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 한강

장자 후기 [소요유] 3, [응제왕] 1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18-02-26 13:38
조회
106
모두 설날 잘 보내셨는지요. 전 탱자탱자 잘 놀았습니다. ㅋㅋㅋ 한 주 쉬었을 뿐인데 장자가 많이 낯설더군요. 읽는 것도 엄청 더듬더듬..... 자주 읽어야겠어요...! 원문으로 읽을 때 가장 재밌는 건 온갖 이름들인 것 같습니다. 우선 하나도 안 겹치고 온갖 동식물을 사용하고, 견오, 설결 등 재밌는 이름들도 있습니다. 장자는 엄청 상상력이 풍부했던 사람인 것 같고 그게 그의 철학과 적절히 융화됨으로써 이렇게나 매력적이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소요유편에서 붕새의 비상도 그렇고 장자의 상상을 따라가는 것만도 쉽지 않네요. 나중에 제물론 읽을 때 하얗게 타버릴 것 같은 걱정이 들지만 동시에 어떻게 읽을 수 있을지 기대도 됩니다! 제물론 읽을 때도 같이 버텨봐요. ㅋㅋ

 

惠子謂莊子曰: 吾有大樹, 人謂之樗. 其大本擁腫而不中繩墨, 其小枝卷曲而不中規矩, 立之塗, 匠者不顧. 今子之言, 大而無用, 衆所同去也.

혜자가 장자에게 말했다. “나에게 큰 나무가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가죽나무라 부른다. 큰 줄기는 툭 튀어나온 혹과 같아 먹줄을 튕길 수가 없고, 작은 가지는 둘둘 말리고 굽어서 목재로 쓸 수도 없어서 길 위에 있지만 목수가 돌아보지도 않는다. 지금 선생의 말은 크기만 하고 쓸모가 없는지라 많은 사람들이 모두 떠나가는 것이다.”

옹종(擁腫)은 ‘툭 튀어나온 혹’입니다. 나무 몸통에 있는 옹이를 말합니다. 그리고 사람 몸에 난 종기도 옹종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승묵(繩墨)은 직역하면 ‘검은 줄’인데, 건축할 때 직선을 표시할 때 쓰는 먹줄을 말합니다.

권(卷)은 ‘돌돌 말리다’, 곡(曲)은 ‘구불구불하다’의 뜻인데, 여기서는 곧지 않고 여기저기 삐뚤빼뚤한 나무의 모습을 표현하는 글자입니다.

규구(規矩)는 ‘각도기’, ‘곱자’인데 둘 다 무엇의 치수를 재고 재단할 때 쓰는 도구들입니다. 좀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목재로 쓰기 위해 나무를 재단하다’로 볼 수도 있습니다.

莊子曰: 子獨不見狸猩乎? 卑身而伏, 以候敖者., 東西跳梁, 不避高下., 中於機辟, 死於罔罟. 今夫犛牛, 其大若垂天之雲. 此能爲大矣, 而不能執鼠. 今子有大樹, 患其无用, 何不樹之於无何有之鄕, 廣莫之野, 彷徨乎无爲其側, 逍遙乎寢臥其下. 不夭斤斧, 物无害者, 无所可用, 安所困苦哉!

장자가 말했다. “선생은 유독 살쾡이를 보지 못했는가? 몸을 낮춰 엎드려서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동물을 살피고, ()과 서(西)로 뛰어다니면서 잡는데 높고 낮은 곳을 가리지 않다가 덫에 빠지고, 그물에 걸려서 죽는다. 지금 저 검고 큰 소는 그 크기가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 같지만, 크기만 하고 쥐 한 마리도 잡지 못한다. 지금 선생은 큰 나무를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이 쓸모가 없는 것을 걱정하지만 어찌 무엇도 있지 않은 곳, 텅 비어 아무것도 없는 들판에 심어서 그 옆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방황(彷徨)하고 그 아래에서 졸기도 하고 눕기도 하면서 소요(逍遙)하지 않는가. 도끼에 잘리지도 않고, 사물에 의해 해침도 받지 않으니 쓸 수 있는 것은 없지만 어찌 곤란하고 괴로워하겠는가!”

