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내어 읽는 니체

즐거운 학문 3부 후기

작성자
수늬
작성일
2018-02-01 01:35
조회
124
우리가 읽고 있는 책 <즐거운 학문>은 니체 사상의 흐름에서 정오에 해당한다고 한다. 뒤이어 나오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시적 표현에 대한 철학적 해설서라고 니체 스스로 규정하고 있다고도 한다. 그래서인지 지금까지의 모든 ‘전복’들이 나아가는 방향이 어렴풋이 느껴지기도 하고, <아침놀>에서 설핏 언급되었던 충동, 쾌, 불쾌의 개념이 윤곽을 드러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3부에서 가장 오랜 시간 논의된 것은 114절이다.

『도덕적인 것의 범위. ― 우리는 우리가 본 것을 과거의 모든 경험에 의존하여 새로운 상으로 구성해낸다. 그 상을 어떻게 구성하는가는 우리가 지닌 솔직함과 정의감의 수준에 따라 다르다. 도덕적 체험 외에 다른 체험은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감각 지각의 영역에서도 그러하다. 』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마지막 두 구절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감각지각을 언급하는 마지막 문장에서 수많은 의문이 제기되었다. 처음 이 논의를 촉발한 것은 논리적의 것의 유래와 관련한 111절이었다. 니체에 따르면 인간 머릿속의 논리는 엄청나게 광대했던 비논리에서 생겨난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에게는 환원적 추론 즉 유사한 것을 동일한 것으로 이해하는 오랜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논리라고 알고 있지만 실은 비논리다. 사물 세계에서 원래 그 자체로서 동일한 것은 없다. 유사한 것이 있을 뿐이다. 시공간의 세계를 정확하게 관찰한 자는 사물이 끝없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모든 것은 흐름 속에 있을 뿐이다. 그러나 먹을 것이나 적대적인 동물과 관련하여 유사성을 동일성으로 재빨리 환원하여 추론했던 자들이 생존의 가능성이 높았고 그들이 더 도약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 뇌속의 논리와 추론은 비논리와 부당한 충동들의 진행 과정이며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 투쟁의 결과만 경험한다.

 

투쟁의 결과로 경험하는 도덕적 체험. 그것이 감각 지각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것? 우리가 생각하는 논리가 이미 상응하는 실체가 없는 곳에서 생겨난 비논리의 결과로서의 경험이고 그 자체로 오류다. 우리의 도덕적 체험 또한 우리가 과거의 경험에서 만들어낸 하나의 상에 의존하여 구성해 낸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선, 면, 물체, 원자, 분할가능한 시간, 분할 가능한 공간 등의 상을 만들어내어 모든 것을 인식한다. 운동 또한 고립된 점으로 인지하여 원인과 결과라는 이원성을 만들어내지만 그것은 사실은 연속일 뿐인 하나의 현상을 자의적으로 구분하고 분할한 추론에 불과하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있는 그대로 ‘본’것이 아니라 우리 식의 편리로 ‘추론’한 것이다. 거기에 솔직함과 정의감의 강도에 따른 차이가 더해지면 도덕과 감각은 이미 실체가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그 때 그 때 우리가 ‘구성해낸’ 것이다. 설왕설래했던 우리의 논의를 후기를 쓰며 정리해보자니 대충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건화 샘이 지적했던 196절 『우리 청각의 한계.― 인간은 대답할 수 있는 질문만 듣는다.』가 도덕과 감각에 대한 촌철의 결론이 될 수도 있겠다 생각된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가 주목했던 절은 광인(125절)에 대한 니체의 언급이다. 한 광인이 있다. 대낮에 등불을 켜고 시장을 달려가며 끊임없이 신을 찾고 있다고 외치는 광인. 많은 사람들이 그를 비웃을 때 그는 말한다. “우리가 신을 죽였다. ― 너희들과 내가! 우리 모두가 신을 죽인 살인자다! 지금까지 세계에 존재한 가장 성스럽고 강력한 자가 지금 우리의 칼을 맞고 피를 흘리고 있다. 어떤 물로 우리를 정화시킬 것인가? 이 행위의 위대성이 우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컸던 것이 아닐까? 그런 행위를 할 자격이 있으려면 우리 스스로가 신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보다 더 위대한 행위는 없었다. 우리 이후에 태어난 자는 이 행위 때문에 지금까지의 어떤 역사보다도 더 높은 역사에 속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는 등불을 땅바닥에 던져 불을 꺼뜨리고 다시 말하기를 “나는 너무 일찍 세상에 나왔다, 나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천둥과 번개는 시간이 필요하다. 별빛은 시간이 필요하다. 행위는 그것이 행해진 후에도 보고 듣게 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라고 한다.

 

신은 누구이고 광인은 누구이며 광인을 조롱하는 자는 누구인가? 우리의 논의는 또 여기서 한바탕 불이 붙었다. 무엇보다 광인이다. 무리본능에서 벗어나 ‘개인’이고자 했던 자? 너무 일찍세상에 나온 바람에 감당하기에는 너무 큰 ‘행위의 위대성’을 지닌 자? 대낮에 등불을 켜고 등장한 만큼 환각으로서의 신을 알아챈 자? 먼저 보아버린 자로서의 니체 자신? 등등. 또 신을 죽였다는 것은 무엇인가? 신을 믿지 않는 구경꾼들과 신을 찾는 광인이 함께 신을 죽였다는 말은 무엇인가? 니체는 원래 <즐거운 학문>을 집필하면서 여러 잠언에서 차라투스트라라는 인물을 등장시켰으나 출간된 저서에서는 대부분 일반명사로 바꾸어놓았다고 한다. 125절이 분명 그 구절 중 하나일 것이다.여러모로 다음 작품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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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02-01 11:09
    광인 얘기는 정말 해석이 될듯 말듯 잡히지 않네요. 굉장히 많은 해석의 여지를 함축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지금 읽고 있는 4부가 너무너무 재밌어서 다음주 세미나가 몹시 기다려집니다ㅎㅎㅎ 다음주에 뵐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