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Q

2학기 에티카 에세이 후기 - 1

작성자
이소영
작성일
2017-07-14 23:13
조회
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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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데체 15시간 동안 기댈 곳 없는 좌식 방석에 앉아 책상을 벗 삼아 저희는 무얼 했을까요?

2학기 에티카 에세이 발표를 했지요~

정말 기적 같은 체력을 가진 분들만이 버틸 수 있는 강행군을 한 명도 빠지지 않고 즐겁게 마치시다니....이건 또 뭘까요?

스승 사랑을 넘고 스피노자 사랑을 더해 학우 사랑까지 있지 않고서야.... 제가 그 중 한명으로 같이 그 여정을 마침을 감사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2학기도 에세이 발표로 마무리 합니다.

그럼 지금부터 저 기적 같은 강행군의 현장을 다시 한 번 생중계하겠습니다.

단 (모두 아시겠지만) 그 현장의 분위기와 멘토링은 모두 저의 신체변용인 상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 참고하시리라 믿습니다.

<개념이 달라지면 자유도 달라져야 한다>

철학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 중 하나가 철학자가 표현하는 개념일듯요. 지난 학기 플라톤의 이데아, 이번 학기 스피노자의 신-속성-양태와 같이 개념이란 철학자의 사상적 핵이고 그걸 익힌다는 건 그 개념 하나 저희 삶에서 능동적으로 사용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삶의 형식에서 스피노자의 개념을 가지고 자신의 삶에서 윤리를 구성할 수 있다면 그것이 자유겠지요. 그런데 저희는 삶은 그대로이고 개념만 대체하며 같은 사유를 개념으로 포장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사유의 변화를 가져오는 개념의 정서화만이 저희가 철학자의 아리송한 개념을 정확히 포착하는 방법이겠지요.

<자기 놓인 자리를 보게 되는 마주함이 에세이다>

‘변이해야 한다!‘란 당위가 아니다. 내 생각 요만큼 변했다는 것을 알아보는 것이다. 글쓰기는 왜 수련인가? 내면 욕망을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 사유의 위험성을 드러내고 넘어서는 과정이다. 그거 하나 고치고 다음 글에서 또 하나 고치고 자기 놓인 자리 보는 것보다 더한 수련은 없다.

호정샘 - 1학기에 이어 첫타자로 채운샘의 30분 집중 에세이 분석의 영광을 안으신 행운의 주인공이시죠. 모두들 부러워마지 않습니다. 이것은 스승의 편애라 생각하는 건 당연 원인은 모르면서 결과만 확신하는 무지이며 부적합한 인식입니다.
  • 분별을 없앤다는 건 모든 걸 받아들인다는 것이 아니다. 내게 나쁜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부처님도 여여하게 그냥 모든 걸 받아들이는 삶을 사시지 않았다. 당시 인도에서는 혁명적 삶이었다. 모든 걸 받아들이는 건 더 위험하다. 그건 ‘안 나쁘다면 잘 받아들이자, 지금 그대로 살자’와 같은 말이다. 그렇다면 세계를 구성하며 싸울 일도 없다.

  • 나를 움직이는 욕망은 정해진 것이 아니다. 작용 속에서 생길뿐이다.

  • 주체의 습관은 변용을 가져올 수 없다. 새로운 변용도 내가 하는 게 아니다. 이런 사유는 스피노자와 멀다.

  • 질문이 글을 말해준다.

  • 어릴 적 일화가 지금 욕망을 볼 때 필요한가? ‘어렸을 때부터 난 그렇다!‘로는 안 된다.

  • 나를 즐겁게 해주는 것이 나의 욕망이다. 즐겁다는 판단이 벌써 있으며 정서도 있는데 즐거운 욕망이 나쁘다고 생각해 다른 행동을 하는 게 적합한 인식은 아니다. 충동과 당위가 충돌할 때 충동은 부적합이 아니며 적합한 인식은 좋고 나쁘다는 걸 아는 게 아니다. ‘tv가 좋아’라는 나의 정서를 받아들이는 게 이해가 아니다. 스피노자 개념에서 수동이란 무엇인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신체를 바꿔야 한다는 당위에서는 변용의 문제가 안 나온다.

  • 기쁨의 정서와 기쁨의 역량은 따로가 아니다. 기쁨의 정서는 역량이 확대되며 나온다.

  • 존재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활동역량을 늘려야 한다가 아니라 존재 역량이 활동 역량이다.

  • 에세이를 써야한다는 생각이 있으면 개념 정리부터 해야 한다.