독(獨)은 ‘홀로’, ‘유독’의 뜻인데, 장자에서 자주 쓰이는 단어라고 합니다. 대부분 상대방의 어리석음을 꾸짖을 때 많이 쓰이는 것 같습니다.

리성(狸猩)은 한 단어로 ‘삵’, ‘살쾡이’를 뜻합니다.

오(敖)는 ‘놀다’인데,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동물들’을 가리키는 글자입니다.

辟 이 글자에는 ‘피하다’ 피(避), ‘비유하다’ 비(譬), ‘편벽되다’ 벽(僻) 등이 있는데 여기서는 ‘피하다’의 뜻으로 사용됐습니다.

중어기벽(中於機辟)의 벽(辟)은 ‘짐승 잡는 덫’인 벽(繴)입니다.

망고(罔罟)는 기벽(機辟)과 같이 일종의 덫으로 짐승 잡는 그물입니다.

리우(犛牛)는 야크라는 설이 있습니다. 근데 장자가 말하는 리우가 야크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는 않고, 야크라 하더라도 장자가 봤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야크는 높은 곳에서 내려오면 호흡을 못해서 죽는다고 하니 남방에 살았던 장자가 야크를 봤다기보다는 다른 검은 소를 봤거나 야크에 대한 소문을 듣고 상상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쌤은 하불수지어무하유지향 광막지야 방황호무위기측 소요호침와기하(何不樹之於无何有之鄕, 廣莫之野, 彷徨乎无爲其側, 逍遙乎寢臥其下)가 어렵지만 외우면 좋은 문장이라고 하셨습니다. 해석할 때 불(不)은 맨 마지막에 ‘~하지 않는가?’로 해석해줘야 합니다. 이 문장의 키워드는 무하유지향(无何有之鄕)과 방황(彷徨), 소요(逍遙)입니다. 무하유지향 다음에 바로 광막지야(廣莫之野)가 나오는데, 우쌤은 아마 무하유지향을 더 자세하게 설명해주는 주석정도로 보면 좋다고 하셨습니다. 침와(寢臥)는 자고, 눕는 것입니다.

물무해자(物无害者)에서 물(物)은 ‘외적 조건’을 뜻합니다. 해석하면, 외적 조건에 의해 어떤 피해도 입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응제왕

 

바로 소요유에서 제물론으로 넘어가기 전에 장자의 언어도 익숙해지고, 소요유와 통하는 내용도 있기 때문에 겸사겸사 응제왕으로 건너왔습니다. 응제왕은 장자의 정치론이 보이는 장입니다. 응제왕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지만, 이번에는 ‘응당 제왕이 되는 자’로 해석하기로 했습니다. 대의는 무심(無心)으로 자화에 맡기는 정치를 보여줍니다. 여기서 자화는 자연의 이치로 곧 생생불식하는 흐름에 따라 살게 만드는 정치를 보여주는 편입니다. 그리고 노자의 구절이 특히 많이 보이기도 하는 편입니다.

齧缺問於王倪, 四問而四不知. 齧缺因躍而大喜, 行以告蒲衣子.

설결이 왕예에게 네 가지를 물었는데 네 번 모두 모른다고 했다. 설결이 이로써 뛰어다니며 크게 기뻐하였고, 그 길로 포의자에게 가서 고하였다.

설결(齧缺)의 이름이 재밌습니다. ‘깨물’ 설(齧)과 부족할 결(缺)이 합쳐졌는데, 직역하면 ‘남의 부족한 부분을 깨물다’가 됩니다.

인(因)은 ‘말미암다’인데 여기서는 ‘그래서’ 정도로 해석하는 게 좋습니다. 보통 앞의 내용을 받을 때 많이 쓰입니다.

약(躍)은 ‘붕붕 뛰어다니다’입니다.

포의자(蒲衣子)에서 포(蒲)는 ‘갈대’, ‘부들’을 뜻합니다. 갈대로 옷을 만들어 입는 사람이니까 아마도 은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蒲衣子曰: 而乃今知之乎? 有虞氏不及泰氏. 有虞氏, 其猶藏仁以要人., 亦得人矣, 而未始出於非人. 泰氏其臥徐徐, 其覺于于., 一以己爲馬, 一以己爲牛., 其知情信, 其德甚眞, 而未始入於非人.

