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

소생 프로젝트 7월 19일 후기

작성자
혜원
작성일
2018-07-23 17:46
조회
98
이슬람 문화는 여전히 우리에게 낯설기만 합니다. 성속(聖俗)이 분리되지 않는 종교라는 게 감이 오지 않았고요. 이번에는 신에게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타력(他力)종교라는 말도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은 신의 뜻이다? 내가 하는 일을 스스로 책임지고 주체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말에 더 익숙한 우리는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여러 말들이 오갔습니다. 성속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건 결국 종교와 생활윤리가 분리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치고. 유일하고 초월적인 인격신에게 온전히 자신을 맡기는 건 도대체 무엇인지?

두 권의 <이슬람>을 읽고 거의 이슬람에 귀의하기 직전인 우리는 꽤 긍정적인(?) 사고를 하려고 노력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역시 내 생활을 신의 뜻에 모두 맡긴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지 알 수 없더군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타력'을 어떻게든 우리가 생각하는 '능동'으로 바꿔보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나 싶습니다.


세 가지 종교


우리가 이슬람에서 가장 익숙하지 않은 것은 역시 공동체에 대한 감각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합리적인 약속에 의해 사회가 구조화 된다고 생각하는데 반면 무슬림은 모든 근거를 꾸란으로부터 가지고 옵니다. 성속이 분리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타력종교라는 것은 우리를 곤혹스럽게 하지요. 우리는 인간이 스스로 책임을 지고 컨트롤 할 수 있는 합리성의 영역이 엄연히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그걸 전제로 행동하니까요. 그런데 타력종교 이슬람은 그런 자유의지를 거부합니다. 이때 인간의 능동성은 어떻게 말할 수 있으며 인간의 윤리는 어떻게 도출될까요? 거기다 이슬람은 자력구제를 말하는 불교와도 다릅니다. 이슬람의 신은 엄연히 초월적인 절대자의 형상을 하고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이 종교에서 구원이란 무엇이고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걸까요?


강의에서 기독교와 유대교와 이슬람의 차이에 대한 글을 읽으며 <이슬람>을 읽고 생긴 질문을 나누었습니다. 이 세 종교는 인접한 지역에서 발생했고 시조도 같으며 유일신과 그 신의 계시를 받는 예언자라는 구도도 비슷합니다. 아브라함도 예수도 나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 가지 종교는 미묘하게 다릅니다.


(1) 예수

기독교에서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예수는 분명 인간으로 났습니다만 기독교의 논리에서 보면 예수는 인간의 아들로 남아서는 안 됩니다. 부활이라는 인간의 조건을 뛰어넘는 스토리를 만들어 신적인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럼 이렇게 한 인간을 초월적인 존재로 만들어서 야기되는 효과는 무엇일까요? 이즈쓰 도시히코는 이슬람의 근원을 두려움에 둡니다. 기독교도 그렇습니다. 종교의 기반은 사실 두려움이지요. 두려움을 극복하면 그 존재의의가 없어지는 게 종교입니다. 아플 때, 죽을 때,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을 떄 인간이 종교를 갖는 것도 그런 심리상태에 의거해서입니다.

종교는 전부 스토리입니다. 그래서 이게 말이 되는지 마는지를 물을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스토리의 구조가 어떤 인간의 심리구조를 전제하고 있는지를 보면 됩니다. 니체가 기독교에 내재된 심리적 매커니즘을 파헤쳤던 것처럼요. 이슬람도 그렇게 볼 수 있을 겁니다.

기독교는 예수를 신으로 만들고 또 그런 예수를 믿습니다. 이때 예수는 삼위일체입니다. 신과 성령과 육화된 신적 존재인 예수는 사실 하나이지요. 하지만 이슬람에서는 삼위일체 자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신은 하나. 그 외에 다른 신은 없다. 이 심플하고 일원론적 구조가 사실 우리가 볼 때는 더 합리적입니다. 그런데 문득 의문이 드는 건 왜 기독교는 모순을 무릅쓰고 삼원론적 구조를 갖게 되었는가? 입니다.

삼위일체가 굳건하게 남아 있는 이유는 자본의 증식과 함께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라고 하는 절대적인 자본이 있고, 하느님의 아들과 이 증식관계를 추동하는 힘인 성령이 있습니다. 이 삼위일체론은 자본주의 논리와 상동한 것이죠.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 정신>에서도 자본주의의 윤리관이 형성되는 데 잇어서 어떻게 기독교가 기여했는지를 지적합니다.