  • 나는 나의 주인이 아니다. 스피노자는 나를 신체에서 시작한다. 마음다짐이 아니라 하고 있는 나만 있다. 하고 싶지 않은 나와 하는 나는 따로가 아니다. 지성으로 정서를 이해하는 게 아니라 이해하면 정서가 바뀌게 된다.

  • 우리가 사는 조건을 변용할 수는 없다.

  • 스피노자 개념을 내가 알 수 있는 데서부터 연결하면 문제 던지는 지점이 달라진다. 이 과정에서 개념을 쫓아가며 이해가 생기고 자기 생각이 바뀐다. 삶의 비전이 바뀌는 게 아니라 개념 하나 사용하게 되면 생활이 바뀐다.


길례샘 – 자연에는 차서가 있다. 봄 다음 가을이 오는 게 아니라 봄 다음엔 여름이 있다. 배움에서도 건너 뛰려하면 배움이 없다. 시시해 보이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 많은 개념을 마구 쓰는 건 지금 내 손에 있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투자하려 하는 것과 같다. 문장 하나 완벽하게 만들고 개념 하나 쓰는데서 시작하자. 이걸 하면 생각이 달라져있다. ‘내 안이 비어있다‘라는 느낌이 다른 생각과 언어로 채워진다. 내 안엔 오직 신=자연만 있다. 외부가 내 안에 있다. 타자가 나를 구성하다. 자연 안에서 내적 외적 구별은 없다.

  • 많은 정서 중 희망과 휴머니즘을 가져 온 이유가 있을 것이다.

  • 나는 자신의 원인이 아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기원인을 가질 수 없다. 오직 신만이 자기원인이다.


현정샘 – 글이 가벼워졌다. 힘을 빼고 쓰니 글이 더 좋아졌다. 하나의 문제에 매몰되어 그 이유를 찾다보면 거창한 당위로 마무리 된다. 생각은 가볍고 문장은 타이트하게!!
  • 의지가 없는 게 아니라 자유의지가 없는 것이다. 의지는 주체를 만들고 조건을 무시한 자유에 대한 환상일 뿐이다.

  • 자연의 연관질서에 따라 살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신체는 이미 그 질서에 따라 산다. 우리는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모른다. 우리가 그렇게 사유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 신체가 상에 사로잡혀 상상하기 때문이다. 상상의 부적합성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신체가 만드는 1종인식에서 출발한다는 신체조건에서 인식이 출발한다는 스피노자의 철학은 그래서 위대하다. 제한적 관념인 상상을 우리는 세계와 동일시하려하는데서 오류가 발생한다. 자연의 연관질서에 따라 사는데도 왜 관념을 근거로 삼을까를 문제화해야한다.

  • 본성의 필연성을 이해하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이해=인식=정서=신체변형이다.

  • 신체가 모든 걸 받아들일 수 없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도 아니다. 마주침은 우발적이다. 그 우발적 마주침을 능동으로 이행하는 것도 의지다. 단 이성이 따로 있지 않다. 슬픔과 마주쳐도 슬픔으로 이행하지 않을 수 있는 과정에 대한 설명이 능동이다. 조건을 구성하는 나와 능동적 나는 같다.


이림영옥샘 - 정념적 사랑이 하찮으니 하지말자고 스피노자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단 에로스는  상대와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욕망을 강하게 가지는 정서로 정서 중 가장 격렬하며 에너지를 집중시킨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다르다. 불교에서는 사랑이라 말하지 않고 자비라 말한다. 내가 충만해지지 않고 다른 걸 구하는 것은 능동이 아니다.
  • 정념적 사랑으로 지복을 구할 수 있을까? 강렬하지만 식기도 쉽다. 신을 향한 사랑은 정념을 유발하지 않는다. 인류애, 운명, 삶의 대상에 의존하지 않는 사랑이다.

  • 스피노자는 정념사랑을 잘하자가 아니라 정념사랑을 벗어나자를 말한다.

  • 대상과 거리두기가 능동은 아니다. 거리를 다양하게 주파하기가 능동이다. 정서는 객관화하여 거리두기 할 수 없다. 대상에 대한 의존을 줄이거나 소유하려 하지 않는 방식으로 거리두기는 여전히 수동이다.

  • 인간은 몸이 있는 동안 수동감정에서 벗어날 수 없다. 붓다도 몸이 있는 동안 유여열반만 가능했다. 돌아가시고 나서 무여열반에 드신다. 허나 몸이 걸림돌이 되지 않으셨다. 그 순간만이 정념에 예속되지 않을 수 있다.

