 있는 것은 술이 아니라(!) 그 반대의 감정으로서만 가능하다는 거예요. 해서 이런 감정의 토대가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를 알려면 궁극적으로 마음의 본성을 알아야 한다고 하셨죠. 그리고 이런 감정과 마음에 관한 정보가 금강승 밀교 (tantra)의 가르침에 많이 있다며 법문을 이어가셨는데요, 더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 법문을 보며 또 공부하기로 해요~

4시간 가량의 세미나가 끝나고 나니 뭔가 많은 것을 한 것 같긴 한데 진지하고 즐거운 수다를 나눈 듯 세미나를 마쳤다는 이 느낌은 저만 그런 걸까요? ^^;;

** 담주는 <티벳 해탈의 서> 191~ 308쪽까지 읽어 오시면 됩니다. 간식은 지영샘이 준비해 주기로 했구요. 그럼 남은 한 주 잘 보내시고 일욜에 뵙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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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7-22 13:33
    에반스 웬츠의 개론을 읽으면서 (비록 온통 잘 모르는 불교 용어로 가득하긴 했지만) 제가 알게 모르게 가지고 있던 상식들이 이원론과 선과 악, 지식(분별적 앎)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니체에게서 배웠던 그리스도교적 사고관도 떠올랐구요. 개론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묵직함이 느껴지는데, 다음에 읽을 내용이 기대됮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