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차탁마Q

2학에 에티카 에세이 후기 - 2

작성자
이소영
작성일
2017-07-15 17:20
조회
154
이제 2개 조를 마쳤을 뿐인데 시간은 오후 5시를 한참 넘깁니다. 잠시 물 한 모금 마시고 하늘 한 번 쳐다보며 기지개 펴고 다시 에세이는 쭉~ 이어가려하니 맛있는 저녁(쟁밥짜장과 김밥)이 도착합니다. 공부도 식후경이죠! 일단 왁자지껄 먹고 에세이는 바로 이어집니다.

 

규창 – 채운샘에게 혼났다는 에세이 소재 덕분에 현숙샘의 어머님 같은 정다움 멘트와 정수샘의 아버님 같은 간결한 코멘트 주어집니다. 아담이 에덴에서 사과를 먹지 말란 하나님의 말씀을 금지로 듣는 것은 아담이 미숙하기 때문이다. 두 분 말씀은 모든 학인에게 필요한 말씀이셨습니다.
  • 혼났다는 이미 수동적 감정이다. 거기에 기쁜 혼남 슬픈 혼남은 없다. 더 잘 혼나는 방법 같은 건 없다. 모르면 물어서 이성으로 파악해야 한다. 다음에 다른 반응을 보일 수 있으려면 문제 접근 지점이 달라야 한다.

  • 혼났어도 부당하면 싸우면 된다. 그 힘을 변형시킬 때 능동이다. 계속 혼나겠다는 가장 무능력한 행동이다.


 

봉선샘 – 스피노자가 말하는 개념을 내가 해석한 개념으로 바꾸면 안 된다.
  • 관념을 표상처럼 쓴다. 스피노자는 관념이 어떻게 발생하는가를 설명한다.

  • 실재는 양태와 같지 않다. 실재는 ‘~ 것‘이며 양태는 속성의 변용이다.

  • 신체는 인식의 대상 일 수 없다.

  • 모든 인식이 거짓이 아니라고 모든 인식이 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참은 2,3종 인식이며 거짓은 부적합하며 단편적인 오류의 인식이다.


 

영림샘 – 글을 쓰려고 노력했다.
  1. 어떤 행동을 했다가 능동은 아니다.


 

소영 – 에세이 자체가 나다. 에세이 자체가 기쁨이나 슬픔을 주진 않는다. 에세이 후의 비판이 기쁨이나 슬픔을 준다. 글을 자기와 동일시하는 고착적 정서 때문에 비판에 슬픔을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픔으로 놔두지 않고 공부의 기쁨의 바꿀 수 있어야 한다.
  • 에세이 발표는 조건이다. 우린 이전에 슬프거나 기쁜 방식으로 변용 된 것을 기억한다. 평가에 대한 두려움은 수동적 감정을 낳는다. 그걸 글 쓰며 능동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한다. 글쓰기는 몸과 마음이 함께 하는 작업이다. 쓰고, 단락 맞추고, 개념을 생각해서 풀고. 이것이 수련이다.

  • 안하는 것과 하는 것은 대립이 아니다. 안하는 것도 하는 거다. 에세이를 쓰며 ‘내가 변용되고 있구나!’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이 때 신체가 변용된다는 것은 뭔지 물을 수 있다. 글쓰기가 안 두렵다면 그 다른 정서는 뭔지 고민해 볼 수 있다. 문제제기를 좀 더 나눠서 해야 한다.


 

미영샘 – 개념에 대해 생각하며 산다면 개념을 풍경처럼 쓰진 않는다. 이런 공부는 공허하다.
  • 수동적으로 공부하는 것처럼 공부의 원인을 왜 찾나? 공부에 적합한 원인은 없다. 글을 쓰고 후회가 없으려면 글을 마치고 다른 곳에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 절실한 문제가 없을 때 내 공부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뭐가 문제인지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잘 쓰고 싶다, 생각을 잘 말하고 싶다’는 욕망이 아니다. 욕망은 현행적 펼침이며 지금 내 모습이다. ‘이만큼 하고 싶다’는 기대치다. 희망이나 기대는 부적합한 인식이다. 자기 상태를 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 알듯말듯하다면 일단 정리부터 시작하면 된다. 스피노자에게서 좋은 것만 찾지 내 생각의 메커니즘을 분석하지 않는다.

  • 신 안에 내가 있다는 건 뭘까? 나의 긍정을 나에게서 찾지 않고 신에게서 찾을 수 없다.

  • ‘공부하면 기쁘겠지’란 생각은 고착적 정서다. 기쁨은 없다. 좋은 상상이 역량을 증대시키진 않는다.