포의자가 말했다. “너는 그래서 지금 그것을 알았는가? 요순도 복희에게 미치지 못한다. 요순은 인()을 쌓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길] 요구했으니, 또한 민심을 얻긴 했지만 애당초 사람이 아닌 자연의 경지로 나아간 게 아니다. 복희는 누워서 느긋하게 있다가 잠에 깨서는 멍하니 있어서 어느 때에는 자기를 말이라 여기고, 어느 때에는 자기를 소라 여겼다. 그의 지()는 참으로 믿을 만하고, 그의 덕()은 매우 진실하니 애당초 자연의 경지로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이(而)는 ‘너’ 여(汝)의 뜻으로 사용됐습니다.

유우씨(有虞氏)는 요순이고 여기서는 유위정치를 펼치는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태씨(泰氏)는 복희씨로 요순과는 반대로 무위정치를 펼치는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요(要)는 ‘요구하다’의 뜻으로 사용됐습니다.

시(始)는 ‘일찍이’ 상(嘗)의 의미입니다.

비인(非人)은 여러 해석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사람이 아니다’로 봐서 천(天), 도(道)의 영역으로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비(非)를 ‘비난하다’의 뜻으로 봐서 ‘사람을 비난하다’로 보는 것입니다. 비난한다는 것은 누군가의 주장을 그르다고 하는 것이니까, 의역하면 ‘시비를 따지는 수준’이 됩니다. 정반대의 해석인데, 여기서는 요순을 유위정치를 펼치는 인물로 보니까 전자를 따랐습니다.

서서(徐徐)는 ‘여유가 있는 모습’으로 성인의 방황(彷徨), 소요(逍遙)를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각(覺)은 ‘깨닫다’의 의미로 읽을 때는 “각”이지만, ‘잠에서 깨다’의 의미로 읽을 때는 “교”로 읽습니다. 여기서는 잠에서 깨는 거니까 “교”로 읽었습니다.

우우(于于)는 아침인가 저녁인가 긴가민가한 모습입니다. 다른 판본에서는 이게 우우가 아니라 어우(於于)로 됐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말 멍청하다기보다는 성인이 인위의 세계에 살다가도 정신적으로는 초월의 세계를 넘나든다는 것으로 봐야 합니다.

일이기위마 일이기위우(一以己爲馬, 一以己爲牛)에서 일(一)은 ‘어느 때’를 뜻합니다. 우쌤은 그냥 지나갈 수도 있는 구절이지만 이게 정신적으로 대단히 높은 경지를 보여주는 구절이라고 하셨습니다. 실제로 도사님들이 깨닫는 과정에서 말이 되고, 소가 되는 식의 경험을 한다고 하셨습니다.

정(情)과 심(甚)은 둘 다 ‘참으로’, ‘진실로’의 뜻입니다.

 

肩吾見狂接輿, 狂接輿曰: 日中始何以語女?

견오가 광접여를 만났는데, 광접여가 말했다. “일중시가 너에게 무엇을 말해주었는가?”

광(狂)은 이 세상과 다르게 사는 사람에게 붙는 단어입니다.

일중시(日中始)는 “일중시” 그 자체로 읽을 수도 있고, 중시(中始)만 이름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일(日)은 ‘얼마 전에’, ‘근래에’의 뜻으로, 해석하면 “얼마전에 중시가 너에게 무엇을 말해주었는가?”가 됩니다.

肩吾曰: 告我君人者以己出經式義度, 人孰敢不聽而化諸!

견오가 말했다. “나에게 이르길, ‘다른 사람의 군주는 자신으로써 경식(經式)과 의도(義度)를 자연스럽게 드러내야 하니, 어떤 사람이 감히 그 말을 듣고 교화되지 않겠는가!’라고 했다.”

출(出)은 ‘자연스럽게 드러나다’의 뜻입니다.

경식(經式)은 유가적인 윤리, 의도(義度)는 적합한 제도입니다.

청(聽)은 보통 ‘듣다’의 뜻으로 사용되지만, 여기서는 그 말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저(諸)는 지호(之乎)의 뜻입니다.

狂接輿曰: 是欺德也. 其於治天下也, 猶涉海鑿河, 而使蚊負山也. 夫聖人之治也, 治外乎! 正而後行, 確乎能其事者而已矣. 且鳥高飛以避矰弋之害, 鼷鼠深穴乎神丘之下, 以避熏鑿之患, 而曾二蟲之無知!

