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과 글쓰기

3.28 주역과 글쓰기 6주차 후기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21-04-01 16:33
조회
147
 

후기를 쓰려고 지난 시간의 토론과 강의를 복기해보니, 다른 조의 선생님들께서 어떻게 주역을 공부하고 계시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저는 만화쌤, 재복쌤, 은남쌤, 수정쌤과 함께 헤매며 주역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헤매는 것은 작년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확실히 공부하는 기운이 바뀌었습니다. 새로 합류하신 재복쌤과 만화쌤이 기본적이지만 핵심적인 질문들을 해주시고, 거기에 힘입어 작년 멤버들도 보다 깊게 주역과 만나고 있습니다. 덕분에 차근차근 짚으며 공부하고 있습니다. 다른 선생님들은 어떤 고민 속에서 어떻게 주역을 헤매고 계시는지 궁금하네요!

 

하늘에 묻는다순리(順理)를 따른다

공부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각자 다르지만, 어떤 사건들이 오든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것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라는 목적에는 공통됩니다. 특히 변화를 사유하는 주역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게 하는 데 있어서 매우 유용한 학문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 하나의 사건을 긍정하려는 시도가 많은 경우 ‘하필 지금 나에게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인과’를 역추적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하지만 스피노자가 말했던 것처럼, 이런 식의 물음은 세상을 자기 뜻대로 움직이는 초월적 신을 세우는 식의 무지의 도피처로 귀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적어도 주역에서 말하는 것이 하나하나 세세하게 사건의 경위를 따지라는 얘기는 아닐 텐데 말이죠.

일단 토론에서는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시선을 갖는 것’이라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주역에서 사람이 겪을 수 있는 모든 사건을 64괘로 정리했듯이, 지금 내가 겪는 사건 또한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주역에서 괘 하나가 다른 괘들과의 연관 속에 있듯이, 내가 겪는 사건 또한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들과의 연관을 이미 함축하고 있겠죠. 그래서 괘를 가지고 놀다 보면, 그로부터 내가 겪는 사건도 가지고 놀 수 있는 여유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얘기였습니다. 하지만 채운쌤의 강의를 듣다 보니, 다분히 관념적인 얘기가 아니었나 싶었네요.

우선, 채운쌤은 주역의 논리가 기본적으로 ‘인간의 계산으로 세계가 흘러가지 않는다’에 기반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점을 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바가 없을 때, 기운(神)에게 물어보는 일입니다. 이는 근대인의 합리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논리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주역이 보기에, 우리 근대인들이 이상하게 보일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세계는 겨우 인간이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더 잘살 수 있도록 셋팅되어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역을 읽다 보면, 세계는 우리의 합리성을 언제나 벗어납니다. 어떤 때는 아무리 노력해도 상황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지만, 어떤 때는 계절이 바뀜에 따라 저절로 문제가 풀리기도 합니다. 자연(自然)이란 글자가 말해주듯이, 우리는 세계의 리듬에 대해 ‘저절로 그러하다’ 이상을 말할 수 없습니다.

철학적으로 주역을 읽을 때도 점을 칠 때와 마찬가지로 자연에 대한 겸손한 태도를 견지해야 합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러한 태도를 체득하는 것이 목표겠네요. ‘순리(順理)를 따른다’는 말이 이미 전제하듯이, 순리를 따르기 위해서는 먼저 이치(理)를 통찰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치를 통찰하는 것은 길에 떨어져 있는 물건을 줍듯이 갑자기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것을 체득하기 위한 수행(修行)이 동반돼야 합니다. 유가에서 예(禮)를 중시한 것도 이런 맥락입니다. 그것은 상명하복의 질서를 부여하기 위한 지배층의 이데올로기이기 전에 관계성을 터득하기 위한 구체적 훈련입니다. 그런 점에서 ‘따른다(順)’는 것은 단순히 머리 안의 공상적인 생각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신체적 훈련을 통해 이치를 몸에 새기는 구성적인 표현입니다.