  • ‘일찍 시작했더라면 잘 했을 텐데’는 수동적 정서다. 구체적인 게 빠졌다는 건 사례가 없다는 게 아니다. 에티카에서 예를 들어 구체적인 것이 아니다. 추상적 개념도 구체적일 수 있다.


 

건화 – 미완의 글을 쓰는 것도 습관이다. 처음 시작이 아무리 창대해도 끝을 마무리 짓지 못하면 욕심이다. 안 되면 앞의 내용을 수정해야 한다. 다음 학기 첫 시간에 완성된 에세이 발표 후 코멘트 있을 예정.

 

지연샘 – 삶은 모호하다. 그 안에서 철학자들은 개념을 만든다. 뚜렷하면 의심해 봐야 한다.
  • 필연과 우연은 대립하지 않는다. 원인으로부터 파악하지 못할 때 우연이라 말할 뿐이다. 우연도 인과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 단 우리는 그 모든 원인을 알 수 없다.

  • 유한해서 부적합한 관념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혜원 – 어떻게 적합관념을 형성할 수 있을지 실천적 사유가 없다.
  • 능동을 카드패에 비유한 것은 적절하지 않다. 나는 내 조건을 모르며 다른 사람의 조건도 모른다. 조건을 패처럼 부릴 수 없다. 다른 사람의 패를 읽는 건 도박에서나 가능하다.


 

정수샘 – 윤리를 갖는다는 것은 매번 구체적 장에서 펼치는 각자가 가지는 삶의 독특한 습(style)이다. 윤리는 원칙이 아니며 인간과 관계 맺는 관계이며 이는 다른 동물과 관계 맺는 방법과도 같다.
  • ‘내가 우주’라는 생각이 스피노자를 통해 어떻게 달라졌는지 아니면 내가 우주임을 확인했는지 등 처음 생각이 좀 더 구체적으로 펼쳐져야 한다.

  • 공통통념은 에티카에 명시적이지 않다. 들뢰즈의 ‘~되기’와 같은 것이다. 되기는 상호되기이며 내가 다른 것과 만나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 아닌 것이 되고 다른 것도 다른 것이 아닌 것이 되는 지점에서 되기가 형성된다. 내가 물과 만나 걸을 때와 다른 리듬을 익히고 물도 나무나 돌과는 다른 나와 마주침으로써 상호 다른 변용이 일어난다. 차이를 통해 공통을 만드는 것이 공통통념이다.

  • 공동체는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모인 곳이 아니라 이질적인 사람들이 모여 끝없이 상호 변이하는 곳이다. 극악범죄자를 사형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나쁜 사람이 죽어 선한 사람만 사는 것이 아니라 같이 살아야하기 때문이다.

  • ‘공통으로 모여산다’란 뭘까? 감옥 안에서 나를 낮추려고 의식해서 되는 게 아니다. 내 안에 위계가 없어져야 공통을 형성할 때만 가능하다. 하심은 나를 버리고 새롭게 형성되는 관계에서 가능하다. 어느 장소에서나 배울 수 있는 능력이 하심이다.


 

 

 

이렇게 2학기 에세이가 하심과 공통통념으로 아름답게 마무리 됩니다. 절차탁마Q 도반들은 두 학기를 같이 하며 신체적으로 부딪치고 배움을 나누어서인지 에세이 발표장이 활기와 유쾌함이 곁들어지고 때론 칭찬이 때론 조언과 질문이 오가며 역동적 장이었다고 나름 판단합니다. 역동이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저희가 만들어낸 저희의 역량이겠지요. 이제 일주일의 방학 후 새 학기가 니체와 함께 시작됩니다. 한 학기동안 스피노자와 웃고 울며 공통발제를 매 주 하신 여러분 모두 능동적 역동을 만드는 주인이셨습니다~^^
전체 3

  • 2017-07-17 10:53
    글 같지도 않은 에세이에 정말 감사한 코멘트들이었습니다. 한 학기 동안 마음도 심란하고 스피노자도 (왈왈) 어려워서 참 공부가 어렵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들 공부하시는 걸 보면서 마음도 조금씩 잡게 됐고 스피노자에도 조금 마음을 붙일 수 있었습니다. 과분한 사랑을 받은 것 같아요. ^_^ 이번 학기 소중하게 간직하겠습니다~

  • 2017-07-17 15:19
    아니 이렇게 에세이 현장을 조목조목 기록하셨다니 0ㅁ0 소영쌤의 사랑이 느껴집니다 ㅠ0ㅠ

  • 2017-07-17 18:50
    소영샘, 생생한 후기 감사합니다. 도반들 한 명, 한 명에 대해 진한 사랑이 느껴집니다. 며칠이 지났는데 그때의 부끄러운 감정이 다시 올라오기도 하구요. 1, 2학기 내내 같은 조에서 많이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