사실 돈을 모으는 일은 옛부터 경시되던 일입니다. 돈을 가지고 돈을 늘리는 일은 더더욱 죄책감을 불러 일으켰지요. 하지만 자본주의는 돈으로 돈을 증식하는 것을 정당화 해줍니다. 바로 프로테스탄티즘의 논리와 자본주의 논리를 등치시키면서요.

이슬람은 그냥 일원론적 세계입니다. 인간과 신은 통하지 않습니다. 신은 하나, 그리고 주인. 여기서 감히 인간은 신의 아들일 수가 없지요. 인간은 이 관계에서 절대적으로 무력한 노예입니다. 즉 자유의지가 없지요. 그러다보니 자본주의가 파고들 여지도 없습니다. 자본주의가 성립하려면 내가 내 재산을 증식하는 행위가 정당화 되어야 하니까요. 그러기 위해서는 내 행위로 번 돈이 너무나 정당하다는 자유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내가 이만큼 해냈다는 뿌듯함이 있어야 하지요. 그런데 돈을 벌어도 잃어도 모두 알라의 뜻이라면 돈을 버는 욕망이 증식되지 않지요. '벌면 내 거' 라는 욕망의 구조가 만들어지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자유의지. 내가 당당하게 내 행위를 통해 뭔가를 벌 수 있다는 환상은 자유라는 이름으로 이룩되는 것이죠.

인간이 열심히 하면 대가를 받는다는 목적론과 자유의지 세트. 이슬람에는 이게 없었습니다. 비슷하게 동양에서도 돈을 버는 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는 사상적 매커니즘이 없었기에 자본주의는 쉽게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이슬람에서 예수는 선지자 중 한 명에 불과합니다. 이때 선지자, 예언자라는 존재는 신과 인간을 매개하는 자입니다. 무함마드가 40세 무렵 동굴에서 계시를 받기 시작하고 20년에 걸쳐 이루어진 것이 바로 계시입니다. 그 계시를 받아 적어놓은 게 꾸란이고요. 그래서 꾸란은 온전히 신의 말씀으로만 이루어진 경전입니다.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온갖 사람 목소리가 다 들어가 있지요. 불경도 마찬가지고요. 즉 온갖 해석을 거친 책이지요. 꾸란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사키 아타루는 꾸란이 해석자 혁명을 가져왔다고 했습니다. 순수한 신의 말씀을 갖고 있다면, 그 신의 말씀이 무엇인지 해석할 수 있지요. 마치 그리스에서 신탁을 받은 사람들처럼요. 신탁이나 계시는 사실 받은 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더 중요하지요. 신의 말씀 자체이기 때문에 그 신의 말씀이 무엇인지 해석하는 어마어마한 해석의 역사가 만들어집니다. 이슬람 문화는 꾸란을 끊임없이 다시 쓰는 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슬람에서 예수는 이런 전통 안에 있는 것이죠. 예언자는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소리를 들은 자입니다. 즉 예언자는 해석자가 아닙니다. 메신저이고, 차라리 천사에 가깝지요. 그러므로 예수는 결코 신과 등치될 수 없습니다. 그럴 필요도 없고요. 그래서 꾸란에서는 십자가 죽음이 없다고 합니다. 무함마드와 예수는 같은 급이고, 그 둘은 특별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2) 구원

기독교의 핵심 개념은 대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었고, 그로 인해 인간과 예수 사이에는 영원한 부채가 생겨났다는 것이죠. 이때 '영원'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갚아도 갚아지지 않는 것이 바로 이 부채입니다. 이때 인간은 예수를 믿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믿음이 곧 구원이니까요.

유대교는 예수 한 사람의 대속 개념이 없습니다. 대신 율법이 중요하지요. 유대인 사회 특유의 폐쇄성을 여기서 엿볼 수 있습니다. 자신들의 법을 믿고, 그로 인해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슬람에도 예수의 죽음으로 인한 대속은 없습니다. 이슬람은 심플합니다. 현세에서의 올바른 행동이 중요하지요. '실천적 다섯 기둥'이라는 것을 잘 지키면 됩니다. 1. 암송 2. 기도 3. 자선 4. 라마단 5. 성지순례가 그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신앙 자체가 아닙니다. 믿음보다는 실천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공동체적일 수밖에 없는 게 또 이슬람입니다.

이슬람에서 성속의 구분이 없다는 건 모스크가 가장 잘 보여줍니다. 무슬림의 성전인 모스크는 사실 일상생활 공간입니다. 모든 사람이 쉴 수 있고 거기서 놀 수 있는 곳이지요. 도피처이기도 하고요.


