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Q

절탁Q 에세이 공지

작성자
건화
작성일
2017-07-10 13:49
조회
168
공지가 너무 늦어버려서 죄송합니다(ㅜㅜ). 우선 공지부터 하겠습니다. 다들 준비하고 계시겠지만(?) 이번 주 수요일은 에세이 발표가 있을 예정입니다. ① 그래서 평소보다 삼십분 앞당겨 아홉시 반에 에세이 발표를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② 에세이는 전날 밤 11시까지 ‘절차탁마Q 숙제방’에 올려주시면 됩니다. ③ 분량은 a4 5페이지이고, (그러실 일은 없겠지만) ④ 시간을 넘기시거나 분량을 채우지 못하실 경우 벌금은 10만원(!)입니다

저는 이번주 채운샘 강의 중에서 “결단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정서의 문제”라고 하신 말씀이 기억에 남았습니다. 최근 규문의 화제작인 《자객 섭은낭》을 가지고 이를 설명해 주셨죠. ‘섭은낭’에서 자객 은낭의 스승은 ‘검을 쓰는 일’과 ‘사사로운 감정’을 분리시키고 전자를 통해 후자를 억눌러야 비로소 완벽한 자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은낭을 몰아세웁니다. 고향으로 돌아가 과거의 정혼자였던 전계안을 죽일 것을 명령하죠. 그러나 은낭은 일련의 과정을 거친 뒤 자신을 둘러싼 굴레들을 끊어내고 신라로 떠날 것을 결단합니다. 은낭의 ‘결단’은 자객의 정도를 저버린 나약한 마음에 의한 것도, 정서를 억누르는 의지력에 의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은낭역시 자객으로 키워진 자신의 운명에 대한 복수심 같은 것을 느꼈을 것이겠으나, 그러한 혼동된 정서들을 이해하고 가장 능동적인 방식의 결단을 내립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결단의 이미지는 정서를 거스르는 것이지만, 사실 그러한 결단은 슬픈 정서에 지배당하는 상태와 다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결단이라고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이해를 통해 능동적으로 정서를 ‘따르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수동적 정념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능동적인 결단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능동적으로 정서를 따르는 것, 마음을 낸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스피노자는 “정서들에 대한 치유법으로 정서들에 대한 참된 인식보다 좋은 것을 고안해낼 수” 없음을 말합니다. 즉 자신의 예속의 조건을 이해하는 일 자체가 중요하다는 것이죠. 채운샘은 푸코를 언급하시며 ‘우리의 한계가 곧 우리의 가능성’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특정한 역사적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지만 그러한 조건에 대한 사유에 천착할 때 거기에는 이미 자유의 가능성, 다르게 사유하고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죠. 결국 문제는 우리가 놓인 조건을 이해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더 많이 이해하는 것입니다. 전체적인 장 안에서 인식할수록 이성이 정서화되는 역량은 커집니다. 그리고 전체적인 장 안에서 인식하는 지성의 역량이 커질 때 우리는 “자기 자신과 신체를 영원의 관점에서”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한에서 “필연적으로 신에 대한 인식을 갖게” 되겠죠. 그렇다면 전체적인 장 안에서 인식하는 역량은 스스로의 활동 속에서 필연적으로 不二에 대한 인식(=신의 지적 사랑)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이제 와서 공지하기 민망하지만)채운샘께서는 에세이 곳곳에 개념들을 배치할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신과 양태, 적합한 관념과 부적합한 관념, 예속, 자유, 지복, 신의 지적 사랑 등등등! 자유롭게 산다는 것, 그리고 윤리적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지 고민하며 위의 개념들을 잘 녹여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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