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과 글쓰기

4.11 주역과 글쓰기 공지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21-04-06 15:36
조회
140



일요일 공기가 유독 맑고 청명했습니다.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조별로 꽃사진을 찍었네요 ㅎㅎ 어떤 팀이 더 꽃다운지(?) 투표해 주시지요~




<계사전> 下는 본격적으로 문명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복희씨와 신농씨가 나오고, 인간들은 농사를 짓고 배를 만들고 수레를 끌기 시작했지요. 일종의 동양식 문명신화입니다. <신들의 계보>와 달리 너무나 조화로운 인간의 문명이 건설되지요. 이러한 신화를 보다가 헤시오도스를 보면 비장미가 넘치고 무엇보다 헤시오도스 본인이 문명에 대해 갈등하고 있는 게 보이죠. 서양의 문화영웅이라 할 수 있는 프로메테우스는 애증의 대상이고요. 혼란스러운 와중에 헤시오도스가 붙잡는 것이 바로 '정의'의 차원입니다. 유산 상속 소송에서 진 헤시오도스는 형을 성토하며 정의를 찾습니다. 이때 정의란 무엇일까요? 사실 그렇게 뚜렷하진 않습니다. 헤시오도스의 정의는 형이 법을 어기고 동생을 박대한 것에서 비롯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불의를 행한 자가 있으면 그렇게 하지 않은 자에게 정의가 임하는 것이죠. 이렇게 말하면 이상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정의의 형태이기도 하지요. 불법을 저지른 자에 대한 단죄가 곧 정의를 이루는 것이라고 말하곤 하니까요. 서양의 정의의 여신이 눈을 가리고 어떤 예외도 허용하지 않겠다고 서 있는 것도 그런 맥락에 있지요.




동양의 정의는 서양의 정의의 여신이 보기에 무척 정의롭지 않을 것입니다. 가령 공자는 양을 훔친 아버지를 고발하지 않은 아들이 바로 신고한 아들보다 더 정직하다고 했지요(자로 18장). 절대적 평등, 척도 대신 동양에서 중시하는 것은 그 실정(實情)이었습니다. 어떤 상황이라도 무조건 작동하는 척도가 정의로움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보다는 상황에 따라 척도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사건을 판단할 수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물론 아무나 데려다가 판결을 시킬 수는 없죠. 철저한 수양으로 단련된 사람이 곧 어떤 일에 대해 판단할 수 있는 대인(大人)인 것입니다. 이 경우 불의를 향한 자가 벌을 받는 것이 정의롭다는 말은 통하지 않겠죠. 이 경우 정의는 외부에 있는 척도가 아니라 그 사람의 수양에 달려 있는 것이니까요. 인간 자신의 내면의 덕을 어떻게 수양할 것인가. 이 문제를 중시한 동양 세계관에서 얘기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바름입니다. 우리가 읽는 <주역>에서도 일단 나 자신의 바름을 잘 지켜야 한다는 말이 끊임없이 나오죠. 그렇지 않으면 어김없이 변하는 상황 앞에서 인간은 휩쓸리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외부에 척도가 있는 한 인간은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 이걸 어떻게 <주역>적인 말로 풀어볼 수 있을지 생각해 보며 텍스트를 읽으면 좋겠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계사전> 233쪽(계사하전 5장)까지 읽고 궁금한 점이나 흥미로운 지점을 체크해 옵니다.

-<주역> 택화혁(澤火革), 택뢰수(澤雷随) 읽고 노트해 옵니다.

-<티마이오스>는 세 번에 걸쳐서 읽습니다.

① 도입부와 1부 : 25~82

② 2부 : 82~127



③ 3부 : 127~끝

본격적으로 봄이 시작된 거 같습니다! 날씨도 좋고 몸도 나른~하지만 더 씩씩하게 공부하도록 해요! <중용>을 <계사전>과 함께 읽는 중계세미나에도 관심 가져주시구요. 주역과 글쓰기 시간이 끝나고 그날 공부한 괘를 '달달' 외우는 시간도 되도록 많이 참여해주세요^^ 그럼 일요일에 만나요~


전체 1

  • 2021-04-07 18:19
    외부에 척도가 있는한 수동적이라는 말은 '흐르지 않는다. 고정된다.'라는 말로 바꿀 수 있나요? 그나저나 조별 꽃사진이 안보이는 것은 제 노트북만 그런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