(3) 메시아

기독교에서 메시아는 최후의 심판 날 재림한 예수입니다. 최후의 날에 세상을 끝내고 구원받을 자와 그렇지 않을 자를 나눈다고 하지요.

반면 유대교에서는 메시아는 '아직' 오지 않습니다. 유대교의 메시아관은 특이합니다. 일단 메시아가 나타나야 하는데, 메시아는 지금 이 새를 가져오기도 했고, 또 메시아는 장차 올 시대이기도 하거든요. 그러니까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유대교의 시간관에서는 하나입니다. 유대교에선 메시아가 오는 게 구원의 완성인데 어쩄든 예수는 메시아가 아닙니다. 또 메시아는 현세의 구원을 완성하지만 현세를 끝내고 또 심판하는 존재는 아닙니다.

이슬람에는 메시아가 없습니다. 알라는 모든 것을 주관하는 신인데 다른 존재가 또 있을 리 없죠. 그들에게 구원은 메시아를 매개로 하지 않습니다. 그저 신의 뜻을 따르는 행위에 의해 구원받는 것이죠.


(4) 원죄

마지막으로 원죄에 대해 정리해 보겠습니다. 기독교를 성립시키는 핵심적인 개념이 바로 원죄입니다. 이슬람에는 원죄사상이 없습니다. 알라가 모든 것을 주관한다는 것을 인정하기만 하면 되지요. 참 심플한 종교입니다

기독교의 원죄 개념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죄의식을 야기합니다. 예수의 대속과 그로 인해 영원히 부채감을 떠안게 된 기독교의 복잡한 심리 메커니즘은 서유럽에서 발달한 정신분석의 기초가 되지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복잡한 기제를 자기화하는 '내면'이라는 것이 생겨납니다.

동양에는 내면이랄 게 없습니다. 그래서 동양에서 정신분석은 잘 통하지 않았다고 하지요. 재밌는 건 우리나라가 기독교 최후의 보루가 되었다는 겁니다. 도대체 기독교와 우리나라의 무엇이 만나서? 이는 생각해볼만한 문제 같습니다.

유대교에서 죄는 열심히 살지 않는 것. 게으름과 무능력입니다. 유대인 중에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많은 건 이런 관념과 연관이 있을 거 같습니다.

이슬람에서는 신과 인간을 주종으로 설정합니다. 너무나 단순한 초월론이죠. 이 세상을 만들어낸 존재는 하나뿐이기에, 인간은 뭘 해볼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세계에서 내면이 발달하기도 어렵지요. 그래서 소설도 만들어질 여지가 없습니다. 소설은 서양에서만 발달했습니다. 인간의 복잡한 심리적 매커니즘에 대한 고찰이 있는 세계관에서만 가능한데, 이슬람의 이 신과의 심플한 관계에서는 복잡한 심리 매커니즘을 만들어낼 여지가 없습니다.



이슬람은 알면 알수록 심플한 종교 같습니다. 기독교와 비교해서 그런 걸까요? 신은 하나, 절대적인 신에 인간은 범접할 수 없음.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음. 이런 일원론적 세계관이라 성속이 분리되지 않을 수 있었던 걸까요? 알라 외에 다른 잣대를 들이댈 이유가 없을 테니까요. 이 단순함과 성속 일원론, 그리고 완전한 타력을 이해하는 것이 이슬람 이해의 관건 같습니다.



이즈쓰 도시히코의 <이슬람>을 읽고 흥미로운 점


마지막으로 각각 이즈쓰 도시히코의 <이슬람>을 읽고 흥미로웠던 점을 말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각자 흥미로웠던 지점과 채운쌤의 코멘트를 함께 정리해 보겠습니다. 다음 과제에서 참고하시길^^


(1) 건화: 이슬람에 성직자 계급이 없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울라마는 종교적 권위로 무장한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법학자도 아닌 특이한 계급. 종교가 일반인들은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영성의 차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계급이기도 함. 이슬람적인 영성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됨.

서양에는 없는 이슬람적 영성. 꾸란 해석과 법학이 연관된다는 것은 흥미로운 지점이다. 가령 호메이니 혁명은 이슬람 특유의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종교란 신앙이고 혁명은 정치적 영역인데 호메이니 혁명은 그 경계가 뚜렷하지 않음. 이들에게 종교와 학문적 영역의 경계가 있을까? 이들에게 지식은 뭘까? 울라마는 일종의 지식인인 거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볼 수 있을까?


