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Q

에티카 마지막 9주차 후기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17-07-10 03:38
조회
113
처음 스피노자의 양태를 이해할 때 자유의지가 없다는 것이 정말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때는 어떤 의지조차 낼 수 없는 것이라고 이해했지만, 지금 보니 자유의지가 없다는 것은 인간에게 신체를 통제할 수 있는 지성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스피노자는 사람들이 자유에 대해 오해하는 두 가지를 밝힘으로써 자유를 새롭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방금 말한 신체를 통제할 수 있는 지성이 없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조건으로부터 벗어난 상태도 없다는 것입니다. 신체를 통제할 수 있는 지성이 없다는 것은 신체와 지성이 따로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굳이 나눠서 따지면 정신은 신체를 지각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구속이 없는 상태가 없다는 것은 인간이 양태라는 것을 말합니다. 양태는 다른 것에 의해 규정되고 인식됩니다. 따라서 양태는 관계, 조건을 벗어나 실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어떤 관계, 조건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양태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신체와 정신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자신이 어떤 조건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해 무지한 데서 일어납니다. 자신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이 상상하는 자유만을 원하며 다르게 살아가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신체와 정신이 관계 맺고 우리가 양태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우린 이제 자유를 추구할 수 있을까요? 스피노자에 따르면 이것은 1종 인식에서 벗어나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스피노자의 자유를 사유할 때 중요한 것은 적합한 관념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이때 적합한 관념을 구성하는 것은 정서가 발생하는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데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보통 우리가 결단하는 것은 자신의 욕망과 반대되는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채운쌤의 말씀에 따르면, 어차피 마음과 반대되는 선택을 해봤자 금방 그 선택을 배반하게 됩니다. 스피노자는 마음은 이성으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마음(정서)로만 다스릴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정서를 이해한 것에 최대한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머리로 좋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그것을 선택하지 못한 것은 아직 그것을 따라야겠다고 할 만큼의 변용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왜 그것을 따르는 것이 나의 역량이 증대되는 것인지, 그 발생한 바를 깊이 생각하면서 따져가는 것이 적합한 관념을 구성하는 것이 되고, 그렇게 구성한 관념을 따라 살아갈 때 우리는 자신의 유한한 조건 속에서 그나마 자유롭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혹은 능동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스피노자에게 자유란 능동적으로 살고 있는 만큼이기 때문입니다.) 스피노자로부터 윤리를 구성하는 것은 이렇게 적합한 관념을 구성하며 살아갈 때 가능한 것 같습니다.

 

다음은 본문의 내용을 하나로 정리하지 못해서 인식의 세 종류를 나열했습니다. 죄송합니다. ㅜㅠ....

정리1부터 정리 10까지는 수동에서 능동으로 이행하는 것에 대한 내용입니다.

정리2에서 스피노자는 정서를 “마음의 움직임”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정서를 마음의 고정된 상태로 생각하는 것과 다른 시선입니다. 스피노자를 이해할 때 중요한 단어 중 하나가 ‘이행’이란 단어인데, 어떤 정서가 먼저 있지 않고 역량이 더 증대되거나 감소되는 가운데 느껴지는 것이 정서이기 때문입니다.

정서는 신체의 변용에 대한 관념이기 때문에 부적합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적합한 관념을 구성할 수 있다면 그것은 정서를 외부 원인으로부터 떼어냄으로써 가능합니다. 정서가 어떤 식으로 발생하는지 모르는 우중들의 경우에는 정서의 원인을 외부대상에게 귀속하고 거기에 고착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외부대상에 의해 슬픔의 정서가 촉발되었다고 생각하면, 그 대상과는 서로의 역량을 떨어뜨리는 관계로 맺게 됩니다. 하지만 어떤 정서든 그 상황, 조건들에 의해서 일어난 것임을 안다면 정서를 외부대상에게 귀속시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외부대상을 단순히 미워하지 않고 다르게 관계 맺을 수 있는 가능성이 생깁니다. 이렇게 관계를 좁게 보지 않고 좀 더 큰 관점에서 보는 것, 아마도 이것이 그동안 스피노자가 말했던 다수의 실재를 동시에 보는 것, 더 잘 이해하는 것과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필연적이란 말은 전체의 연관질서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뜻합니다. 즉, 우리는 항상 무엇으로 규정되어는 양태라는 것입니다.

흔히 하는 정서에 대한 오해하는 것은 정서를 느끼지 말아야 할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서 역시 자연의 질서에 생겨났다 사라지는 실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것입니다. 채운쌤은 이세돌이 잡념을 다스리는 방법에 대해 얘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이세돌은 대국 도중 엉뚱한 생각들이 떠오른다고 합니다. 그럴 때 그 생각들을 없애려고 애쓸수록 오히려 그 생각들은 없어지지 않고 거기에 더 얽매여서 다 이긴 판도 진다고 합니다. 그 뒤로 이세돌은 잡념이 떠오르면 그것들에 일일이 대답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니까 잡념이 사라진다고 합니다. (뭔가 이세돌의 팬이 되버린 느낌....) 스피노자도 우리가 슬픔의 정서를 겪어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기쁨의 정서라고 말합니다.

