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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카 마지막 9주차 후기

작성자
양마담
작성일
2017-07-09 19:50
조회
109
                                                                       지성의 정서화와  마침내..인간의 자유

<에티카>의 기나긴  불친절한 기하학적 방식에 익숙해질 무렵, 마침내 예속이라는 단어와 더 친숙한 인간에게 어울릴 것 같지 않던 '자유'를 논하는 5부에 도달했다.   4부 예속에 대한 고찰을 통해, 자유에 대한 그릇된 가상과 정서의 힘이 세다는 것에 대한 무지로부터 인간이 예속의 상태를 원하게 된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여기에서 결단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로 마음에 결단이 따른다. 다시 말해 아는 것이 내 느낌으로 대체  되었을 때에만  비로소 그 앎을 실천하는데 간극이 없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지성이 정서를 억제하는 것이 아닌 이성이 정서화 되는 문제를 의미한다.  우리는 무엇을 배웠으나 아는 것 따로 실천 따로라는 이해와 예속 상태가 병존하는 모순 상태를 겪게 되는데, 심신 일원론에 따라 신체에 대한 관념인 정신의 역량은 신체를 변용함으로써 더 알게 된다.  신체의 역량과 더불어 인식의 역량도 커지는 것인데 신체와 정신은 신의 속성을 동시적으로 표현하는 유한 양태로서 두 속성은 인과적으로 배타적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한다.

외부 물체에 의한 수동의 겪음과 상상에 의한 부적합한 인식을 하는 유한 양태로서 인간의 조건은 필연적으로 제약된 한계가 아니다. 이 제약은 이해하는 순간 가능성이라는  조건으로 바뀌는데 이때 이해의 대상은 정서와 인식의 작동 원리이다. 무한하고 영원한 절대적인 신의 변용인 외부에 의해 끊임없이 규정 되는 유한 양태는 그 유한한 조건을 바꿀 수 있는 여지 또한 그 유한성에서 찾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유한한 조건을 가진 인간이 그 유한성을 극복하는 방법은 한계가 없는 다른 세상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그 한계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한계를 재구성한다는 것은 현재의 유한함에서 오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하는 대신 새로운 질문을 함으로써 현재의 조건을 바꾸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바로 '윤리(에티카)'의 문제가 시작된다.

인간의 신체 변용은  특수성과 구체성을 반영하는 그 신체에 대한  관념을 생기게 하고  그 관념과 동시에  그 대상이 불러 일으킨 수동적 정서가 만들어지는데 이 사건은 동시적이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이러한 정서 또한 자연적 실재이고 우리는 이 정서를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이해해야 하며 이러한 이해의 과정 자체가 긍정 혹은 받아드림이라 한다.  우리의 한계 혹은 조건을 이해함으로 뒤따르는 긍정은  내 '꼴'을  능동적으로 펼치면서 사는 추진체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 윤리 구성에 핵심적인 역량을 최대치로 투여한 상태인 '우리가 할 수 있는 한'의 중요한 전제 조건은 바로 이해를 통한 긍정에 있다. 스피노자는 지금까지의 논의를 통해 인간의 무능력이라는 것은 부적합한 인식에서 오는 인식의 결여와 그에 따른 존재의 본질인 행위 역량을 펼치지 않는 것이라고 보여주었다. 그리고 인간의 불운과 마음의 병을 같은 것으로  간주하고 매우 변하기 쉽고 우리가 결코 소유할 수 없는 것을 너무 많이 사랑하는데서 그 원인은 찾는다.  수동적 정서인 정념중 고착의 정도가 강한 사랑으로 신에 대한 인간의 지적사랑과 신의 인간에 대한 사랑을 포함하는 신의 지적 사랑을 설명한다.

신체의 변용에 의한 개별적이고 단편적 인식에서 공통 통념이라는  적합한 인식을 구성해 가는 2종의 인식과 달리, 신이라는 본질에 대한 인식으로 부터 개별 실재의 인식으로 가는 3종 인식은 각각 신에 대한 인간의 지적 사랑과 신의 지적 사랑에 대응한다. 3종의 인식은 일종의 인식의 질적 도약의 상태로 신의 인식을 하는 것이다. 3종의 인식을 하는 나는 곧 신이고 여기에서 알게되는 사실은 나는 무한연쇄라는 조건으로 구성 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신 안에 있다는 것은 곧 나는 없다이고 이러한 능동성은 곧 탈주체화로 이어지는데 이때 무아는 내가 자연과 하나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더이상 수동적 객체가 아닌 능동의 자연이라는 인식의 상태다.  지복은 덕의 대가가 아니라 덕 그 자체이다. 즉, 지복을 추구하는 데에는 어떠한 목적도 있을 수 없으며 추구 그 자체가 마음의 만족인 영광이다. 그래서 정신이 적합한 인식을 하면 더 맣은 실재를 이해 할 수 있고 그 이해도가 높아질수록 정신은  예속으로  빠지는 수동적 정서인 정념을 덜 겪게되는데 심지어 필연성을 이해한 정신은 죽음조차 점점 덜 두려워하게 된다.

생경한 형식으로 인간의 행복을 실질적이다 못해 우리가 관심을 두지 않았던 정서의 관점에서 논의를 펼친 스피노자의 <에티카>도 마지막장을 덮었다. 우리는 에티카 즉 윤리의 문제인  "어떻게 살 것이가?"라는 질문으로 에세이를 써야하는 우리의 윤리(!)의 문제를 앞두고 있다. 에세이를 어떻게 쓸 것인가의 질문이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윤리의 정서로 전환되는 방법은 일단 쓰고 보는 역량의 발휘에 있을 것이다.  우리에겐 지금 이순간도 쉼 없이 현행적으로 확장하는 '우리가 할 수 있는 한'을 증명하는 코나투스가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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