(2) 혜원: 무함마드가 상인이라는 것. 성경도 꾸란도 사실 당시 지방언어였다. 불경도 당시 사람들이 쓰던 구어인 빠릴어. 우리가 캐논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모든 경전은 구체적인 현실에서 만들어진 것. 메카와 메디나 시기의 꾸란을 해석하는 것도 해석자가 어떻게 현대적 문제와 관련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

꾸란이 상인의 언어로 되어 있다는 게 이슬람교가 갖고 있는 독특한 특성. 하나의 종교가 어떻게 역사와 관련되어 있는가. 이슬람의 탄생 자체가 한 종교가 역사성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보여주는 사례. 종교의 역사성이라는 문제를 가지고 니체가 기독교를 가지고 심리적 메커니즘을 분석한 것처럼 상인의 심리적 메커니즘을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3) 민호: 이슬람과 기독교를 연관해서 생각해보고 싶다. 기독교의 두려움과 이슬람의 두려움 문제와 같은 공통되지만 질적으로 다른 문제가 있을 것.

성속의 문제에 대해 고려해 봐야 할 것. 우리는 어떻게 성속을 분리하고 사는가? 우리에게 성속이란 무엇인가? 현실의 삶과 이상을 분리하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성속에 해당되는 것이 있지 않던가? 지금 우리도 단순한 현세주의자는 아닌 것. 그렇다면 기독교가 성과 속을 구분할 때의 효과란 무엇이고, 이슬람이 성속을 하나로 볼 때의 효과는 무엇인지 알아봐야 할 것.


(4) 혜림: 이슬람이라는 종교가 현실을 인식하는 방식이 궁금함. 특히 이즈쓰 도시히코의 <이슬람>에 나와 있듯 존재를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연속적인 존재가 아닌 비연속적 존재로 보는 독특한 시점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5) 정옥: 비연속적인 존재 관념에 관심. 인과율을 적용하게 되면 원인이 있기 때문에 결과가 일어나는 것. 마치 그것이 자연법칙인 것처럼 보임. 하지만 이슬람에서는 알라가 의도했기에 일이 일어남. 이건 자연에 존재하는 인과율을 깨뜨리는 것. 기독교의 상벌개념으로도 설명되지 않는 이슬람의 절대적인 신과 관련된 영성이란?

근대는 서양의 법률과 민주주의가 합리성으로 무장하고 들어와서 성립된 세계. 이로써 성과 분리된 속의 세계를 구축한 것. 하지만 이슬람은 성과 속이 구분되지 않았음. 이를 폭력으로 밀어내고 성립된 것이 근대. 그렇다면 근대의 가치는 과연 정당하다고 할 수 있는가?


(6) 규창: 구원과 움마 공동체에 대해 알아보고 싶음.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를 안의 실천이 중시되는 것 같은데 뭔가를 실천한다는 것은 어떻게 구원이 되는가?

이슬람은 무서운 일원론으로 빠질 위험도 있음. 탈주선이었던 것이 죽음의 선으로 바뀌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음. 알라 아래 모든 사람이 형제라는 것은 잘 하면 평등이고 엇나가면 폐쇄적인 집단이 되어버림. 그렇다면 이슬람 식으로 타자와 관계를 맺는 것은 어떻게 볼 것인가? 이슬람은 인간을 어떻게 보길래 인간을 이렇게 불신하는가?


(7) 윤희: 이슬람의 생활사는 어떤 것인가? 이들의 영성이란?

돈을 버는 것에 자기 욕망을 투영하는 게 아니면 어떤 것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결국 돈이 영성이라고 할 수 있음. 종교에서 영성이란 무엇일까? 무용한 삶의 양식이 영성을 만드는 게 아닐까?


(8) 큰지: 자유의지가 없다면 이슬람이 윤리를 도출하는 방식은 무엇인가? 무엇을 기준으로 윤리를 만드는가?



문제와 생각한 지점을 정리해서 숙제방에 올리는 것이 과제입니다.

다음 시간은 <이슬람> 3장까지 읽어오는 것이고, 발제는 큰지 언니.



전체 2

  • 2018-07-24 00:42
    거의 귀의 직전인 ^.^;; 흥미로운 질문들로 빠글빠글한 소생이군요! 특히 민호의 질문과 답이 궁금합니다. 성과 속!

  • 2018-07-24 13:00
    '심플한 종교'가 누나가 느끼는 이슬람에 대한 가장 큰 느낌인가 봐요. ㅋㅋ 누나의 심플함이 어떤 건지 좀 더 궁금해지네요..! 카렌도 얘기하긴 했지만, 이슬람은 신의 말씀을 지나치게 해석하기보다는 '일단 실천하라'는 게 강조되기도 하죠. 목요일날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