광접여가 말했다. “이것은 사기치는 것이다. 그런 방법으로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바다를 맨 몸으로 건너고 황하를 뚫어서 길을 내는 것과 모기로 하여금 산을 짊어지게 하는 것과 같다. 저 성인의 다스림이 외부를 다스리는 것이겠는가! 자신을 바르게 한 이후에 시행하는 것이니 확실하게 그 일을 잘하는 것일 따름이다. 또 새는 높이 날아서 주살의 해를 피하고, 두더쥐는 제단 아래에 깊은 굴을 파는 것으로 연기와 파헤쳐지는 재앙을 피하는데, 자네는 이에 두 벌레가 가지고 있는 식견도 없구나!”

기덕(欺德)은 ‘사기치다’의 뜻입니다.

섭(涉)은 ‘걸어서 건너다’, 착(鑿)은 ‘뚫다’인데 모두 무모한 행동을 말합니다.

정이후행(正而後行)에서 정(正)은 유가에서 말하는 정과는 다른 의미입니다. 주를 참고하면, 각각의 사물은 하늘로부터 받은 것이 있고, 그것에 따라 살아가는 게 바르게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확호능기사자이이의(確乎能其事者而已矣)에서 기사(其事)는 소요(逍遙)와 방황(彷徨)을 말합니다.

해서(鼷鼠)는 두더지를 뜻합니다.

이증이충지무지(而曾二蟲之無知)에서 증(曾)은 ‘이에’ 내(乃)자의 의미입니다. 주석을 참고하면, 새와 두더지는 살아갈 방법을 알려주지 않아도 자기 스스로 살 방법을 궁리하는데, 광접여는 견오가 본능에 따라 살지 않으니 그 둘보다 못하다는 것입니다.

天根遊於殷陽, 至蓼水之上, 適遭無名人而問焉,: 請問爲天下.

천근이 은양에서 노닐다 요수가에 이르러 마침 무명인과 조우하여 그에게 물어봤다. “청컨대 천하를 다스리는 것을 묻습니다.”

은양(殷陽)은 지명이기도 하지만 산의 남쪽을 뜻하기도 합니다.

적(適)은 ‘마침’의 뜻입니다.

조(遭)는 ‘우연히 만나다’의 뜻입니다.

無名人曰: ! 汝鄙人也, 何問之不豫也! 予方將與造物者爲人, ,則又乘夫莽眇之鳥, 以出六極之外, 而遊無何有之鄕, 以處壙垠之野. 汝又何帠以治天下感予之心爲?

무명인이 말했다. “떠나라! 너는 비루한 사람이다. 어찌 기쁘지 않는 것을 물어보는가! 나는 바야흐로 조물자와 벗이 되고, 싫증이 나면 저 광활한 새를 타서 육극의 밖으로 나가고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노닐어 광활하여 끝이 없는 들판에 거처하고자 한다. 너는 또 무슨 이유로 천하를 다스리는 것으로 내 마음을 어지럽히는가?”

비인(鄙人)은 누군가를 비루하다고 평가할 때 쓰는 말입니다. 비(鄙)자에는 상대방에 대한 경멸, 얕잡아보는 시선이 담겨있습니다. 중국에서 우리를 기록할 때도 비자를 썼다고 합니다.

예(豫)는 ‘기쁘다’입니다. 그런데 기쁘지 않은 거니까 천근의 말이 기쁠 수 없을 정도로 수준 낮은 질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위인(爲人)은 ‘친구가 되다’의 뜻으로 사용됐습니다.

망묘지조(莽眇之鳥)에서 망(莽)과 묘(眇)는 둘 다 ‘광활함’을 뜻합니다. 의역하면 소요유편에 나오는 붕새로 볼 수 있습니다.

광량지야(壙垠之野)는 소요유편에 나온 광막지야((廣莫之野))와 같습니다.

예(帠)는 고(故)와 같이 ‘이유’의 뜻입니다.

又復問.
無名氏曰: 汝遊心於淡, 合氣於漠, 順物自然而無容私焉, 而天下治矣.