정리 10의 주석을 보면, “손쉽게 활용하게”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는 결국 스피노자의 철학은 단지 책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손 안에 가지고 있는 것(手中)처럼 활용할 수 있음을 말합니다. 스피노자뿐만 아니라 다른 철학들도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유용한 도구입니다. 철학을 아무리 봐도 그것을 활용해서 자신의 삶을 다르게 보려고 하지 않으면 그것이야말로 게으름입니다. 채운쌤은 정신의 역량을 사용해서 자신이 겪는 모든 일상을 능동적으로 재배치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을 때, 그때의 태도를 바로 항상성이라고 하셨습니다.

3부에서 스피노자가 정서에 대해 설명할 때 아주 탁월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도 그런 문장이 있었습니다. 스피노자는 “명예의 오용과 세상의 공허함에 대해 가장 소리 높여 외치는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명예를 욕망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은 확실하다.”라고 했습니다. 채운쌤은 이 문장에서 정약용의 말을 가져오셨습니다. “지나치게 청렴한 사람은 그 청렴한 때문에 사람을 죽인다.”

 

정리 11부터 정리 20까지는 ‘신에 대한 사랑’에 대한 내용입니다.

“신에 대한 사랑”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3부 부록을 참고하면, 사랑은 외부 원인의 관념을 수반하는 기쁨입니다. 여기서 사랑이 수동적이게 되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흔히 사랑에 대해 가지는 환상 중에 “상대방만 기쁘다면 난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랑은 대부분 자신의 역량을 떨어뜨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역량이 떨어지는 관계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스피노자는 결국 상대방을 사랑할 수 있는 것도 그 역량에 달려있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랑에서 중요한 것은 사랑받는 대상이 아니라 사랑하고 있는 자신의 역량입니다. 사랑함으로써 자신의 역량이 늘어나야 상대방을 계속 사랑할 수 있고, 그런 관계를 구성해나가는 것을 능동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피노자는 자신에 대해 적합한 관념을 구성해나가는 사람은 곧 그만큼 신을 사랑하게 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신에 대한 사랑은 곧 이성을 사용한 사랑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사랑은 모든 관계를 자신의 역량을 증대되게 만드는 쪽으로 구성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정리 21부터는 3종 인식에 대한 얘기입니다.

앞서 스피노자는 1종 인식에서 2종, 3종 인식으로 가는 게 중요하지 2종 인식과 3종 인식 자체를 크게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5부에 와서 다시 2종 인식과 3종 인식을 구별했습니다. 채운쌤은 이에 대해 2종 인식은 완벽하게 그 적합한 방식을 체득하지 못한 것이고, 3종 인식은 의식하지 않아도 모든 것을 적합하게 이해하는, 어떤 정신의 비약이 일어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정리 25를 보면, 스피노자는 “3종의 인식에 따라 실재들을 이해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2종 인식이 개체들로부터 공통 통념을 구성하는 것이라면, 3종 인식은 각각의 개체를 본질에 따라 이해하는 것입니다. 채운쌤은 성철 스님의 법어를 예로 들어주셨습니다. 처음 산과 바다를 봤을 때는 산은 산이었고, 바다는 바다였습니다. 이때만 해도 산과 바다는 단지 감각에 의존해서 보이는 그대로의 산과 바다였습니다. 하지만 공통관념을 구성해서 봤을 때, 산과 바다는 단지 산과 바다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산과 바다를 봤을 때는, 그것들의 본질을 통해 산과 바다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영원성은 성철 스님이 산과 바다를 그것의 본질로 이해한 것처럼 개체들을 각각의 본질에 따라 이해하는 것입니다.

 

채운쌤은 화이트보드에 숭산 스님의 화두를 써주셨습니다.

 

至道無難 唯嫌揀擇 지도무난 유혐간택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 다만 간택을 꺼릴 뿐이다

但莫憎愛 洞然明白 단막증애 통연명백

좋고 싫음 마저 없다면 막힘없이 트여 모든 것이 명백해진다.

 

인간이 번뇌를 가지게 되는 것은 좋고 싫음 자체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무엇을 선택하는 데 있다는 것 같습니다. 감정에 휘둘리는 것을 인간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모습이야말로 가장 수동적인 상태 다름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이번 에세이 때는 그 통념을 깨는 것을 목표로 해야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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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07-10 07:57
    숭산스님 화두 아니고, 승찬스님의 신심명信心銘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