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

소생 프로젝트 8월 2일 공지

작성자
박규창
작성일
2018-07-29 17:41
조회
122
날이 덥습니다. 일단 예술팀과 철학팀 발표하느라 고생했습니다. (짝짝짝짝) 재미와 유익함이 있으면서 다음 발표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ㅋㅋ 저희 역사팀은 8월 9일날 발표할 예정인데, 저희까지 하고 나면 총 점수 합산에 들어갑니다. 1등인 팀에는 회식비용을 지원한다고 하니 열심히 해야 겠어요. ㅋㅋㅋ 그리고 반장이면서 등산 모이는 시간에 늦은 점 죄송합니다... (_ _) 매번 공지 하나 쓸 때마다 사죄할 게 하나씩 생기네요. 꾸준한 질타로 저를 도와주세요!

공지부터 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나눠드린 H.코르방의 《이슬람 철학사》 ‘명상의 여러 기원’과 이즈쓰 도시히코의 《의식과 본질》 3장까지 읽어 오시면 됩니다. 《이슬람 철학사》의 발제는 제가, 《의식과 본질》의 1장은 큰지은 누나, 2장은 민호, 3장은 지영쌤이 맡았습니다. 지금까지 이슬람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을 익히고, 질문을 만들었다면(?) 이제부터는 이슬람의 구체적인 사상으로 들어갑니다. 지금까지 간질간질했죠? 이즈쓰 도시히코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이슬람에 대한 공부를 시작해봅시다. (물론 책이 문제였겠냐마는... ㅎ) 간식은 저와 지영쌤이 준비하겠습니다. 목요일에 봬요!

대상화하지 않기

공부할 때 가장 중요한 자세는 ‘대상화’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슬람을 읽으면서 두 명의 저자가 순니파와 시아파(+여러 학파)를 소개하다보니 마치 순니파는 이런 사람, 시아파는 저런 사람 이렇게 정리했었죠.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이 사유한 길을 따라가는 거였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철학팀에 의하면) 순니파와 시아파도 초기에 어떤 무리로 형성됐다기보다는 사상에 따라 개종이 자유로웠다고 합니다. 가령, 순니파였던 사람이 이슬람의 지도자가 무함마드의 혈통이어야 한다, 코란에 대한 해석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시아파로 개종했다는 것이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철학팀, 이거 맞나요? 아니면 댓글로 고쳐주세요~) 그러니까 이슬람에게 중요한 것은 순니파냐 시아파냐 보다는 무슬림인 자신의 삶을 어떻게 꾸려나갈 것인가에 대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들의 생각은 곧 순니파 혹은 시아파에 속하는 것으로 이어졌습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순니파와 시아파가 누구이고, 무엇을 믿었는지 등등 도식적으로 정리하는 게 아닙니다. 그들이 어떻게 해서 갈라지게 되었는지, 대립할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인지, 그들이 인식하는 코란과 세상은 어떤 것인지 등등이고, 이로부터 순니파와 시아파를 그려나가는 것이죠. 채운쌤은 그동안 배운 것을 떠올리면서 이슬람이 어떻게 주체를 선험적으로 두지 않고 윤리를 발생하는지 (제발) 생각하라고 하셨습니다. 공부는 지식을 익히는 것보다 책 읽는 자세가 많이 중요한 것 같아요. 크흡...! ㅠㅜ 뜨끔한 당부는 이 정도로 마치고 ^^;; 이번 시간 강의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하고 공지를 마치겠습니다.

이슬람의 영성

우선 이슬람은 부분적으로 동서양의 모습을 둘 다 가지고 있습니다. 이슬람이 발생한 지금의 아랍~이란은 지리적으로 유럽과 동양 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구의 자전 탓일까요? 혹은 지역마다 고유한 자기장이 흐르는 걸까요? 채운쌤은 이슬람이 서양처럼 세상을 조율하는 인격체로서의 신을 설정했으나, 동시에 동양처럼 모든 것을 신의 뜻에 맡기는 겸손함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아마 이들이 한쪽으로는 유럽과 통하기도 했고, 다른 한쪽으로는 동양(실크로드)와도 연결된 탓도 있을 것 같은데... 잘 모르겠습니다.