‘순리’가 그 자체로 이치를 터득한 신체를 구성하는 훈련이라는 점에서 고대 그리스 철학과도 만납니다. 이치를 따르기 위한 훈련과정은 곧 감정에 휘둘렸던 신체와 결별하는 과정입니다. 공자가 “군자는 진실로 곤궁할 수 있지만, 소인은 곤궁해지면 과도한 행동을 한다(君子固窮 小人窮斯濫矣 - 《논어》 〈위령공〉 1장)”라고 말한 것이나, 안회가 ‘가난함을 편히 여기며 도를 즐겼다(安貧樂道)’는 것들이 이치를 터득한 신체가 무엇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것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평온하게 살아가는 현자의 삶입니다. 비슷하게, 고대 그리스에서도 영혼의 평정(아타락시아)을 얘기했습니다. 이때 영혼을 평정하게 만드는 것은 자연학적 이해, 곧 세계에 대한 통찰을 동반해야 가능합니다. 가령, 에피쿠로스와 루크레티우스라는 철학자는 세계는 원자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에 따르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어리석은 자들만이 저지르는 일입니다. 이들은 우리의 몸은 원자의 결합이고, 죽음은 원자의 해체라고 말하죠. 우리가 살아있을 때는 ‘죽음’이란 사건이 오지 않았고, 이미 몸이 해체되었을 때는 죽음을 감각할 수 없습니다. ‘나’는 살아있는 동안에만 ‘나’이고, 죽었을 때는 더 이상 ‘나’가 없으니 죽음에 대해 어떤 공포도 느낄 필요가 없는 것이죠. 이런 식으로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에게도 순리를 따르는 것은 이치를 통찰하는 능동적 실천이었고, 정서에 예속되는 것은 무기력·무지의 소산이었습니다. 루크레티우스가 궁금하시다면 규문 홈페이지에 연재되고 있는 민호쌤의 〈청년, 루크레티우스를 만나다〉를 읽어주세요~

 

書不盡言 言不盡意

고대 중국에는 언어가 갖는 한계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있습니다. 언어는 생성소멸하는 세계에서 특정한 대상을 분절하여 고정시키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지지난 시간에 강의해주셨던 것처럼, 언어는 대상을 투명하게 반영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사과가 잘 익었다’라고 얘기한다고 해도 그것은 실재의 사과의 특정한 상태를 추상화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런 식으로 언어는 대상을 상징화(symbolization)하는 기능을 가집니다.

문제는 마치 언어가 특정한 대상을 투명하게 지시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가령, 부처님의 말씀은 깨달은 자의 언어지만, 부처님의 말씀은 그 자체로 깨달음을 담지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가시는 곳마다 듣는 자들에 적합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깨달음을 담은 언어가 따로 있었다면 굳이 대기설법(對機說法)을 펼칠 이유도 없었겠죠.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너희들의 언어로 설법을 전해라’고 하신 것도, 언어로는 깨달음을 담아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언어가 그 자체로 깨달음을 담지할 수 없다는 것이 곧 언어의 폐기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역의 성인과 부처님이 그러했듯이, 언어를 다르게 사용해야 하는 것이죠.

채운쌤은 “글은 말을 다 나타내지 못하고, 말은 의도를 다 나타내지 못한다(書不盡言 言不盡意)”는 구절이 글과 말의 한계만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글과 말을 사용하는 것의 어려움까지 담아내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분명 글은 말보다 규정성이 크고, 말은 의도보다 규정성이 큽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도를 말로 표현할 때는 보다 엄밀하고 신중하게 말을 사용해야 하고, 말로 글을 표현할 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언어는 한계가 있고 의도를 분명히 나타내기에 어렵지만, 우리는 언어를 통해서만 성인의 의도(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성인이 입상(立象)하고 계사(繫辭)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로부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던 것도 언어의 이러한 한계를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계(繫)와 립(立)은 사방에서 볼 수 있도록 성인의 상징적 언어를 드러냈음을 표현한 글자입니다. 이는 곧 그것을 보고 너희들 스스로 해석하라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아마 이런 지점들이 《주역》이 시대를 거듭해서 다시 읽힐 수 있는 매력인 것 같습니다.

 

형이상(形而上)과 형이하(形而下)

형이상(形而上)과 형이하(形而下)는 서양의 형이상학(Metaphysics)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서양에서 말하는 형이상학은 현실화된 개체 이전의 차원을 다루는 학문입니다. 스피노자나 라이프니츠가 말하는 ‘신’에 대한 논의들이 형이상학의 예입니다. 반면에 주역에 나온 ‘형이상’과 ‘형이하’는 형(形)을 동시에 얘기하는 단어로 이해해야 합니다. 저는 처음에 서양의 형이상학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했는데요. 그런데 이렇게 이해하면 ‘형이하’에 대한 논의가 필요없겠더라고요. 그리고 형(形)이란 것도 딱히 생각할 필요도 없어지고요. 깔끔하게 정리되지는 않았지만, ‘형’을 어떻게 이해할지 고민해가야겠습니다.