천근이 다시 물었다.
무명인이 말했다. “네가 마음을 담담한 곳에 노닐고, ()를 아무것도 없는 곳에 부합시켜서 사물을 따라 스스로 그렇게 하고 사사로움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천하는 다스려질 것이다.”

막(漠)은 여기서 무(無)의 뜻입니다. 좀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무하유지향(无何有之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주석을 참고하면, 공(公)은 본성에 맡겨 스스로 살게 하는 것이고, 사(私)는 마음의 욕심을 더하는 것입니다.

陽子居見老聃,: 有人於此, 嚮疾强梁, 物徹疏明, 學道不勌. 如是者, 可比明王乎?

양자거가 노담을 보고 말했다.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메아리치듯 빠릿빠릿하고 굳세며, 사물을 꿰뚫어 밝게 알며, ()를 배우는 데 게을리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은 명왕(明王)에 비할 수 있습니까?”

학자들은 양자거를 양주로 많이 본다고 합니다. 양주는 별다른 저서를 남기지 않아서 여기저기 나오는 단편들이 매우 중요하다고 하는데, 양자거가 양주라는 근거는 없다고 합니다. 비슷하게 노담도 등장하지만 동명이인일 가능성도 있다고 합니다.

향질(響疾)은 메아리가 울리듯 아주 빠름을 표현한 글자입니다.

강량(强梁)은 의지가 굳세서 일처리를 분명하게 하는 것을 표현한 글자입니다.

철(徹)과 소(疏)는 둘 다 ‘꿰뚫다’의 의미입니다. 명(明)은 ‘밝다’는 뜻으로, 물철소명(物徹疏明)은 주변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밝게 아는 것입니다.

명왕(明王)은 도가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군주입니다.

老聃曰: 是於聖人也, 胥易技係, 勞形怵心者也. 且也虎豹之文來田, 猨狙之便執犛之狗來藉. 如是者, 可比明王乎?

노담이 말했다. “이런 사람은 성인에 비하면 심부름꾼이나 기술로 먹고 사는 것에 불과한지라 몸을 수고롭게 하고 마음을 두렵게 할 뿐이다.또 호랑이와 표범의 무늬는 사냥꾼을 불러들이고, 원숭이의 재주와 검고 큰 소를 잡는 개는 덫을 부른다. 그러니 이와 같은 사람이 명왕(明王)에 견줄 수 있겠는가?”

 

어(於)는 여기서 비교의 표현으로 ‘~에 비하면’의 뜻입니다.

서이(胥易)는 ‘심부름꾼’, ‘말단’, 기계(技係)는 기술로 먹고 사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호표지문(虎豹之文)은 명예를 좇는 사람들을 비유한 단어입니다.

리(犛)가 아니라 리(狸)로 된 판본도 있다고 합니다.

 

陽子居蹴然曰: 敢問明王之治.
老聃曰: 明王之治: 功蓋天下而似不自己, 化貸萬物而民弗恃., 有莫擧名, 使物自喜., 立乎不測, 而遊於無有者也.

양자거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감히 명왕(明王)의 다스림에 대해 여쭙습니다.”
노담이 말했다. “명왕(明王)의 다스림은 공로가 천하를 뒤덮어도 자신이 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고, 교화가 만물에 베풀어져도 백성들이 [그에게] 의지하지 않고, [다스린 사람은] 있지만 [누가 한 것인지] 이름을 거론할 수 없으며, 만물로 하여금 스스로 기뻐하게 하여 알 수 없는 곳에 서고 무()의 세계에서 노닌다.”

이 문장은 특히 노자와 비슷한 구절이 많습니다. 대표적인 게 사부자기(似不自己)인데, 해석하면 ‘자신이 한 게 아닌 것처럼 하다.’입니다. 뒤에 나오는 민불시(民弗恃), 자희(自喜)도 마찬가지입니다. 민불시는 백성이 군주의 다스림으로 잘 살게 되어도 의식적으로 그에게 의지하며 사는 게 아니라 우리가 원래 이렇게 살았던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을, 자희는 본성에 따라 사는 것에서부터 오는 자기 충족적인 기쁨을 말합니다.

무유(無有)는 ‘있음이 없는 곳’이니까 해석하면 ‘무의 세계’, 앞에 나온 단어를 빌리면, 무하유지향(无何有之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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