저번 시간에도 얘기했지만, 이슬람은 끊임없이 해석되는 종교입니다. 그런데 이슬람은 모든 생활 윤리를 코란으로부터 가져왔기 때문에, 이들에게는 해석이 곧 정치와 윤리, 세력을 형성하는 것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이슬람의 역사를 해석의 역사라고 하는 것도 단지 해석이 많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역사에서 새로운 해석이 발생함은 곧 새롭게 코란을 읽어낸 것이고, 새롭게 읽힌 코란은 새로운 윤리와 새로운 사회상을 제시합니다. 푸코는 말년에 이러한 이슬람의 속세에 대한 실천과 연결된 것으로서의 ‘영성’을 고민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주체의 ‘자유의지’나, 절대적 역량으로서의 ‘이성’을 설정하지 않고도 근대의 합리성을 극복할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이란 혁명을 주도한 호메이니는 푸코에게 매우 신비로운 존재였습니다. 호메이니는 어떤 이념이나 정치적 강령을 내세우지도 않고 ‘내면의 깨달음’만 얘기했는데 무수히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이는 곧 이란 혁명의 원동력으로 이어졌습니다. 푸코는 이슬람의 ‘영성’, 불교의 수행을 나중에 ‘자기배려’라는 개념과 연결했다고 하는데, 이 부분은 잘 모르겠습니다. ㅎ 카렌 암스트롱도 얘기했지만, 서구에서 발생한 합리성에 근거한 근대와 다른 근대를 구축할 가능성이 이슬람에 잠재된 것만큼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이야기가 옆으로 샜네요. 돌아와서, 이슬람이 코란에 대한 해석에 목매는 것도 다른 해석을 인정하는 순간 자신이 살아가는 것을 부정하는 것까지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가령, 순니파는 개인의 경전에 대한 해석 및 판단(이즈티하드)을 인정하지 않음을 가장 큰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사실 이러한 경전에 대한 태도는 그 자체로 코란을 해석한 결과죠. 이런 순니파의 입장에서 보면, 시아파는 이단입니다. 왜냐하면 시아파는 코란에 숨겨진 의미(하키카)를 깨닫는 것을 목표로 하고, 그러기 위해 모두가 코란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생각은 최종적으로 신의 말씀을 듣는 것(계시를 받는 것)으로 연결됩니다. 이것은 코란에 대한 해석을 인정하지 않고, 예언(계시)은 끝났다는 순니파의 원칙과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나아가 순니파가 형성한 공동체의 근간을 뒤흔드는 일이기도 하죠. 그래서 실제로 역사적으로도 시아파가 순니파에게 탄압받음을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채운쌤은 시아파가 무함마드를 끝으로 신과의 접촉이 끝났다는 순니파의 해석에 대한 탈주선으로 등장했다고 하셨습니다. 스스로 코란을 해석하고, 신으로부터 계시를 받을 수 있다는 주장이 그들이 기존 순니파의 해석의지에 만족할 수 없음을 보여주죠. 그런데 시아파 안의 한 학파인 수피는 순니파와 시아파 둘 다와 또 다른 이슬람을 보여줍니다. 가령, ‘아부 사이드 이븐 아빌하이르’라는 수피는 자신이 신과 합일이 되면 자신이 있는 곳이 곧 카바(메카의 성지)라 말하며 모든 이슬람에게 주어진 최고 의무 중 하나인 메카에 대한 순례를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이슬람의 해석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기존의 해석으로부터 끊임없이 도주선을 그려내는 역사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들에 대한 소개를 들을수록 어떻게 이들을 모두 ‘이슬람’이라는 하나의 종교로 볼 수 있을지 궁금했습니다. 하지만 이즈쓰 도시히코가 얘기했듯이, 이러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는 덩어리를 이슬람이라고 봐야 합니다.

예언자, 고민하고 고통을 감내하는 자

이즈쓰 도시히코는 예언자의 어원을 살펴보면 ‘알리는 사람’, ‘통보하는 사람’이란 뜻이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어원으로부터 예언자를 ‘신이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다른 인간들에게 알려주는 사람’으로 했죠. 여기서 신의 말씀이란 저번 시간 채운쌤이 얘기하셨던 것처럼, 자기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한 결과로 나타난 환청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자기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건 뭘까요? 채운쌤은 예언자를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들은 사람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기존의 해석된 체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도저히 참지 못하기 때문에 깊이 고민하고, 그 고민이 환청으로 연결되기까지 한 사람들입니다. 공부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공부를 하러 오는 사람들도 다른 사람들처럼 똑같은 고민을 가지고 있어도 그냥 넘기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점에서 자기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한다는 것은 그 불편을 해결하지 않으면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음을 말합니다. 그런데 책을 읽는다고 해서 모두가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듯, 예언자들처럼 기존의 해석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고 환청을 듣는(자기 삶의 윤리를 발명하는)데까지 나아가기 위해서는 스스로 고난을 감수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의 수난을 흔히 passion of christ라고 합니다. ‘열정’으로 많이 알려진 passion은 사실 ‘고난을 겪을 수 있음’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예수는 하느님이 마련한 고난을 스스로 받아들였다고 하죠. 그래서 고난이라 하지 않고 수난(受難), 어려움을 받았다고 표현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열정’이란 단지 강력한 의지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 무엇을 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고통까지 감내하겠다는 능동성까지 포함하는 단어입니다. 예언자와 연결해보면, 예언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문제를 발생시키고, 그것에 충분히 고통을 받으며 해결하는 사람들입니다. 만약 무함마드가 다른 상인들과 똑같이 사는 것에 만족했다면 계시를 들을 수도 없었겠죠. 그러나 그는 남들처럼 사는 것에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깊은 고민은 어느 순간 계시로, 자신이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그를 ‘덮쳤습니다’. 채운쌤은 공부에서도 비약이 일어날 때 비슷한 체험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기존의 자신이 허물어지는 느낌. 그러나 아직 이게 뭔지 저는 잘 모르겠네요. 공부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는 증거일까요. 헤헤... 어쨌든 이런 관점에서 보면, 당대의 사람들이 욕망하던 것과 너무나도 다른 말을 했던 공자, 니체, 노자 등등 모두 예언자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상을 암기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사유한 길을 걸을 것! 이슬람을 통해 공부의 도약을 꿈꿔봅시다!
전체 2

  • 2018-07-29 19:53
    기존의 해석된 체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견딜 수가 없는 사람이 고민을 끝까지 밀고 갈 때, 그 때 만나는 고통을 온전히 겪어가는 것.
    예언자를 선택받은 자, 천재와 같이 나와는 다른 세계에 있는 사람으로 간주해 버리기가 일반이고 쉬운데,
    그들을 그들이게 한 과정을 들여다본다면 또 다르겠군요.

    강의를 잘 전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2018-07-29 23:29
    예언자의 고통은 '인식의 고통'이었군요. 철저한 현실 인식, 삶에 대한 깊은 사랑!