고대 중국에서 상하(上下)는 전후(前後)와 통용됩니다. 도올은 “形而上者謂之道 形而下者謂之器” 이 구절에서 도(道)를 “원리적 측면”, 형(形)과 기(器)를 “물건 자체”로 번역했습니다. 도올이 “형이상학이나 형이하학이 모두 다 형(形) 내의 사건이 되는 겁니다.”라고 할 때는 형(形)을 운동의 측면에서 다르게 얘기할 줄 알았는데, 색다른 얘기는 없는 것 같습니다. 채운쌤께서 ‘형’을 ‘도’의 운동으로 설명하셨을 때, 스피노자의 속성 개념이 떠올랐습니다. 마트롱이라는 스피노자주의자에 따르면, 만물을 생산하는 원리가 실체이고, 실체가 전개되면서 취하는 구조가 양태(만물), 실체가 자신의 구조들을 산출하는 방식이 속성입니다. 물론 속성이 양태들의 형상을 갖추는 고유한 방식으로 얘기될 수 있는 것은 속성이 무한하게 많은 것과 연관이 있어서, 주역의 구절과 바로 연결하기에는 힘듭니다. 하지만 스피노자에서 ‘속성’으로 원리와 각각의 개체가 한 평면에 놓일 수 있듯이, 형(形)도 도(道)와 기(器)가 분리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힌트가 될 것 같은데, 오리무중입니다.

형(形)에 대한 해석은 차치하고, ‘도’와 ‘기’를 동일한 평면에서 얘기할 수 있다는 것은 드러난 구체적 사물만이 전부가 아님을 뜻합니다. 도올이 말한 내재적 초월성(immanent transcendence)이나 들뢰즈가 말한 ‘경험적 초월론’ 같은 논의들은 경험을 온전히 긍정하기 위한 논의들입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긍정은 개체적 차원의 느낌입니다. 그러나 개체의 느낌에 국한되어서는 분별적 사고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사건들을 긍정하려면, 그것들의 좋고 싫음과 같은 개체의 느낌을 벗어나야 합니다. 이는 개체의 경험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개체의 경험을 경험이 가능한 지평 속에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주역에서 하나의 괘를 여러 괘와의 연관 속에서 이해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괘를 변화 속에서 이해하는 것은 음양의 갈마듦이라는 운동으로부터 사건을 이해하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괘에서 제시하는 실천들은 단순히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을 단속할 구체적 지점까지 포함하죠. 가령, 천뢰무망괘(天雷无妄卦)에서 “이정(利貞)”이란 자신의 기대, 사욕(私欲)을 세상에 투여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채운쌤이 말씀하신 대로, 자신의 노력으로 풀리지 않는 세계가 있다는 인식. 그리고 그로부터 겸손하게 살아가겠다는 발원 같은 것이 근대인들이 잃어버린 감각인 것 같습니다. 무망괘에서 제시하는 실천도 각자에게 부여된 본성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지 ‘부국강병’, ‘경제성장’ 같은 목표가 아닙니다. 자신이 살아가는 지평을 우주적인 스케일 속에서 바라보기. 주역을 공부하다 가끔 감동받는 것은 이런 형이상의 측면 덕분인 것 같습니다.
전체 3

  • 2021-04-01 18:20
    강의에서 들은 형이상의 도와 형이하의 기가 동시적으로 작동한다는 말이 어느 정도 이해의 상을 구성해주는 것 같지만, '形而上者謂之道 形而下者謂之器'라는 문장은 사유의 어떤 지점을 가져와야하는지 어렵다는 느낌이 듭니다. ~

  • 2021-04-02 10:49
    종으로 횡으로 성실하게 오가는 우리 규창님 공부의 기미가 드러나 보이는 좋은 후기네요^^ 아울러, 왜 우리가 '동사서독'해야하고, 또 할 수밖에 없는지, 나아가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에 대해 역설하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공부하다 어설프게나마 둘을 엮어보려는 욕심이 들어 한발짝 더 나가보려고 하다 보면, 여지없이 두 세계 사유의 바탕 자체가 다른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 때가 여지없이 찾아오게 되는거 같거든요. 여튼, 어떤 식으로든 시도하다 보면 두 사유체계가 맞닿고 갈라지는 지점들이 보리이라 싶습니다. 공부꺼리 던져줘 감사해요, 규창~~!!!

  • 2021-04-03 23:34
    이치를 이해한다는 것이 관념이 아니라 어떤 측면에서 구체적인 것으로 다가오는지 늘 궁금합니다. 관념이 아닌 신체성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당장 삶이 바뀌는 문제고 정서가 바뀌는 거라고 듣습니다만 이런 변화는 누가 인증해주는 것도 아닐테고 드러나는 것만이 전부이겠지요. 규창샘의 여러 공부와 접속하고 있는 이런 후기가 변화를 말해주는 거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