  • 적합한 인식은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능동을 향해 갈 수 있는 이행적 힘만이 있다.

  • 대상의 결점을 의식하고 못하고는 능동과 상관없다. 결점을 받아들이는 희생적 사랑을 능동으로 대치할 뿐이다.

  • 대상에 고착하지 않는 사랑이란 무얼까에 대한 질문 던지기가 필요하다.


현희샘 – 철학이 나에게 주는 의미란 없다. 철학에 의미가 있는 것도 철학을 적용하는 문제도 아니며 단지 개념 하나 내가 응용할 수 있을 뿐이다. 최선을 다해 능동적으로 사는 것뿐이다.
  • 지복은 행위가 아니다. 행위는 즉각적 변용의 정서를 만든다.

  • 공통통념은 공통점이 많고 적고가 아니다. 어떻게 상대와 공통점이 있는 줄 알 수 있나.

  • 변용을 이해하면 안/밖, 나/타자에 대해 다시 정의하게 된다.

  • 코나투스는 존재의 생명력이다. 존재 본성을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개념이다. 살아있는 존재는 밖에서 변용이 와도 존재 내 변용의 힘이 있어 구부리는 힘을 가진다. 동일한 외부의 힘에도 우린 다른 존재의 힘을 가진다. 아메바도 작동하는 힘을 가진다. 외부에서 식중독이란 나를 파괴하는 힘이 와도 존재마다 구부리는 힘이 달라 다르게 반응한다.


현숙샘 – 마주침은 조건이 맞다. 미리 정해진 건 없다. 하지만 우린 좋은 마주침은 추구하고 나쁜 마주침은 피하려한다. 그럼 좋은 마주침을 구성하는 건 뭘까? 신영복 선생님은 감옥에서 수배자와 같이 계시는 조건에서 사유의 역량으로 능동을 구성했다. 시정잡배와 같이 있다는 만심을 내려놓아야 그들에게서 뭔가 배울 역량이 된다. 결국 나쁜 마주침과 좋은 마주침이란 없다. 스승이 되시는 분들은 윤리적 질문이 어디에서 발생하나, 잘 산다는 건 뭘까 같은 주제를 준다.
  • 더 큰 완전성, 더 작은 완정성이란 표현은 완전성이 마치 있는 듯 한 느낌을 준다.

  • 무지자는 예속되기를 욕망할까? 그들은 예속되는 정서를 끝없이 생산하며 예속을 정당화한다.

  • 스피노자는 저항적 삶을 살았다. 유대사회에서 퇴출될 때, 우매한 민중의 잔혹한 살인 앞에서 분노했다. 단 자기 감정에 신중 또 신중했다. 정념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 드라마를 보더라도 ‘인간의 욕망은 무얼까’를 고민할 수 있고 삼류치정살인을 신문에서 읽어도 인간에 대해 사유하는 곳으로 가야한다. 인간은 저것조차 욕망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윤리적 문제가 제기된다.


금란샘 – 죽음은 사유한다고 사유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죽음 너머를 생각할 뿐이다. 죽음 이후는 상상이며 부적합한 인식이지만 두렵다는 나를 알고 편안해지면 버릴 필요는 없다. 현자는 죽음을 무시하지 않는다. 삶과 더불어 죽음을 사유할 뿐이므로 삶을 사유할 때만 죽음이 사유된다. 윤리란 죽음을 둘러싸고 구성되는 게 아니다. 죽음은 살아남은 사람의 관념이다. 해체는 자연의 질서이므로 슬픔이 아니다. 죽음을 오직 슬픔 관념으로 바라보는 걸 벗어나려면 어떻게 우리가 부적합한 인식 너머로 갈 수 있을까를 질문해야 한다.
  • 금욕적 삶이 절대 자유의 삶은 아니다. 학자적 비교는 의미가 없다. 다른 책을 가져올 땐 내가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논리적 설명으로 연결해야 한다.

  • 연못에 따라 크기가 변하는 코이 물고기에서 코이의 능동은 없다. 여기가면 커지고 저기서 작아진다면 적응과 어떻게 다른지 설명 필요하다.


1부는 여기까지.... 아직 반이 더 기다립니다.
전체 1

  • 2017-07-17 10:44
    상상을 기반으로 ㅋㅋㅋㅋ 약간 다르더라도 학인들의 코멘트를 이렇게 꼼꼼히 듣고 옮겨주신 것만 해도 감동입니다..! / 자기가 놓인 자리를 보는 것이 에세이라는 것. 이번에 그것 하나만큼은 건지고 가는 것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